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그가 살해한 사람 수만 해도 세 자리를 훌쩍 넘어갔다.
‘아니 네 자리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해. 내가 왜 그랬던 걸까. 역시 마기 때문일까?’
최영준 차장이 먼저 지난 김지수 빌미도 그렇고 미안해서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최영민 팀장에게 부탁하는 게 어떨까?”
“먼저 선수를 치자는 말입니까?”
“적당한 선에서 연막도 치고, 독점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다시 한 번 오성 그룹이 똥오줌 못 가릴 정도로 오성 X파일 폭탄을 터트리는 거네.”
“나쁘지 않습니다.”
“직접 때리면 오성 그룹 쪽에서도 가만히 안 있겠지만 이번에 노리는 상대는 검찰 쪽이네. 그쪽에서 불법으로 한 짓이 있는데, 그걸 폭로하면서 오성 X파일도 슬쩍 같이 엮는 거야.”
조민호는 물끄러미 심적으로 갈등을 보이는 최영준 차장을 쳐다보았다.
“직계는 아니라고 해도 집 안이 관련되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최영준 차장도 잠깐 멈칫했다.
“......오성 X파일은 이미 최영민 팀장이 알아서 문젯거리가 될 것은 다 걸러냈네. 검찰의 강압이나 불법 수사는 어제오늘 일은 아니니까.”
“최영민 팀장님은 어때요?”
“그분에게 아직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 대찬성일 거네. 이제까지 복수하고 싶어도 자네 눈치 때문에 못했으니까.”
“그러면 망설일 이유가 없겠습니다. 이번에 확실히 쓴맛을 보여줘서 앞으로 집요하게 달라붙지 않게 하세요. 이것은 앞으로 그쪽을 치료해주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일을 막기 위한 예행연습으로 생각하죠.”
“알겠네.”
조민호는 유연진 치료를 통해서 얻은 소득에 다시 집중하려고 했지만 역시 딴생각이 떠올랐다.
‘환자나 치료하면서 적당히 돈도 벌고, 무학이나 다듬으려고 했는데......’
***
최영민 팀장은 평소와는 달리 가용 인력을 모두 동원해서 조민호를 조사하는 오성 그룹 비서실 모습을 불구경하듯이 지켜봤다.
그는 이미 최영준 차장 통해서 대충 분위기를 파악했을 때부터 이 일이 벌어질 것과 자기 어머니에 대한 경이로운 치료 결과 때문에 조민호와 관련해서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도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다.
그 와중에 유연진 사건도 있었다.
기존 환자와는 좀 다른 경우라 유심히 지켜봤다.
‘환자에 대한 차별 같은 것은 없는 것 같은데, 관심이 너무 집중돼.’
유연진 환자 경우는 다른 공인 환자에 대한 치료와 비슷하다.
지금은 무난하게 넘어갔지만 결국 영향력을 가진 이 중에 다른 생각을 품을 자도 생길 것이다.
앞으로 상당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그도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사건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지만 결국 저런 사태를 대비할 필요는 있었다.
더욱이 한때 국정원 관리자로 유명했던 최영민 팀장은 온순한 최영준 차장과는 달리 수비적인 포지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연막작전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필요한 정보를 넘겼지만 조금 공격적인 작전을 염두에 뒀다.
‘인원 충원도 하고, 정보도 얻고, 조직도 강화하는 것이 좋겠어.’
그 대상은 바로 정권이 바뀌면서 어쩔 수 없이 옷을 벗어 던진 이들 중에 오성 그룹 비서실로 뛰어든 후배들이다.
그가 대표적으로 꼽은 이는 이지현인데, 해킹과 미인계로도 유명했지만, 대인전투 실력도 제법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가전 무술을 배우기는 했지만, 원래는 경영학 전공자로서 안목이 남달랐는데, 자기 동생 심장병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오성 그룹 비서실에 합류했다.
“수술은 잘 끝났다고 들었다.”
한창 ‘조민호’에 대한 갑작스러운 조사 작업 지시에 정신이 없던 이지현은 갑자기 자신을 막아선 최영민 팀장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서, 설마 소령님!”
“어.”
“맙소사 어떻게 된 겁니까? 구속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거 무혐의로 끝났어.”
이야기 시작은 순탄했고, 뜻밖에 이지현은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그녀는 솔직히 지금 오성 그룹 비서실에 있지만 자기 일에 회의를 느낀 지 오래였다.
“실망 많이 했나 보군.”
“저도 김 회장님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일을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후계 작업 말이군.”
“어, 어떻게......,하긴 최 소령님이라면 모를 수가 없겠네요.”
긴 생머리를 바람 곁에 휘날리면서 판타지 소설 속의 엘프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뛰어난 미모 덕분에 오가는 이들 시선을 받았지만, 이지현은 그게 익숙한지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사귀는 남자 친구는 있어?”
“제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빚은 다 갚았어?”
“그럭저럭요.”
“내가 새로운 일자리를 소개해주고 싶은데, 같이 해볼래?”
“글쎄요. 당분간은 좀 쉬고 싶어요. 국정원이나 오성 비서실이나 전 소모품에 불과하더라고요. 이 몸뚱어리 노리는 쓰레기도 제법 봤고, 솔직히 남자라면 지긋지긋합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꾸준하게 단련된 그녀 몸매는 원래도 좋았지만, 지금은 더 화려하게 꽃을 피워서 마치 슈퍼 모델과 별반 차이가 없다.
“아니, 좀 다를 거야. 내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알아서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니까.”
“무슨 뜻이에요?”
“일종의 협회 비슷해. 우리끼리 뭉쳐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거고, 필요에 따라서 지시 내리는 분 뜻에 따르면 되니까.”
“결국 똑같잖아요.”
그녀도 말을 부정적이었지만 흥미를 느낀 채 물끄러미 최영민 팀장을 쳐다보았는데, 그녀가 알기로 남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서로 뜻이 맞아서 같이 함께하는 동맹이라는 것이 좋겠어.”
“누군데요?”
“조민호라고......”
그녀가 모를 수가 없었다.
“네? 서, 설마 한국대 야구팀 지압사 그 조민호 말입니까?”
최영민 팀장은 이미 그녀를 지켜본 터라 피식 웃었다.
“역시 아네. 맞아. 합류하면 자연히 만날 거야. 장혁 같은 다른 녀석들도 같이 말이야.”
“장혁이라, 흠, 이 일을 만약 오성 김 회장님이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이거 왜 이래. 나도 배후가 있어.”
“누군데요?”
“로버트 힐 미국 대사도 있고, 염두에 둔 다른 사람도 있어.”
그녀도 로버트 힐 이름이 나오자 깜짝 놀랐다.
“설마 미국 정부 지시를 받아서 쿠데타라도 일으킬 생각입니까?”
“그럴 리가. 그냥 법의 선을 지키면서 내 꼴리는 대로 살 거야. 이왕이면 마음에 든 친구 일도 두루두루 도우면서.”
“한 번 생각해볼게요.”
하지만 이지현은 이미 오성 그룹 비서실에 있으면서 오성 그룹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낀 지 오래였고, 이미 동생 치료비에 대한 것은 충분히 갚아줬다고 판단하고 결국 이 제안을 받았다.
그리고 이지현 외에 과거 최영민 밑에 있다가 어쩔 수 없이 오성 그룹에 들어간 이들 대다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최영민 팀장은 그 누구보다 오성 그룹 조직 문화와 자기 부하 성격을 잘 알았기에 쉽게 융화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예상대로 순조롭군. 후계 문제는 특히 김건중 회장에게 아킬레스건이지.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노친네한테 좀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겠어.’
***
오성 그룹 비서실은 원래 외환위기 전에도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재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외환위기 후에 혼란한 정권 내부 다툼 속에서 대대적인 국정원 구조 조정을 틈타서 유능한 요원을 스카우트했다.
오성 그룹 비서실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실제로 방대한 자금을 수혈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요주의 직원 몇 사람이 사직서를 낸 것이다.
그들은 특히 후계 구도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작업을 했던 인물이라서 이 사실을 보고받은 김건중 회장은 처음으로 분노했다.
“당장 놈들을 잡아와!”
“......”
아마 평범한 비서실 직원이라면 굳이 이런 보고까지 올라가지 않는다. 이학준 비서실장이 알아서 다 처리한 후에 보고한다.
이학준 비서실장은 평소와는 달리 김건중 회장 눈치만 봤다.
그들을 잡기 위해서 비서실 전 직원을 동원해도 쉽지 않기 때문인데, 그걸 변명하면 김건중 회장이 더 분노할 것이 뻔했다.
김건중 회장도 겨우 이성을 차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게......최영민 전 국정원 팀장이 이 일의 배후입니다.”
“최영민 팀장이라면, 그 오성 X파일 가지고 장난친 놈이잖아?”
이번 일 때문에 뒤늦게 그도 최영민에 관한 추가 조사를 진행했는데, 흥미로운 결과가 드러났다. 최영민과 로버트 힐이 따로 만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자도 문제지만 그 배후에 로버트 힐 미국 대사가 있습니다.”
지금은 합류한 전 오성 비서실 직원도 더 큰 문제입니다만 말까지는 꿀꺽 삼켰다.
겨우 숨을 돌린 김건중 회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아니 거기에 로버트 힐이 왜 나와?!”
이학준 비서실장은 붉게 달아오른 김건중 회장은 너무 갑자기 분노해서인지 심호흡을 거듭해서 겨우 이성을 찾는 것을 눈치껏 살폈다.
“그건 지금 조사 중입니다만.......”
“설마 미국 정부가 최영민 팀장을 내세워서 우리를 공격한 거야? 미국 사업체에 대해 압박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게......지금 확인 중입니다만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김건중 회장 안색은 분노가 너무 넘쳐서 이제는 오히려 감정을 추슬렀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설마 검찰 놈들도 움직이는 거야?”
“......지금 확인 중입니다.”
“그놈의 확인, 확인, 도대체 언제 답이 나오는 거야. 자네 요즘 왜 이러는 거야?!”
이학준 비서실장은 차마 더 변명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그만둔 이지현을 비롯한 직원들은 일반 직원과는 많이 달랐다.
후계 승계 작업도 작업이지만 외부 비자금 관리를 비롯한 복잡한 일을 도맡았다. 그 정보가 만약 검찰에 일부라도 흘러간다면 오성 그룹도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후계 구도나 아니면 다른 비자금 문제는 절대로 아닙니다. 만약 그 일이 목적이었다면 이미 지난 검찰 조사에서 폭로했을 겁니다. 제가 최영민 팀장과는 따로 만나서 다시 협상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게!”
“네.”
그는 차마 이번 조사를 통해서 로버트 힐이 박상철 과장이란 친구를 찾는다는 말까지 않았고, 찜찜한 의혹 한 가지도 덮어버렸다.
‘이상하게 의문의 환자만 파면 이런 일이 자꾸 터진다 말이야.’
***
이학준 비서실장이 다급하게 최영민 팀장을 찾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번 일에 깊은 관심을 보인 최영준 차장에게 지금까지 진행 상황을 말했다.
그 침착한 최영준 차장도 기겁했다.
“마, 맙소사, 서, 설마 오성 비서실 직원을 빼돌린 겁니까?”
최영민 팀장은 귀를 후비면서 툴툴거렸다.
“늘 그렇게 방어적인 태도만 취하니, 일이 꼬이는 겁니다. 이럴 때는 공격 또 공격이 최선입니다. 손자병법에도 나옵니다.”
“하지만 그 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