#027
그는 결국 저택 내의 거실에서 김지수 아가씨를 따로 만났다.
“이미 오성 위기 상황은 넘어갔고, 나머지 자잘한 이슈는 시간이 해결할 겁니다. 그런데 회장님 건강이 안 좋습니다. 최근 X파일 이슈 때문에 스트레스를 매우 많이 받았습니다. 미국에 간 것도 정말 치료 때문이었습니다.”
꾀병이라고 알았던 김지수도 깜짝 놀랐다.
“아빠가 그렇게 안 좋아요?”
“심각하지 않지만, 지금처럼 방치되어도 곤란합니다. 회장님이 굳이 오성 의료원 통해서 따로 원인 불명 환자를 조사한 것은 일시적인 변덕이 아닙니다. 뛰어난 명의 도움을 받기 위함입니다.”
이학준 비서실장은 딱 여기까지만 하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 오히려 반발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 하지만......”
그녀 눈동자도 불안으로 흔들렸다.
지금까지 내색하지 않았지만 늘 조민호 얼굴을 떠올렸다.
비록 사귀는 남자 친구와 깨진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라서 차마 조민호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아니 연락해서 만나면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전 남자친구와 같은 일이 또 생길 것이 분명했다.
몇 번이나 김건중 회장을 만나서 이 일을 매듭짓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미국으로 가버렸다.
더 황당한 것은 최근 헤어진 전 남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제 끝났으니, 앞으로 전화하지 말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녀 심사는 헝클어진 넝마처럼 복잡했다.
이학준 비서실장은 힐끗 이상한 그녀 얼굴을 갸웃하면서 이번에는 묵묵히 조사한 보고서를 내용을 낭랑하게 읽었다.
“......지수 아가씨가 완치된 시점에 의문의 마사지사를 통해서 받았고, 다행히 호텔 CCTV 카메라 사진을 통해서 조민호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7명의 다른 마사지사는 그 시점 이후입니다.”
조민호의 상세한 프로필은 곧 첨부 파일에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뜬금없이 깨어나서 건강을 회복한 후의 일이다. 다른 원인 불명의 환자 회복과 관련 내용 역시 꼼꼼하게 추가되었다.
아니 그는 이 내용 이전에 이미 일부 조사를 하다가 중지했기에 한국대 야구부 지압사 조민호를 꽤 잘 알았다.
“......아직 이들 사이에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관련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추가로 계속해서 조사하겠습니다. 내 밑에 있는 친구들이지만 정말 유능하지 않습니까?”
“.......”
김지수는 누구보다 오성 그룹 비서실 능력을 잘 알았다. 정치권 압력 때문에 퇴출당한 전 국정원 요원을 꾸준하게 수혈하면서 그들 능력은 몇 년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학준 비서실장도 이미 내심으로 한국대 야구부 지압사 조민호가 설마 김지수 치료사였다는 점에 진짜 놀랐다. 아니 조사할 때마다 꼭 방해물이 있어서 더 깊이 알지는 못했다.
“이제 묻겠습니다. 도대체 조민호 그 친구 정체가 무엇입니까?”
“아저씨, 시간을 좀 주세요.”
그는 지그시 김지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고, 뭔가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설마 조민호란 친구에게 마음이 있는 겁니까?”
“그게 좀......”
김지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제대로 말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조민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 남자친구 기억은 추억조차 남지 않았다.
“흠.”
이학준 비서실장은 외환위기 이후에 오성 계열사를 구조조정을 하면서 많은 사람의 애환을 직접 봤다.
그런 그가 고작 이십 대 여자 마음이 어떤지 금방 눈치챘다.
‘가만 아직도 아가씨는 회장님이 왜 전 남자 친구랑 결혼 반대한 이유가 집안 차이 때문이라고 알겠구나. 흠, 조민호라......’
사전 조사로 진행했던 조민호 집안 내력을 떠올리자 머리가 지끈했다. 아무리 좋게 봐준다고 해도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설사 회장님이 찬성할 리도 없겠지만, 사모님은 결사반대할 거야. 거기에 두 사람 교제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해도 끝이 좋지 않을 텐데, 이것도 문제군.’
“아가씨.”
“......네.”
“제가 회장님 지시를 받아서 구조 조정 본부장으로서 회사 조직을 구조 조정하면서 많은 사람의 아픔을 봤습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이 아가씨를 위해서도, 그 친구를 위해서도......”
“아뇨. 그분은 보통 사람이 절대로 아니에요. 아빠도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그도 깊은 감정이 담겨 있는 일침에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안 좋은데......’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사귀는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진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지난 일을 돌아보면서......”
“민호씨랑 너무 잘 맞아요.”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감정 때문입니다. 남녀 감정은 언제라도......”
김지수는 강하게 도리도리 머리를 내저었다.
“아뇨. 절대로 일시적인 감정은 아니에요.”
‘중증이군.’
이학준 비서실장은 더 들어가면 긁어서 부스럼 낸다는 것 정도는 경험적으로 아는 터라 딱 여기서 포기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조민호 그 친구는 어떻게 할 겁니까?”
“제가 먼저 만나볼게요.”
“오래는 못 기다립니다.”
“하지만 그분은 제 은인입니다. 그 점을 참작해 주세요. 이미 조사했다면 그분이 신비한 지압술 말고도 다른 놀라운 능력 갖춘 분이라는 거 잘 아실 것 아닙니까. 그러니 평소라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은 아저씨가 비겁하게 쓸데없는 말을 저에게 주절주절 늘어놓는 거죠.”
사실 이 부분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몇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는데, 특히 대홍실업과의 관계다. 이미 비서실 직원 통해서 조사를 진행했지만 알아낸 것은 그들이 조민호를 마치 마왕처럼 대한다는 것이다.
“......좋습니다.”
이학준 비서실장은 이미 최영민 팀장에게 크게 당한 터라 요즘 몸 사리는 것도 있지만, 능력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그는 놀라운 지압 능력을 갖춘 것 같은 조민호를 만나서 괜히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다른 엉뚱한 수작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아가씨가 문제네. 도대체 조민호가 어떤 친구기에 이렇게 푹 빠진 걸까. 회장님이 알면 난리가 날 텐데......’
***
국정원 X파일 사태는 이런저런 다양한 풍파를 겪으면서도 사그라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없어지지도 않았다.
떡검에 대한 불신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해서, 결국 떡값 전달책이라는 소문이 돌던 김석환 광주고검장도 딱 이 틈을 노리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자기 결백과 동시에 결국 사임했다.
-오성 떡값 명목으로 단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 죄가 있다면 과거 인천지검장으로 발령받은 점과 이해 당사자의 조카의 장인이라는 점뿐입니다. 하지만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해서 국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최기명 수원지검장을 비롯한 유성배 의정부지검장 역시 같이 사임했다.
오성 장학생 검사 몇 사람이 옷을 벗자 여론은 그제야 좀 잠잠해졌다.
조민호는 학과 수업에 정말 열중하는 중이라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뉴스를 통해서 꼬리 자르기 소식을 접했다.
그는 애초에 오성 그룹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 관심이 없었는데, 오성 그룹과는 아직은 얽힌 적도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는 김지수을 만난 최영준 차장을 통해서 오성이 결국 김지수 치료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냈다는 것을 듣고는 혀를 내둘렀다.
“결국 알아냈군요.”
“설마 그 호텔 CCTV가 문제가 될지 몰랐네, 내가 안이했어.”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니, 상관없습니다. 고작 마사지한 것이 뭐가 문제가 됩니까. 문제는 역시 그 김 회장의 의도입니다.”
그는 전생을 통해서 마의가 생명에 집착하는 권력자에게 얼마나 휘둘렸는지 옆에서 지켜봐 왔던 터라 골치가 아팠다.
이곳은 묻지 마 살인을 허락하는 무림이 아니라, CCTV가 곳곳에 도배된 현대다.
더욱이 조민호은 가능하면 조용히 살고 싶었다.
문제는 아직 자기 수족이 될만한 아군 세팅이 미흡하다고 판단했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연락하겠다고 말해주십시오.”
최영준 차장도 조민호 행동이 이전과는 달라지자 눈빛도 반짝였다.
“직접 알릴 생각인가?”
“굳이 숨길 일도 아닙니다. 대신에 만약 쓸데없는 짓을 하면 ‘당신들은 앞으로 치료받을 생각 없다.’로 알겠다고 명확히 해주십시오. 아니 협박하세요.”
“귀찮게 할 수도 있을 거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설픈 조폭보다는 오히려 정보 능력이 좋은 오성 그룹 비서실이라면 더 조심할 겁니다. 그 정도 견제면 충분합니다.”
“내가 아는 이학준 실장이라면 자네 생각처럼 아마 무리한 행동은 하지 않을 거네.”
“약간의 시간이면 됩니다.”
조민호가 그냥 생각나서 한 말이 아니라 중원 사상 최강의 절대자로 있으면서 갖은 모략을 경험해봤던 경험자로서 한 말이다.
“알겠네.”
***
그리고 이학준 비서실장도 당장은 김지수 치료사가 누구인지 급하지 않은 터라 굳이 긁어서 부스럼을 내지 않았다.
그는 더욱이 김건중 회장이 지금 미국에 있는 상황에서 김지수가 괜히 그 와중에 조민호와 얽히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사실 그에게 김지수 일이 더 심각했다.
남녀 사이란 게 못하게 말리면 오히려 더 뜨거워진다.
더욱이 지금은 김지수도 남자 친구랑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아직 조민호에 대한 감정이 깊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어차피 조민호를 만나면 그 때 따로 아가씨와 선을 분명히 그어둘 생각이었다.
조민호도 그럭저럭 끝낸 중간고사 성적에 만족했고, 기말고사나 열심히 준비하려고 했다.
그는 또한 김정환 검사를 앞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고민했다.
정작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압수 수색이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죄, 죄송합니다.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중앙지검에서 나온 애들이 지금 온통 사무실을 뒤집어엎는 중입니다.
-전혀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 그게 실은 몇 년 전부터 사장님이 어디선가 자금을 받아서 사채업을 했는데, 그 돈의 출처가 문제입니다.
‘가만 최근까지 로버트 힐 치료비까지 포함하면 현금 5억을 차로 배달했잖아. 설마 그걸 고리 사채 비자금으로 오해한 거야? 가만 김정환 검사가 쫓고 있다는 그 비자금과 사채 자금 사이의 연결 고리가 발견된 건가?’
“......젠장맞을.”
기가 찰 노릇이다.
그냥 가서 환자에게 1억 현금만 받아서 자신에게 넘기는 일이다. 이게 무슨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하지 않았다.
조민호도 대흥실업의 과거 범죄에 대해서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것이었고, 상황 파악을 위해서라도 대홍실업에 달려갔다.
수십 명의 경찰과, 심지어 현직 검사까지 와서 초토화하는 중이었다.
그는 다급하게 최영준 차장에게 전화로 도움을 청하려고 하다가 문득 보스로 보이는 사십 대 초반 창백한 남자가 수사를 지휘하는 중에 가슴이 찢어지라 기침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김정환 검사잖아. 그렇군.’
조민호도 마침 목표한 표적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생각을 바꾸었다.
‘김정환 검사라면 나쁘지는 않은데......’
김정환 검사가 괜찮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외고집 때문에 중앙지검 내에서 따돌림을 많이 받았는데, 역설적으로 이리저리 조직에 채이면서 금융 범죄와 재벌 범죄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를 경험했다.
조용히 사라지려고 했던 조민호는 국내 앨리엇 조직을 추적하는 적임자로 딱 적당하다고 판단하자 곧 마음을 정했다.
그는 슬그머니 박주명 사장에게 다가가서 친밀한 관계인 척 흉내 냈다.
“박 사장, 무슨 일 있어? 곧 준비할 물건이 또 올 거야. 돈은 문제가 없지?”
“!”
다급하게 부하를 통해서 경고를 해줬던 박주명 사장은 조민호가 여기 나타나자 오히려 패닉에 빠졌다.
“어, 어서......”
“잠깐!”
하지만 수사관은 그 반대로 ‘이게 웬 로또냐!’ 식으로 덥석 조민호를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 물론 혐의가 확실하지 않은 터라 당장 쇠고랑을 채운다든지 하는 것은 아니라, 일단은 참고인 조사 때문이었다.
조민호는 이미 다른 꿍꿍이 목적이 있기에 맛있는 별미를 먹는 사람처럼 눈빛을 반짝였다.
‘상황극도 재미있어. 과연 김정환 검사는 어떤 선택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