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전생자-13화 (13/176)

#013

“고생했네.”

“네? 아, 네.”

“이 연구는 오 박사에게 전권을 줄 테니, 이 실장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다 요청해서 진행하게.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의료원 내에 따로 인력도 편성하고, 정 필요하면 모든 오성 계열사도 다 포함해. 아니 필요하다면 국내던, 해외 인력이던 모두 불러와.”

“네? 네!”

오재호 박사는 그제야 안도한 채 조심스럽게 서재를 벗어났다.

김건중 회장은 다시 네 명의 환자 진료기록부를 꼼꼼하게 살피다가 결국 이학준 실장에게 입을 열었다.

“내게 이 진료표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전문가를 알아봐.”

“알겠습니다.”

그는 평소 시간이 나면 주로 기술 관련 서적을 독파하면서, 각종 전자 제품을 직접 분해서 연구하는 김건중 회장 습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번에는 의학인가.’

***

조민호는 애초에 VIP 고객 확장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들 사연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영준 차장은 그들에 대해서 꼼꼼하게 확인했다. 김지수 상황을 특히 조심했다.

자연스럽게 최영민 팀장의 상황을 파악하자 조민호를 찾았다.

“구치소에 있어서 도움이 안 된다는 말씀이군요.”

“일단 자유를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도 구치소에 들어간 사람을 당장 빼낼 방법은 없었다.

“지금 당장은 어렵지 않습니까?”

“그건 내가 한 번 확인해보겠네. 다만 혹시 자네 도움이 필요할지 몰라.”

“그건 당연히 도와야죠. 이왕이면 미국으로 간 박상철까지 추적해야 하니, 그런 점까지 감안해서 골라보세요.”

“알겠네.”

***

최영민은 어머니가 완전히 회복하자 압수 수색 따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검찰에 기꺼운 마음으로 협조했다.

다만 그도 설마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담당 수사 검사가 자신이 국정원 자료를 빼돌린 혐의에만 집중하자 당황했다.

더 황당한 것은 과거 국정원에 있을 때 그 자신이 했던 일을 담당 검사가 파고들면서 정작 과거 문제가 터져 나왔다.

정치 검사 김도영은 히죽 웃었다.

“그 아실만한 분이 계속 그렇게 묵비권 행사한다고 됩니까. 자 이거나 한번 읽어보고, 알아서 좀 대응합시다. 저도 나이 많은 분 데리고 협박하면서 욕설하기 싫습니다.”

“네놈 따위가 감히......”

그는 최영민 이마를 집게손가락으로 툭툭 밀면서 비하했다.

“당신은 지금도 권력을 쥔 국정원 요원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이제 당신은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야.”

“아직은 네놈 같은 검사 옷을 벗게 할 정도는 된다.”

“해봐, 어디 한 번 그 대단한 권력 구경 좀 하자.”

“이 새끼가.”

“그 나이 든 양반이 왜 그래.”

검사 김도영은 최영민 뺨을 톡톡 치면서 조롱하기 시작했다.

얍삽빠르게 생긴 모습이 도저히 검사인지, 아니면 시장 바닥의 양아치인지 분간이 가지 않은 자였다.

최영민은 솔직히 시간이 갈수록 분노보다는 오히려 정치 검사 김도영에게 감탄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자신이 대응해야 할지 고심했다.

그런 그도 혹시나 자기가 수사받는 것 때문에 어머니 건강이 재발할까 깊이 고심했다.

‘이건 아닌데......’

딱히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일에 대해서 높은 평가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역적으로 내몰려서 마녀사냥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구치소에 있던 자신을 찾아온 이는 뜻밖에도 오성 그룹 비서실 김현목 과장이란 자였다.

더 황당한 것은 자기 어머니 치료와 관련된 부분을 파고들었다.

그는 상대방이 단순 환자 조사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도저히 상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새끼들이 이렇게 나오겠다? 좋다. 어디 한 번 갈 때까지 가보자.’

그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적당한 선에서 조민호를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바꾸어서 더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마음먹었고, 최영준 차장에게 연락했다.

***

“제가 알기로 그쪽에서 저 같은 협력자를 원하는 것 맞습니까?”

“네.”

최영준 차장은 이미 그를 지켜보았기에 먼저 제안했다.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왕이면 미국 쪽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분이면 더 좋습니다.”

“미국이라......”

그도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를 이곳에서 풀어주고, 미국에도 어느 정도 입김을 넣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마침 한 분 있습니다.”

“어떤 분입니까?”

“으음,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최소한 한국 검경과 같은 조직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히든카드가 될 겁니다. 저 같은 경우에 불구속 수사로 돌려서 무혐의로 간단하게 돌릴 겁니다.”

최영준 차장은 이해관계보다 조민호를 둘러싸기 시작한 흥미로운 사건 흐름에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서 그분은?”

“과거 미국 NSC 아시아 담당 선임 보좌관을 했던 로버트 힐이란 분입니다.”

“흥미롭지만 전 선임 보좌관 아닙니까?”

“......주한 미국 대사 예정자입니다.

최영준 차장도 ‘미국 대사 예정자’란 말에 깜짝 놀라서 최영민 전 국정원 팀장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당시 제가 미림 팀장 이전에 국정원 내의 아시아 쪽을 담당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알고 지냈습니다.”

“미국 대사라면, 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최영준 차장도 처음부터 흥미를 느낀 일이지만 그게 갑자기 ‘미국 대사급’으로 올라가자 이 카드를 받아야 할지, 조민호가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골치 아팠다.

미국 대사의 영향력은 한국 장관조차 그 밑에 있는 참사관도 쉽게 만나지 못한다는 말로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하다.

그런 이를 아군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영민은 필사적으로 최영준 차장을 설득했다.

“아니 오히려 더 쉽습니다. 그 분이 지병 때문에 이번 주한 미군 대사를 끝으로 은퇴할 생각인데, 그분도 늘 저랑 만날 때면 그 지병이 신경 쓰인다고 했는데, 최근에 더 나빠졌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만약 그 질병이 치료된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집니다. 그게 한국이던, 미국이던 말이죠.”

“혹시 그 지병이?”

“아담스 스톡스 증후군이라는 만성 질환인데, 이게 심한 경우에 사망에 이릅니다.”

“제가 한 번 조민호 군에게 다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쾌재를 불렀지만 한 편으로 과연 저 질환을 치료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일단 승부수를 던졌으니, 기다려 봐야지.’

***

조민호도 처음에는 최영준 차장 제안에 깜짝 놀랐다.

“미국 대사라.”

그도 경험이 없어서 미국 대사가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지는 몰랐지만, 앞으로 계속 달라붙는 진드기 때문에 어느 정도 억제책이 필요했다.

그래도 대사급이라니.

지금까지 국내 이야기와는 좀 격이 다르다.

최영준 차장 역시 뒤늦게 미국 대사 힘을 고민하면서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 일을 가능하게 만든 조민호 역량을 다시 한번 평가했다.

‘이 친구는 시간이 갈수록 거물이 되어가는 것 같아.’

다만 그도 만약을 걱정했다.

“좀 우려가 돼. 만약 미국 대사가 딴생각을 품으면, 오히려 문제가 더 커지지 않을까.”

하지만 조민호는 생각을 달리했는데, 염두에 둔 자는 바로 미국으로 도망간 박상철이다. 당장은 그가 문제가 안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후환이 될 자다.

‘선천지기를 통한 인성을 우선 확인하고, 배신할 수 없는 달콤한 제안을 겸해야겠어. 신분도 감추고, 적당한 맛도 보여주고.’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 출처다. 너무 많은 돈을 받게 되면 어떤 형태로든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만약 세무 조사 대상이 되면 지금처럼 기반이 부실한 경우에 대처하기 쉽지 않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적당한 치료비가 좋았다.

“어차피 앞으로 제 손발이 되어줄 분이니, 이번에는 도와주겠습니다. 약속 잡아 주세요. 단 현금 1억은 예외 없습니다. 추가 조건으로 앞으로 알아서 뒤를 봐 달라 정도면 되겠습니다.”

“알겠네.”

***

로버트 힐은 코스보 특사와 같이 비주류 국가를 떠돌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고, 본국에 돌아가서 NSC에 입성한 후에 장밋빛 미래를 꿈꾸면서 미국 대사 예정자가 되자 드디어 자기 정치 꿈에 한결 가까이 다가간 것에 쾌재를 불렀다.

그는 미국 대사를 끝으로 은퇴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 보직 변경의 잠깐 사이에 나온 건강 검진 결과가 문제였다.

아담스 스톡스 증후군.

심장 블록 때문에 생기는 이 질병의 가장 큰 증상은 심정지와 빈맥이다. 현기증과 경련이 수시로 나타나서 최악의 상황에 사망할 수도 있다.

미국 NSC에 있을 때는 심하지 않았는데, 그 때 무리하게 일만한 것이 화근이 되어서 최근 와서는 상태가 갈수록 점점 나빠진 것이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인정받는 오성 의료원 이승구 박사를 찾았다.

이승구 박사는 평소와는 달리 최근 조민호 뇌사 연구와 관련된 협상이 난관에 부딪히자 반쯤 폐인이 되다시피 한 몰골로 힘없이 관료적인 어투를 사용했다.

“일단 약물요법과 미주신경 절단과 같은 외과적인 치료가 우선입니다만 서맥과 빈맥이 동시에 나타난 터라 페이스 메이커 이식이나 제세 동기 이식이 생각 하셔야 합니다.”

미국 워싱턴 병원 의사들이 한 말과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자신을 무시하나 싶어서 미국 대사 예정자라고 말을 할까 하다가 관뒀다.

“그렇게 복잡한 수술 말고 단순하게 치료할 방법은 없습니까?”

“세상에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만약 그 치료를 받게 되면 완치는 가능합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만.”

미국이나 한국 의사나 크게 다르지 않은 의견이었다.

로버트 힐은 깊은 실의에 빠진 채 오성 의료원을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최영민 전 국정원 팀장에게 마침 전화 연락을 받았다.

그 역시 최영민 팀장 수사를 관심 있게 지켜본 터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말씀은 정말 고맙습니다만 제가 과거에 스톡스 증후군이라는 것을 이미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그 때보다 병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저녁 무렵에 최영민 팀장 대리인으로 찾아온 최영준 차장은 심방세동을 오랫동안 앎고 있던 환자의 진료 차트를 보여주었다.

그 역시 심장질환으로 고통받으면서 비슷한 질병을 조사한 적이 있는 터라 이게 얼마나 황당한지 깨달았다.

“정말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서류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힐은 미 행정부 NSC에서 오랫동안 일해본 경력자였고, 그 자리에서 확답하지 않은 채 곧 헤어졌다.

그는 물론 개인적으로 아는 한국 CIA 요원을 이용해서 비밀리에 최영준 차장에 관한 조사를 진행했고, 중아일보 후계자라는 것과, 몇 가지 정보를 확인한 후에 이번에 다시 만났다.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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