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전생자-10화 (10/176)

#010

때마침 스위트 룸 중앙에 있던 여인이 그에게 천천히 다가왔는데, 어지간한 연예인 못지않을 정도로 얼굴선이 곱고, 날씬한 미인이었다.

“김지수입니다.”

“조민호입니다.”

김지수는 최영준과는 이미 안면이 있는지 친근하게 대했고, 최영준 역시 그런 김지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내 사촌이네.”

“네?”

조민호도 뒤늦게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굳이 가족 사항에 대한 것은 묻지 않았다.

최영준 차장은 그런 조민호 모습에 눈짓으로 고마움을 전했고, 김지수는 아예 지금 자신이 치료받으러 왔다는 것까지 깨닫지 못한 채 멍하니 호텔 창밖을 내다보기만 했다.

최영준 차장이 나서서 마사지 테이블 위에 눕는 것을 도와줬다.

조민호는 그런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이 낼 치료비를 요구했고, 이미 사전에 준비를 해뒀던 지 불과 5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익숙한 박주명 사장 문자를 확인한 후에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이미 심장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은 터라 가슴 정중앙에 몰려 있는 경혈을 확인하기 위해서 손짓으로 신호했다.

김지수는 잠깐 망설였지만, 곧 상의를 벗었는데,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린 채 고개를 돌렸다.

“어.”

“이런.”

최영준 차장은 다급하게 김지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다독거렸고, 조민호는 눈치껏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네.”

“혹시 실연입니까?”

“맞아.”

“허 참.”

조민호는 괜히 자신이 환자를 울리지 않았나 싶어서 혀를 내둘렀는데, 알고 보니 청춘남녀가 흔히 경험하는 실연의 아픔이었다.

“만나던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사촌 집안에서 결사반대해서 결국 헤어지......는 중이지.”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뭐 집안 차이네.”

“아하.”

“아직 완전히 단념하지 않아서 조금 걱정스러워. 아내 말로는 우울증까지 겹쳤다고 하는데,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네.”

최영준 차장이 고작 그런 단순한 이유로 조민호를 호출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사촌 집안 어른 중에 심장이 안 좋은 분이 있어. 일종의 유전성인데, 어제저녁에 갑자기 숨을 잘 쉬지 못했어. 그때 정말 아차 싶었어.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네에게 연락했어.”

“알겠습니다.”

그는 흥미로운 눈길로 눈물을 닦고 있는 김지수를 쳐다보았다.

입고 있는 옷부터 시작해서 특별히 집안에 아주 잘 산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고, 액세서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마 모르고 만났다면 그저 흔하디흔한 집안 자제로 보였을 것이다.

조민호는 대충 분위기 파악을 한 터라 가슴 주변 경혈을 살피면서 심장과 관련이 있는 비유, 신유, 폐유혈을 하나씩 확인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이 경혈이 건강한 성인과는 좀 다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조민호도 솔직히 심장 질환의 깊은 곳까지는 들여다보지 못했지만, 다행히 심방 수축이 소실되고, 심실이 불규칙하게 수축을 보이는 현상을 발견했다.

겉에서 봤을 때는 이 주변을 지나는 경혈은 마치 주화입마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현상은 한때 튀어 올랐다가 다시 정상인처럼 잠잠해졌는데, 심장 질환이 아니라, 심장이 좋지 않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처럼 보였다.

그는 이 질환을 정하는 용어가 뭔지는 몰랐지만, 치료 방법은 뜻밖에 간단하게 떠올렸다.

‘라게르 함수구나.’

정확히는 시간을 혼원기와 결합해서 그 주기를 따로 정하는데, 어긋난 심장 동기률을 강제로 맞추는 방식이었다.

‘심장 경혈 주변만 따로 하는 미세 환골탈태와 비슷하겠네.’

현대 의학 관점에서 본다면 도저히 이 방식을 적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조민호는 정상적인 동기률과 혼원기 타이밍을 하나씩 맞추어서 간단하게 이것을 교정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조민호는 심방수축 타이밍을 하나씩 확인하면서 혼원기를 일일이 다 실험한 후에 심유혈을 시작으로 지압을 시작했다.

“아.”

어제까지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곤란마저 가끔 느낀 김지수는 일순간에 그 증상이 사라지자 쾌감마저 느꼈다.

그녀는 뒤늦게 자신의 앓는 소리에 얼굴을 홍시처럼 붉혔다.

하지만 조민호 안색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역시 과거 무림에서 이와 비슷한 치료를 한 적이 있었지만 그 때보다 수십 배나 정교한 작업 때문에 치료 삼매경에 빠진 것이다.

김지수는 인상적인 시선으로 힐끗 조민호 안색을 살폈다.

조민호 이마에는 무리하게 강화 혼원기를 사용한 터라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거의 세 사람에 해당하는 선천지기를 사용해서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김지수는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늘 찔린 가시처럼 성가시게 굴든 증상이 서서히 사라지자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막혀 있는 심장 한구석이 뻥 뚫리는 쾌감에 진저리를 쳤다.

“아음.”

실연의 아픔조차 지금 일순간만큼은 생각나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최영준조차 무안한 지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김지수는 그런 모습에도 당황하지 않았는데, 심장박동 수가 조금씩 변화하다가 그 거북한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자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최근 실연 때문에 상실감과, 우울증에 괴로워했고, 특히 자기 집안 어른과 관련이 있는 X파일에 때문에 혼란스러워서 차라리 확 죽고 싶었다.

그녀는 이 치료 덕분에 우울증도 완전히 사라지자 마치 구미호에 홀린 사람처럼 스위트룸을 돌아보다가 조심스럽게 물러나면서 심호흡을 하는 조민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조민호 얼굴은 최근 점진적인 환골탈태를 경험하면서 급격한 변화를 보였는데, 미남까지는 아니어도 호남 정도로 변화했다.

하지만 그가 내보이는 정신 스탯 120만의 기세는 이 외모에 비할 바가 아니다.

특히 지금처럼 혼원기를 사용한 후에는 과거 무림 시절의 그 위압감이 은근히 남아 있었다.

‘멋지다.’

김지수는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버지 모습과 조민호를 비교하면서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는데, 특히 남자 친구의 그 무능한 모습에 치를 떨었다.

그녀가 아빠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편으로 그런 아빠와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남자를 본능적으로 그렸다.

그런데 딱 그런 남자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조민호는 그녀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할 일을 끝냈다는 말만 남기고는 조용히 스위트룸을 나가버렸다.

오히려 최영준 차장이 불과 30분 정도 지압 때문에 괜히 걱정되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김지수 옆으로 다가왔다.

“괜찮아? 치료가 좀 된 것 같아?”

“어,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김지수는 실연을 당한 여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쾌활하게 치료 테이블에 내려왔다.

“영준 오빠, 그 치료사는 누구예요?”

“왜 이제 관심이 가?”

그녀는 두 손으로 자기 가슴을 꼭 누른 채 소리쳤다.

“아니 정말 신기해서 그래요. 이렇게 가슴이 편한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일단 병원 가서 지금 예후가 어떤지 확인하자. 조민호 그 친구에 대한 것은 가면서 말해줄게.”

“네. 그리고 고마워요.”

“사촌에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그 멍청한 놈은 이제 잊어버려. 난 다른 것을 떠나서 남자 자식이 집 안에서 반대한다고 오락가락하는 그 무능함에 치가 떨리더라.”

“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한 채 헤어진 전 남자 친구 모습을 떠올렸지만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잘 기억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빈자리를 가득 채운 것은 조금 전에 스위트룸을 나선 조민호였다.

‘도대체 누굴까? 우리 아빠가 어떤 분인데, 비교 대상이 되다니.’

***

“정말 모르겠군.”

오재호 박사는 차트 결과를 보면서도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김지수의 눈빛에는 실연의 아픔보다는 오히려 호기심이 가득했고, 최영준 역시 영문을 모르기는 매 한 가지다.

그는 오성 그룹 주치의 이전에 명성이 자자한 명의로써 오성 가족 건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 선생님, 병이 더 나빠진 겁니까?”

“그 반대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도 잠깐 고민했지만 이미 정밀 검사는 3번을 통해서 확인했다.

“사실 지수양 심장이 좋지 않습니다. 심방세동이란 질환인데, 부정맥의 일종으로 심실이 불규칙한 수축을 보이는 질병입니다.”

“네?!”

최영준 차장조차 심장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설마 그게 질환이 있다는 것까지는 지금 안 터라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김지수는 이미 어림짐작한 터라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오재호 박사는 오히려 양손을 아래위로 흔들면서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심장에 이상이 없어도 생기는 형태고, 일과성으로 발작성 심방세동이라서 심각한 심장 질환이라하기 힘듭니다. 술 담배를 하지 않고, 꾸준한 운동만 한다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김지수는 뒤늦게야 다른 가족과는 달리 자신만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오재호 박사를 쳐다보았다.

“네. 회장님 지시도 있지만, 굳이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다만 최근 지수 아가씨 일이 좀 걱정스러웠습니다. 우울증이 심해진 것으로 들었습니다.”

김지수는 지난주까지 미국 뉴욕에 있었고, 제대로 된 검사도 받지 않은 채, 아예 은둔형 외톨이처럼 지냈다.

그녀는 심화가 더해갈수록 가슴이 답답하다는 것을 느꼈고, 오재호 선생이 계속해서 일단 뉴욕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전화를 한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다.

따지고 보면 한국에 온 것도 아버지 압박 때문이었고, 그 조건이 오재호 주치의를 통해서 정밀 검사를 받는 것이었다.

최영준 차장은 혹시나 해서 질문했다.

“평소 생활에서는 거의 증상이 없다는 말씀이군요. 다만 때에 따라서 심각하게 악화할 수도 있고요. 하면 지금은......”

“완치입니다.”

오재호 박사는 스트레스와 피로 때문에 거뭇한 눈 밑을 문지르면서 진료 차트에 눈에 돌린 채 영문을 알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이상하죠. 설사 심방세동의 전기생리학에 바탕을 둔 메이즈술식 수술이라고 해도 수축기능 회복은 안 되고, 약물 처방 경우에는 항응고제와 같이 사용해도 효과가 났다고 장담하기......”

사실 차라리 암이라면 그냥 수술해서 치료해버리면 간단한 일이지만 심방세동처럼 모호한 질환은 완치 자체가 쉽지 않다.

특히 다른 환자와는 달리 유전적인 소인이 일부 연관되어 있어서 지병처럼 꾸준하게 관리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문제가 터지기 시작한 것은 집안의 갈등과 남자친구의 우유부단한 행동이다. 아무리 그녀 집안에서 격렬히 반대한다고 해도 최소한 뭔가 노력을 할 수 있는데, 그는 그조차 하지 않았다. 남자 친구 집안이 소위 말하는 중견 기업이었으니, 아마 아버지의 다른 압박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김지수는 당시 콱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고, 심지어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이라서 자기 상태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오재호 박사는 뒤늦게 서로 쳐다보면서 손짓으로 대화하는 두 사람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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