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그 약속 믿겠습니다.”
“......”
-입만 열면 거짓말하는 간사한 쓰레기!
정성근 이사장은 혀끝까지 올라온 ‘이 새끼가 돌았나.’란 말을 삼킨 채 옆에서 마이크를 들이미는 기사를 향해서 접대용 미소를 지었다.
그는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이를 악문 채 참았고, 유연진이 악착같이 투덜되는 소리를 무시한 채 기자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외부적으로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는데, 일단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도 유연진에 대해서 입질을 보냈다.
다만 아직은 유연진이 자기 능력을 보인 검증 기간이 너무 짧아서 역시 부상에 대한 우려가 사라지지 않았다.
계약 조건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런 차에 보다 적극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한국 프로 스카우트들이었다.
유연진은 뜻밖에 자기 연고지 구단이었지만 그 자신을 버린 SL 와이번스 스카우트를 만나자마자 괴랄한 미소를 짓은 채 이를 드러냈다.
“이렇게 절 찾아오다니, 정말 안면이 두껍습니다. 아직도 전 그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마 버린 고양이 취급했었지요?”
처음에는 그들도 유연진에게 잘해주었다. 유연진이 부상 후에 재활에 들어가자 슬그머니 남발했던 모든 조건을 철회하면서 대놓고 노예 계약을 요구했다.
“유연진 선수, 그 때는 주전 포수 후계자가 필요했어. 팀 사정을 좀 이해해 주게.”
“저도 메이저리그 몇 곳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는데, 이해해주실 거죠?”
“하지만 아직 유연진 선수 부상이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니잖아. 차라리 국내 프로야구에서 경험 쌓으면 시간을 가지는 게 좋지 않을까?”
유연진은 가소로운 듯 웃었다.
“지랄도 상큼하게 하십니다.”
“그 때 일은 다시 사과하겠네.”
“그 사과 별로 안 받고 싶습니다.”
결국 SL 와이번스 화살은 유연진은 잠깐 홀딩한 후에 조민호를 향했다.
“조민호씨도 같이 이야기 좀 하시죠. 지압 실력이 괜찮다는 이야기 대충 들었습니다. 저희 쪽에서 실력을 일단 확인한 후에 최고의 연봉으로 모실......”
조민호는 시합 중에 선수석에서 그냥 잠깐 구경만 했지만 차별받은 이들의 입소문을 통해서 지압 솜씨가 대단하다고 소문이 나버린 것 때문에 인상을 찡그렸다.
“......거절하죠.”
“끝까지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안 들어도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은 채 조민호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다.
조민호는 배꼽을 잡고 웃는 유연진을 패대기친 후에 문득 출처가 불확실한 치료비가 혹시 문제가 되지 않을까 염려되어서 인상을 찡그리면서 대응책을 떠올렸다.
그중에 하나는 마의의 영단 제조술이다.
치료 명목으로 영단을 치료비 1억에 포함해서 판다면 괜찮기는 하지만 영단 제조가 얼마나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는지 잘 알았다.
‘귀찮은데......’
***
조민호도 뒤늦게 언론 관심을 받으면서 이것저것 고민했는데, 이미 이런 일도 앞으로 문제 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한 터라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그 대안이 이것저것 불편한 것과 다 얽혀 있었다.
물론 프로 스카우트들은 그런 조민호 마음을 잘 몰랐고, 그들은 유연진만 죽으라고 쫓아다녔다.
다음 움직임은 역시 과거에 유연진 대신에 광주 사이드암 투수를 대안으로 선택하면서 은근히 조롱했던 롯대 자이언츠였다.
“유연진 선수, 지난 일은 이 자리에서 다시 정중하게 사과하겠습니다.”
과거 이들 경우는 유연진이 어떻게 해서라도 부탁했지만 오히려 ‘빨리 야구 때려치우고, 공부나 해서 다른 길을 가라!’ 욕했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미안하면 말하지 마세요. 그냥 그쪽 상판 보는 것만으로 짜증납니다. 그 때 자기 입맛에 안 맞아서 버렸으면 끝 아닙니까?”
“대신에 이번 계약금으로 3억을 조건으로 내걸겠습니다.”
유연진은 애초에 롯대 자이언츠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기에 막 불렀다.
“100억 주세요.”
“유연진 선수!”
“내가 지금 많이 참고 있는 거 안 보입니까? 세상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달면 삼키고, 쓰면 뱁고, 제가 무슨 씹다만 껌입니까?!”
결국 롯대 자이언츠 스카우츠 역시 유연진과 친하다는 소문이 자자한 조민호를 힐끗 쳐다보았다.
조민호는 이미 SL 와이언스 스카우트에 질린 터라 배트부터 휘둘렀다.
“이 배트에 한 번 맞아 보실래요?”
붕 소리가 나오는 배팅 스피드는 정말 무시무시했고, 롯대 자이언츠 스카우츠는 심각하게 갈등했지만 생명의 위기를 느끼자 조용히 사라졌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유연진은 계속 조민호 옆에서 얼쩡거린다는 점이다.
“......”
그도 힐끗 옆에서 유연진 인터뷰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기자나 스카우트들의 시선 때문에 입을 다물었지만 한 편으로 피식 웃다가 기자 한 사람의 질문에 당황한 정성근 이사장을 발견했다.
‘결국 문제가 생긴 건가?’
***
시간이 지나도 귀환 유연진 여파는 생각보다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중아일보 기사처럼 유연진이 메이저리그로 갈지, 아니면 국내 프로야구를 선택할지 아직 정해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유연진 옆에 있는 모든 사생활은 기자들의 욕망 대상이었다.
조민호 역시 같이 관심을 받은 것은 카더라 지압사보다는 유연진 절친으로 크게 알려졌기 때문이었는데, 그만큼 유연진 귀환의 여파가 생각보다는 더 커졌던 것이다.
실제로 한국대 역시 과거에는 상상도 못한 관심을 받았다.
정성근 이사장조차 처음에는 불안했고, 나중에 포기하고 이런 상황을 즐겼지만 역시 예상한 대로 횡령 의혹 관련 기사가 일부 나왔다.
-[단독] 한국대 정모 이사장 연구비 횡령 의혹?
그는 과거 자신이 저지른 불법 행위를 원점에서 다시 검토했고, 급한대로 자기 사재까지 활용해서 메꾸고는 있지만,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최영준 차장의 예측처럼 결국 원래는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말이 나올 만한 것 중에 만약을 위해서 준비한 큰 자산 역시 다 정리했다.
유연진은 거짓말쟁이 정성근 이사장 행적을 최영준 차장 도움을 얻어서 지켜본 터라 이 움직임을 바로 발견했다.
“효린 빌딩 매각했더라.”
“?”
“매각 대금만 무려 190억이래. 하아, 그 새끼, 정말 많이도 해 처먹었더라. 최영준 차장님이 외부에 폭로하지 말라고 해서 참고는 있어.”
조민호는 성가시게 하는 기자들의 기척을 느낀 터라 아예 대답조차 하지 않았지만 결국 오랜만에 집중한 수리물리 중에 라플라스 함수 응용에서 눈을 돌렸다.
“왜?”
“연구비 횡령과, 대학 내 건물 올리면서 챙긴 돈으로 샀는데, 그 건물 받아서 다시 채우는 중이래. 만약 그거 수사 들어가서 무영 그룹에서 나서면 법적인 문제가 복잡해진대. 최악은 정성근 이사장을 토사구팽 시켜서 감옥 보낸 버리면, 그 인간은 황제 노역 제도를 악용할 거고, 결국 190억은 그냥 허공으로 훅 사라져.”
옆에서 스포츠 잡지를 보면서 이야기를 듣던 박진민이 혀를 내둘렀다.
“아니 무슨 일이 그렇게 이상하게 풀리냐?”
“그러게.”
유연진은 공을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푸념을 털어놓았다.
“난 지금부터 야구나 열심히 하련다. 생각해보면 최영준 차장님 충고대로 우리 대학은 조용히 정상화 중이잖아. 그러면 된 것 아닐까? 그리고 나 제법 유명해져서 정성근 이사장도 쩔쩔매. 요즘 기자 인터뷰 때문에 기자들 데리고 대학 본관 잠깐 가서 봤는데, 완전히 시체더라.”
조민호도 피식 웃었다.
“너도 복수 진하게 한다.”
“난 복수 안 했다. 인터뷰만 했다. 기자들은 날 따라다닐 뿐이다.”
“하여간에.”
“이번 일로 최영준님 차장님 다시 봤다. 뭐랄까. 진짜 사람이 냉철한 것 같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사건을 풀어가는 것 보면 좀 무섭기도 해. 겉으로는 타협하니, 협상하니 그러지만 막상 알고 보면 상대를 끝까지 추적해.”
“그럴지도.”
그 역시 이번 일을 통해서 최영준 차장에 대한 다른 면을 봤는데, 색다른 그의 면모에 감탄한 것은 유연진과 다르지 않았다.
‘전생으로 치면 모사겠네. 그것도 꽤 유능한.’
***
효린 빌딩 매각은 그 시작이었고, 이것저것 차명으로 엮여 있는 부동산이 그다음 후속이었다. 심지어 돈 관련해서는 역시 펀드 투자도 빠지지 않았다.
빠른 정성근 이사장 조치도 있었지만, 최영준 차장이 최영민 팀장 도움을 받아서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적당히 다 막았다.
정성근 이사는 별탈 없이 횡령한 돈을 가까스로 다 막은 덕분에 일부 기사가 나왔지만, 그 기사는 흐지부지되었다.
정민현 역시 관심을 받기는 했지만, 유리 멘탈과 팔꿈치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면서 그나마 언론에서 조금 멀어졌다.
더욱이 그는 애초에 승리 투수 요건도 별로 갖추지 못한 것도 있었고, 최영준 차장이 혹시라도 무영 그룹이 끼어드는 것을 염려해서 중간에 적당히 연막을 쳐서 관심을 받지 않았다.
이보다는 역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대중이 관심을 둔 것은 귀환 유연진이었다.
그 바탕은 역시 최영민 차장이 쓴 기획 기사였다.
단순히 퍼펙트 시합을 기록해서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영웅적인 요소를 두루 다 갖추었다. 야구 인생 밑바닥까지 떨어진 유연진이 불사조처럼 다시 부활해서 날아올랐기 때문이었다.
꿈을 잃지 않은 채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던 한 고등학생 꿈이 극적으로 펼쳐졌다.
대중들은 이 드라마의 주인공에 열광하는 것은 당연했다.
조민호는 이미 박상철 과장의 흔적을 찾는 중이라서 괜찮은 검사 후보자를 물색하면서 최영준 차장에게 부탁해서 결국 중앙지검에 제보했다.
안 그래도 언론 통해서 계속 말이 나오는 상황에 제보마저 더해지자 폭탄이 터졌다.
“서울 중앙지검에서 나왔습니다. 여기 압수 수색 영장도 있으니, 모두 놀라지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물러서 주십시오. 거기 그분, 당장 컴퓨터에서 손 떼십시오. 괜히 공무방해죄로 엮이기 싫으면 말입니다.”
중앙 지검에서 압수 영장을 받은 수사관들이 대거 나타났는데, 이번 사건 담당 김정환 검사가 직접 이 자리에 나왔다.
최영준 차장에게 이미 연락을 받은 조민호, 유연진, 호기심 많은 박진민 세 사람은 대학 본관에서 진행되는 압수 수색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조민호는 힐끗 유연진을 쳐다보았다.
“설마 검찰에 신고한 거야?”
“전혀.”
박진민이 수상쩍은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에이, 우리끼리 뭘 숨기고 그래. 정황 증거만 봐도 답 나오잖아.”
“아니라니까.”
“급한 불을 다 끝났다고 판단해서 이제 정성근 이사를 토사구팽 시킬 생각이었냐?”
“정말 몰라.”
“기다렸다가 제대로 뒤통수 친 거네. 민현이가 알면 약속 안 지켰다고, 길길이 날뛰겠다.”
“아씨, 아니라니까!”
억울한 유연진이었다.
실제로 중앙지검에 몰래 신고한 것은 조민호만이 아니었다. 과거 연구비 횡령 덕분에 제대로 실적을 남기지 못하고, 압력을 받아서 그만둔 김대웅 교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