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이야기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 퍽치기 사건 때문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자기 잘못을 분명하게 시인했다.
조민호는 힐끗 민망한 아버지 모습을 본 후에 툴툴거렸다.
“괜찮습니다.”
“내 말은......”
그는 굳이 조수현의 진심 어린 사과라고 해도 이미 지난 일을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 일에 대한 화해 때문에 바쁜 큰아버지가 이 시골로 내려왔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혹시 저랑 관련된 다른 용건이 있는 겁니까?”
“그래.”
조수현도 생각보다는 초탈한 조민호 반응에 내심 크게 감탄했지만, 박상철 과장 의혹 때문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박상철 과장 컴퓨터에서도 몇 가지 회사 내부 자료가 나왔는데, 어떻게 그가 그 자료를 구해서 따로 확인했는지는 조사 중이다. 원래 이 계약을 아는 이는 소수인데, 사실 너희 외할아버지에게서 몇 년 전에 신탁을 통해서 거액의 투자를 받았다. 그 소유주가 민호 너다.”
“거액 신탁 투자 대행이라.”
그는 한 달 전이라면 깜짝 놀랐겠지만 이미 짐작한 일이라서 별로 놀라지 않았는데, 애초에 유산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사전에 미리 조사해온 조수현이 화들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은 민호 네 나이가 30살이 넘어야 한다는 제약 조건 때문에 자세한 것은 말하기 어렵다만 거액의 유산이나 마찬가지인데, 넌 놀라지 않구나. 아마 그 금액을 알면 경악할 거다.”
조민호는 천연덕스럽게 마루에 걸터앉으면서 수정과를 홀짝였다.
“저 진짜 가슴이 펑하고 터질 정도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자세한 내막까지 말하지 않는 것은 혹시 아버지도 관련 있습니까?”
여유롭다 못해서 오히려 소풍이라도 나온 것 같은 조민호 행동은 누구라도 감탄스러운 일이었고, 상상도 못한 그의 모습에 감탄한 조수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조민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힐끗 고개를 푹 숙인 동생 조철영 모습에는 오히려 쓴웃음을 지었다.
“너희 외할아버지도 걱정된 거지. 만에 하나라도 과거처럼 엄한 곳에 투자해서 돈을 몽땅 날릴 수 있으니까. 그분이 원한 것은 너희 가족이 돈 걱정 없이 무난하게 사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의도도 있습니까?”
“돈은 요물이다. 로또에 당첨되어서 일확천금을 얻은 수많은 사람이 폐인이 되어서 망가진 것이 그 단적인 예다. 너희 외할아버지는 바로 그런 점을 많이 걱정했다. 특히 내가 알기로 민호 네 경우도 썩 신뢰가 간다고 할 수는 없었다.”
조민호는 환생 전의 소심하던 자기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제야 마지막 실타래까지 확인하자 사건 정황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러면 큰아버지가 굳이 왜 이렇게 내려와서 그 내막을 다 말하는 겁니까?”
“그 투자 조건 중에 너희 세 사람에 대한 것도 있는데, 원래는 따로 서울에 집 하나와, 적당한 현금을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굳이 내 집에 빈방이 많이 남아돈다.”
그는 힐끗 조철영을 쳐다보면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시골집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철영아, 애들을 생각해서라도 당분간은 서울에서 같이 살자.”
조철영은 물론 자기만 생각하면 형수 눈치 때문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한쪽에서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딸 조지현과, 심지어 조민호가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을 다니는 것을 떠올렸다.
“형수님은 뭐라고 하지 않을까?”
“이미 다 끝난 이야기니, 걱정하지 마라. 나중에 너희 장인어른 만나면 말이나 잘 해주면 좋겠다.”
“설마 형은 장인에게 아직 남은 현금이 더 있어서 그런 거야?”
“너희 장인어른 보통 분 아니다. 나도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 모를 정도다. 그 자금이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거다.”
조민호는 혀를 내둘렀다.
“설마 그 말씀까지 할 줄 몰랐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마. 지금 중국 쪽 투자를 더 키울 생각인데, 자금이 많이 부족해. 확실한 투자처라서 원금을 더 키울 수 있다. 너희 외할아버지도 그것을 믿기에 나에게 투자한 거다.”
“그렇습니까.”
“싫으면 여기서 거절해도 된다. 내가 집은 이미 봐뒀으니까.”
조철영은 집보다 자기 친형이 한국 투자업계에서 신화를 써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성공했고, 특히 투자 업계에 대한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음알음 잘 알았다. 어차피 저 돈도 장인어른 것이다. 자신은 이미 나이가 들었지만 조민호나, 조지현 미래를 생각했다.
“알겠수다.”
조민호는 한쪽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슬그머니 방 안으로 사라진 동생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지만, 힐끗 조수현 선천지기의 안정적인 흐름을 떠올렸다.
그 어떤 거짓말 흔적은 없었다. 심적인 변화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선천지기 흐름이 흔들렸을 것인데, 그런 모습은 없었다.
‘저 정도면 나쁘지 않아. 어차피 앞으로 돈 관리할 사람도 필요했으니까.’
***
이사는 짐 대부분은 그냥 시골에 두는 것으로 결정 나서 생각보다 간단했다. 조수현이 이미 필요한 살림살이는 다 준비를 해놓았다.
조수현 저택은 강남구 논현동에 있었는데, 지하 1층-지상 2층으로 180평의 단독 주택인데, 옥내에 자동차는 4대까지 주차할 수 있다.
인접한 다른 집까지 매입해서 벽을 허물어서 합친 이 저택은 대략 75억 정도다. 어지간한 재벌가 저택 모습과 비교해도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조철영은 저택 규모보다는 입구 한쪽에 서 있는 커다란 수석(水石)에 새겨진 가족 이름을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선친이 가장 좋아했던 수석을 보자 지난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미안해.”
“나도 잘한 것 없다.”
조수현 역시 과거 20년 전에 동생에게 차갑게 대했던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착잡했다. 당시 형제간의 불화는 거의 원수지간 수준까지 격화되었고, 그것이 결국 선친 건강을 더 악화시켰다.
여동생 조지현은 지방 시골에서만 살다가 어마어마한 대저택을 처음 본 터라 입을 딱 벌린 채 구경하기 바빴다.
조민호도 아르바이트하면서 밑바닥 생활을 했으니, 당연히 조지현과 비슷한 반응을 보여야겠지만 동네 마을에 놀러 온 어르신처럼 별 표정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집이 너무 넓어서 청소하려면 정말 귀찮겠다는 푸념만 늘어놓았다.
조수현은 조지현 반응에 푸근한 미소를 쳐다보다가도 상상도 못한 조민호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녀석일까? 내가 조사했던 결과와는 전혀 딴판이잖아. 도대체 조사를 어떻게 한 것인지 모르겠어. 철영이 말은 숫기가 많고, 친구도 별로 없다고 했었는데......’
조민호는 애초에 여기에 살 생각이 없었는데, 굳이 이곳까지 온 것은 나머지 가족 두 사람이 잘 적응하나를 확인할 의도였다.
그는 때문에 정원 정자 바위 위에 떡하니 엉덩이를 깔고, ‘어 여긴 바람이 잘 통해서 정말 좋다’란 말만 남발했다.
조수현도 결국 조철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조철영 역시 머리를 긁적이면서 자기 아들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는데, 정말 자기 아들인지 의심이 갔던 것이다.
조민호는 따가운 형제 시선에 어깨를 으쓱했다.
“왜 그러세요?”
“너 정말 민호 맞아?”
“제가 가짜 민호면, 진짜 민호는 따로 있습니까?”
“그게 좀......”
넓은 저택 정원을 둘러보던 조민호도 결국 피식 웃었다.
“퍽치기당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니, 세상이 많이 달라 보였습니다. 아마 그 이후로 저도 좀 많이 변했습니다.”
조철영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고, 조수현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때마침 나타난 이는 40대에 들어서도 건강관리를 잘해서인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조수현 처 임서이가 사전에 다 연락을 받았는지 조철영 가족에게 일일이 인사했지만, 눈빛은 좀 달랐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불편함, 귀찮음, 걱정과 같은 감정이 가득했다.
장남 조정연은 미국 코넬 대학으로 유학 가서 이 자리에 없었고, 둘째 조정국은 현재 고려대에 재학 중인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막내 조지연은 세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들은 곧 현대식 실내장식으로 꾸며진 저택 거실로 들어갔는데, 긴 20년이란 시간의 단절 때문인지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조수현도 가족끼리 좀 빠르게 친했으면 하는 마음에 푼수까지 떨면서 억지 농담도 남발하고 했지만 잘 먹히지 않았다.
애초에 일 중독자였던 그는 유머 따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오히려 조민호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는데, 그 역시 소위 말하는 재벌가 사람을 만나 봤지만, 막장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그런 모습을 어느 정도 기대했건만 조수현은 젊은 사람처럼 겸손하면서도 합리적이었다.
오히려 백모 임서이나, 막내 조지연은 그런 모습을 살짝 보였지만 조수현 때문인지 대놓고 까칠한 성격을 보이지 않았다.
조수현은 그런 이질적인 분위기에 마침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 받았다가 깜짝 놀랐다. 마치 길가다가 날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조수현은 난리 치다가 따가운 가족 눈초리에 다급하게 전화를 끊고는 상의를 챙겼다.
“철영야, 회사에 일이 좀 생겨서 그래. 미안한데,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당신은 집 구경 좀 시켜줘.”
“알겠어요.”
그녀도 급한 일이 생겼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지금 당장 내색해서 남편을 피곤하게 하지 않았다. 다만 조철영에게 ‘도련님’이란 말을 어색하기도 했고, 익숙하지도 않아서 말을 더듬거렸다.
“도, 도련님은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조민호는 제일 뒤편에서 물끄러미 그 묘한 분위기를 살폈는데, 이대로 뒀다가는 적응이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이미 임서이 역시 그렇게 선천지기가 오염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고, 저 정도면 딱히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봤다.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두면 가족 간에 감정 대립이 커질 것이 분명했다.
박상철 과장 배후 때문에 경호 문제를 고려하면 차라리 두 사람이 이곳에 있는 것이 훨씬 좋았다.
그는 세상에 병 없는 사람 없다고 믿는 터라 백모 임서이를 물끄러미 살폈다.
임서이도 그저 새로운 가족을 빨리 안내하려고 서두르다가 계단에서 비틀거렸는데, 잔기침하면서 양손을 가슴에 모은 채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걱정 가득한 가족들의 시선을 받자 손을 저었다.
“아, 제가 요즘 신경을 많이 써서 몸이 안 좋네요.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조민호는 기회가 오자 냉큼 백모에게 다가가서 맥을 짚었다.
그의 선천지기과, 후천지기는 스탯 17을 넘어갔기에 순수한 혼원기도 이제는 다른 사람을 더 쉽게 스캔할 수는 있었다.
이 현상은 순수한 기운이 있는 곳에 오염된 기운이 같이 섞이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이치와 비슷했다.
조민호는 굳이 따로 정신을 집중하고 말고 할 필요도 없이 순리에 따라서 상대 선천지기의 흐름을 머릿속에 그렸다.
‘장문혈이 왜 손상을 입은 거지?’
대변이나, 소변이 급할 때 장문혈을 눌러주라는 말이 있는데, 새끼손가락을 쭉 따라 올라가면 대략 10cm 위치한 혈이다.
영문을 모른 임서이는 화들짝 놀라서 손을 빼려고 했다.
“조카님 갑자기 왜 그래요?”
다른 가족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에 영문을 몰라서 멍하니 쳐다보았다.
하지만 조민호는 오히려 눈살을 찌푸린 채 장문혈을 따라서 뒤틀림의 근원이 된 늑간동맥을 보고는 갈등했다.
그가 손을 쓰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늑간동맥 이상은 다른 질환처럼 이런 곳에서 단순하게 막 손을 쓸 상황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복강 내 대출혈이 일어날 거야. 지금 백모 상태라면 쇼크가 와서 즉사할 수도 있고.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냐?’
물론 병 없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처음 만난 백모가 늑간동맥 이상이라는 것은 황당했다.
처음에는 임서이도 혹시 조카가 자신을 성추행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딱딱하게 굳은 조민호 눈빛을 보자 그럴 수가 없었다.
“조, 조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조민호는 힐끗 다른 가족을 한 번 쭉 돌아본 후에 우선 자기 능력에 대한 적당한 각색 시나리오를 떠올리면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제가 중학교 시절에 시골에 아는 어르신 통해서 지압법을 배웠습니다. 고대 한의학의 정수라고 하던데, 솔직히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
가족들은 멍하니 이상한 소리를 하는 조민호를 쳐다보았다.
조철영이 결국 버럭 화냈다.
“이놈아, 형수님에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조민호는 조철영 이야기도 씹었다.
“다만 이 지압법을 배우면서 경혈을 좀 배웠습니다. 몸이 이상이 있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백모님, 제가 하나 먼저 묻겠습니다. 혹시 최근에 외상을 입은 적이 있습니까?”
임서이는 말도 안 되는 조민호 설명에 혀를 차면서 쳐다봤다.
“외상을 입을 적은 없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반사적으로 한 말이다. 하지만 흥미롭게 지켜보던 차남 조정국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툴툴거렸다.
“엄마가 3월에 신차 뽑아서 무리하게 몰다가 사고 냈잖아. 다행히 에어백 성능이 좋아서 큰 부상은 없었지만, 아빠가 얼마나 화냈는지 기억 안 나?”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