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651화 (완결) (651/651)

제651화(완결)

오민철의 눈이 뱁새처럼 가늘어진다.

그건 뭔가를 살핀다는 뜻이다.

권총수는 컴퓨터 앞에 앉아 동아프리카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소말리아와 우간다의 지도에 붉은색이 칠해져 있었다.

블랙잭에서 소말리아에 200여명, 우간다에 100여명이 파견되어 있다.

어제밤 소말리아 반군과 총격전이 벌어졌고 사망자는 없지만 부상자 세 명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뭘 보는데?”

권총수가 버럭 소릴 질렀다.

소파에 앉아 권총수를 훔쳐보던 오민철이 화들짝 놀란다.

“왜 소릴 지르고 지랄이야. 놀랬잖아.”

“형은 일 안해. 왜 남의 사무실에서 죽치고 앉아 사람을 쳐다보냐고.”

“야 좀 보면 안되냐?”

“기분 나쁜 눈으로 보니까 그렇지. 빨리 나가.”

“나간다 자식아. 나가, 더러워서.”

자리에서 일어난 오민철이 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

권총수는 닫힌 문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다시 어제 격전이 벌어진 지역을 확대하여 살피기 시작했다.

대표실을 나온 오민철은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휴게실로 걸어갔다.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채명천과 홍보이사 정태경이 앉아 있었다.

“어떻습니까?”

정태경이 오민철이 앉자마자 물었다.

“상당히 날카롭게 살폈는데 별 진전은 없었던 걸로 보입니다.”

어제밤 설미주와 저녁을 같이했다.

이미 어군의 사장인 마낙춘과도 통화를 했는데 자신이 중간에서 분위기를 나쁘게 만들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있을 때는 둘 사이에 어떤 친밀한 행동은 없었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준 뒤 돌아갈 때 두 사람을 살폈지만 청혼을 했다던가 누군가 사랑을 고백했다는 증거로 보일만한

행동이나 태도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내야 한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밀어붙여야 하며 뭐든지 때라는 것이 있다.

둘 사이에 지금 가장 좋은 시기다.

“그냥 저녁 먹고 한 잔 한 것 말고는 어떤 진전도 없었다?”

채명천이 눈을 빛낸다.

“내가 말했잖아. 우리 권 대표가 다방면에 뛰어나고 남자다움을 보여주고 있지만 여자 앞에서는 젬병이라니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하잖아.”

“그래서 우리가 깎아 줘야 한다?”

“그렇다니까?”

정태경 이사를 보며 말했다.

“당장 실행에 옮겨야 돼.”

채명천이 비장하다.

“후우우!”

오민철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내 동생이지만 이해가 안 가. 어떻게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냐고, 우리 같으면 난 널 사랑해. 나와 결혼해 주면 널 위해 이 한목숨 바치겠어

하고 썰을 풀텐데.”

오민철이 답답하다는 목을 좌우로 돌렸다.

“시간 미룰 필요 없어.”

“당연히 없죠? 이런 건 후다닥 해치워야 한다니까요. 시간 끌어봤자 잡음만 생깁니다.”

오민철이 채명천을 향해 분명하게 말했다.

“지금 아니면 권대표 장가 못 간다는데 내 목숨을 건다.”

지이잉!

그때 전화 한 통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오민철이 전화를 받았다.

“어 처남!”

오민철의 처남중 한 명이 방송국 PD로 일한다.

오민철은 한참을 듣고 있었다.

“정말이지. 고마워, 나중 한 잔 사지.”

전화를 끊은 오민철이 눈을 빛낸다.

“작은 처남이 방송국 PD인데 설미주씨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PD에게 오늘 스케줄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오민철이 채명천과 정태경을 향해 속삭이듯 말하기 시작했다.

음력 보름을 맞아 민속학자 유산명 교수와 대담하는 생방이 있다.

생방이기 때문에 일찍 도착하여 여러번 리허설도 하고 질문과 대답에 대한 조율도 해야 한다.

스텝들이 탄 차량이 먼저 떠났고 설미주는 20여분 준비를 더 한 다음에 자신의 차량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중간에 접촉 사고가 나고 만 것이다.

그것도 하필 벤틀리를 박아 버린 것이다.

물론 차선을 바꾸다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잘못은 어렵다.

그런데 상대방 운전자는 설미주에게 백퍼센트 잘못을 씌우려고 했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보험사 직원 오면 자동적으로 잘잘못이 가려질 텐데.”

그러면서 명함을 꺼냈다.

“다친분 있으면 입원하세요. 나 바빠서 빨리 가봐야겠어요.”

설미주가 자신의 차로 돌아오려는데 벤틀리 앞뒤 문이 열리며 세 명의 사내가 내렸는데 하나 같이 떡대가 좋았다.

“당신들 뭐 하자는 거죠?”

“아니 씨발 그냥가면 되는 거야.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가면 되냐고? 우리가 거지야. 이따위 명함 한 장 던져주면 우리가 아이고 고맙습니다 할 줄 알았어.”

“내가 뭘 미안해야 하는데요. 서로 차선 바꾸려다 양쪽 모두 양보 않는 바람에 접촉한 것 아니에요. 내가 무슨 뒤에서 박기를 했어요 앞에서 가로막았어요. 별꼴이야. 비켜요 난

가봐야 해요.”

“씨발. 어이 아가씨.”

“지금 내게 욕한 건가요?”

“그래 욕했다. 뭐가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 이 차가 얼마짜린지 알아. 자그마치 5억짜리야. 5억!”

“그러니까 보험처리 해드린다고 했잖아요.”

딸칵!

두 사람의 다툼으로 1차선이 막혔고 3차선을 달리던 차량 한 대가 멈춘다.

권총수였다.

권총수가 나타나자 설미주 얼굴이 커졌다.

“총수야 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

권총수는 밴틀리 상태를 대충 훑어 보더니 말했다.

“차부터 빼시죠.”

사내들은 차를 3차선으로 뺐다.

권총수는 설미주가 바쁘다며 설명하자 가보라며 보냈다.

설미주가 떠나고 난 뒤 권총수는 벤틀리 운전사를 불렀다.

“보험처리 하겠소? 500만원 받고 그냥 가겠소?”

그때 오민철이 내려서 다가오자 사내들이 어색한 표정을 했다.

“받아가시죠.”

오민철이 목소리를 깔아 밀어내듯 말하자 사내들은 자신들끼리 눈빛을 맞추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계좌번호 주세요.”

한 사내가 재빨리 계좌번호를 쪽지에 적어 건네주었고 오민철이 핸드폰으로 송금을 했다.

“확인해보세요.”

“왔습니다.”

사내들이 차를 끌고 사라졌다.

권총수도 오민철이 운전하는 랜드로버를 타고 움직였다.

“묘하군. 어떻게 여기서, 그것도 미주가 접촉사고를 낼 때 만나지.”

“그게 인연이라는 거야 임마.”

오민철이 목소리를 높였다.

“인연?”

“누군가 그랬지. 인연은 하늘이 맺어주는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무슨 말을 하는거야?”

권총수가 돌아본다.

“생각해봐 임마, 깊은 밤길에 납치당한 미주씨를 목격한 것도, 오늘 접촉사고까지 이걸 우연이라고 보냐.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잖아. 특히 젊은 미혼 남녀라면.”

“남녀라면?”

“맺어져야 한다는 거지. 짜샤. 엉아 말을 이해를 못해.”

건총수는 아무런 대답 없이 담배를 물더니 유리를 내렸다.

‘흐흐흐! 조금 서툴긴 해도 일단 작전은 그런대로 이뤄졌다. 당연히 더 가까워지겠지’

이사들끼리 머리를 맞댄 계획 중 하나다.

고물 벤틀리와 사내들 모두 동원했고 일부로 접촉 사고를 일으켰다.

오민철은 볼일이 있다면서 권총수를 태우고 미행하듯 같은 도로를 달린 것인데 다행히 잘 맞아 떨어졌다.

한 번 더 인연을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에 오민철은 흐뭇한 표정을 했다.

‘엉아가 너 장가보내려고 이 고생을 한다’

지이잉!

그때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성공한 것입니까?’

정태경 이사가 보낸 문자다.

마침 신호가 바뀌어 차를 멈춘 오민철은 일단 성공한 것 같다는 대답을 보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설미주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설미주는 권총수 성격을 안다.

건달들을 동원해 작전을 세우고 그런 얍삽한 짓을 할 권총수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진심으로 놀라고 고마워했다.

설미주는 기어이 자신이 저녁을 사겠다고 했고 권총수는 알겠다면서 시간 약속을 했다.

라이트를 켠 벤츠가 멈췄다.

차에서 내린 권총수는 이마를 찌푸렸다.

거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에 들어와 불을 켜 놓고 있을 사람은 한 명뿐이다.

슥!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봤는데 10시가 조금 지났다.

밤이 늦은 시간인데 오민철이 집을 찾아온 것이다.

대문을 열고 마당을 가로질러 간 권총수가 현관문을 열었다.

오민철은 거실에서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권총수가 들어서자 빤히 바라보았다.

권총수는 곧장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마시는데 오민철이 묻는다.

“저녁 뭣 먹었냐?”

“스테이크.”

“카햐. 스테이크 좋지. 아름다운 요리야. 돈은 누가 냈어?”

“미주가 내던데.”

“야 임마. 내가 뭐라고 했어. 여자와 식사를 할 땐 반드시 계산은 남자의 몫이라고 했잖아.”

권총수는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너 그것 갖고 있잖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센추리온, 일명 블랙카드 말이야. 그걸 보란 듯이 꺼내 긁어야지.”

권총수는 피식 웃었다.

순간 오민철의 눈이 커졌다.

“너 지금 비웃었지?”

“또 시작한다. 왜 왔는데?”

“건방진 놈.”

오민철이 권총수를 노려보듯 하더니 표정을 고쳤다.

눈을 좁혀 뜨더니 숨을 고른다.

“저녁 즐거웠지? 고맙다고 안 해? 낮에 접촉 사건 너 아니었으면 그 자식들한테 봉변당했어.”

“고맙다고 하지.”

“그리고?”

“그래서 자신이 밥 산 거야. 신세 갚겠다고 자신이 낸다는데 어떻게 말리냐고.”

“그래도 말려야지 임마. 그냥 먼저 가서 내버려야지. 좋아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고 따뜻한 대화는 없었어?”

“따뜻한 대화?”

“유난히 따듯한 대화 있잖아. 가슴에 딱 와 닿는 그런 대화 말이야. 남녀 사이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하다보면 하고 싶은 말.”

“그게 뭔데?”

“그럼. 너 무슨 말 했는데?”

“한국이 월드컵 본선 진출한 얘기며.”

“에라이. 그렇게 할 얘기가 없어 여자들이 제일 싫어한다는 축구 얘기를 했냐. 나가 뒤져라.”

“형 답지 않게 오늘 왜 이래. 왜 내가 나가 뒤져야 되는데?”

“왜 뒤져야 하는지 아직 감이 안와.”

“뭔데?”

“그거 안 했어? 있잖아. 그거.”

“뭐어?”

벌떡!

오민철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역시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 하나를 꺼냈다.

딱!

하는 소리를 내며 마개를 따고 단숨에 500밀리짜리 생수를 비운다.

“돌아버리겠구만. 임마 사랑한다, 청혼 뭐 이런 것 안 했냐고?”

“청혼?”

권총수 눈이 커졌다.

“우리 결혼하자. 너와 난 운명이다. 우린 하느님께서 맺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어떻게 23년 만에 만날 수가 있단 말이냐. 인간이 시나리오 써서는 절대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 더욱 결정적인 건 시가 총액 천억 달러가 넘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결혼을 하면 블랙잭은 미주 네 것이 된다.”

“왜 미주 것이 돼? 내 건데.”

“됐고, 그래서 밥만 쳐먹고 왔단 얘기야?”

“응!”

“어휴, 나 같으면 지금쯤 호텔방에 자빠뜨렸다. 한심, 모지리. 나 간다 임마.”

답답하다는 듯 현관문을 열고 사라졌다.

잠시 앉아 있던 권총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나머지 물을 완전 비우고 빈 페트병을 투명한 분리수거 봉지에 넣고 마당으로 걸어나갔다.

딸칵!

담배를 피워 물고 밤하늘을 향해 연기를 내 뿜었다.

퇴근을 하여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린 설미주는 소스라쳤다.

갑자기 두 명의 남자가 불쑥 나타났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놀란 듯 안색이 굳었다가 이내 펴졌다.

“오이사님!”

나타난 사람은 오민철과 채명천 이사였다.

“많이 놀라셨죠? 그럴 겁니다. 으스름한 지하 주차장에 우리가 나타났으니 놀라는 것이 정상이죠.”

“무슨 일이죠?”

“아, 인사하시죠. 이쪽은 저희 회사에서 최고 연장자인 채명천 이사님이십니다.”

“얘기 들었어요. 안녕하세요.”

설미주가 환하게 웃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채명천 관리이사라고 합니다.”

채명천의 목소리는 점잖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죠? 날 기다리기 위해서는 아닐테고.”

“미주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

오민철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나가요. 아파트 앞에 내가 가끔 다니는 카페가 있는데.”

설미주는 두 사람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으로 올라갔다.

아파트 앞을 가로지르는 도로 맞은편으로 여울이라는 간판을 단 작은 카페가 있다.

카페는 그다지 크지 않았고 두 테이블에 걸쳐 다섯 명의 남녀가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할 얘기라는 게 뭔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사실은 그것이.”

오민철이 더듬거리더니 어금니를 문다.

“미주씨 결혼하시죠.”

“결혼?”

“우리 대표님 어떻습니까? 총수 말입니다. 그 자식과 결혼할 마음 없습니까?”

설미주는 깜짝 놀란다.

“성질이 조금 날카롭긴 하지만 참 괜찮은 녀석입니다. 집도 있고 미주씨는 그냥 몸만 가면 됩니다. 더욱 결정적인 건 그 자식이 돈이 많다는 거죠.”

툭!

채명천이 옆구리를 찌른다.

그런 말은 조금 저급해 보이니 삼가란 뜻이다.

“이사님, 인간은 솔직해져야 합니다. 총수가 돈 많은 건 사실 아닙니까? 자꾸 퍼줘서 그렇지 가난한 것보다는 부자가 좋죠.”

“그럼요. 부자가 훨씬 좋죠.”

설미주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한 눈치다.

즉 두 사람이 어떤 목적을 갖고 왔는지, 자신에게 할 말이라는 것이 뭔지 알아낸 것이다.

그동안 가슴 졸인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설미주 자신이었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권총수의 굵직하게 행동하는 멋에 자신도 모르게 녹아 버렸다.

흔히 말하는 요즘 남자들처럼 이벤트를 알고 여자의 비위를 맞출지 아는 순발력 따위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지니지 못한 것을 권총수는 갖고 있었다.

마음이 깊다.

깊다는 건 무겁다는 것이며 무거움은 가볍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 신뢰는 무거운 마음가짐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권총수가 바로 그러했다.

또한 신뢰는 정의를 바탕으로 한다.

정의롭다.

권총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린시절 보육원 친구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꿈꾸던 이상형의 남자였다.

처음 만난 날부터 가슴은 두근거렸고 지금까지 그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관심없는 척했지만 뒷조사에 바쁜 어머니 아버지가 건네주는 소식을 꼼꼼히 챙겨 들었다.

‘아직 미혼이라더라’

가장 감동있게 들려온 얘기였다.

전화로 청혼해도 망설이지 않고 받아 들이겠다고 마음 먹었다.

남들처럼 무슨 반지를 내밀고, 아니면 전광판 광고를 통한 그런 이벤트는 필요 없다.

지나가다 귀찮은 듯 우리 결혼하자고 해도 그보다 더 좋은 청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식사중 농담처럼 말해도 무조건 고개를 끄덕일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오민철과 채명천 이사가 온 것이다.

두 사람 얘길 들어보니 다른 건 몰라도 여자에 대해서 만큼은 권총수가 맹탕이라는 걸 알았다.

또한 지금까지 어떤 여자도 사귀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물론 권총수가 여자를 멀리 한 건 자신이 익히고 있는 대력금강심법 때문이기도 했지만 쭈욱 지켜본 결과 딱히 어떤 여자가 이상형이라는 따위의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오늘 두 분이 안 왔다면 나 미쳐 버렸을지도 몰라요.”

“네에?”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잠을 자기 위해 막 불을 끄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설미주다.

“어딘데? 뭐라고?”

권총수는 전화기를 든 채 마당으로 걸어나갔다.

설미주가 대문 밖에 서 있다.

“이 밤에 웬일이야?”

딸칵!

작은 문을 열어주자 설미주가 들어왔다.

술도 마시지 않았다.

그녀는 어두운 마당을 둘러보더니 마당 가운데 있는 바위를 향해 걸어갔다.

“무슨 바위야. 혹시 이거 사람이 앉았던 자국 아냐?”

설미주는 바닥을 만지며 묻는다.

“맞아. 내가 앉았던 자리야.”

“앉아봐도 돼?”

“물론!”

설미주는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움푹 패인 바위의 흔적을 따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거야. 손은?”

“단전에 가볍게 포개야지.”

“이렇게!”

설미주는 아랫배에 자신의 양손을 포갰다.

“잘했어.”

“눈은 감는 거야?”

“세상을 보면 안 돼. 잡념이 생기지”

설미주는 눈을 감았다.

“말은?”

“침묵해야 돼.”

“그럼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해야겠네. 운기조식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하니까?”

설미주는 길게 숨을 쉬었다.

“엄마가 너와 결혼하래. 너 안 데리고 올거면 집에 들어오지 말랬어.”

그리고 끝이다.

설미주는 입을 닫았다.

휘이이이!

차가운 겨울 바람이다.

더욱이 북한산 바람이 마당을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기 때문에 굉장히 춥다.

권총수 눈이 커졌다.

설미주의 옷차림에 신경을 못 썼는데 지금 보니 겨울 복장치고 너무 단촐했다.

팔랑거리는 검정색 바지에 윗도리는 역시 검정색 니트가 전부다.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외투는 보이지 않는다.

파라락!

긴 머리가 뜯겨 나갈 만큼 바람에 흩날린다.

엄청 춥다.

미리 귀띔을 받긴 했지만 진짜 춥다.

한 시간 전 오민철은 어금니를 물고 말했다.

“그게 뭐죠?”

“총수 집에 들어가면 마당에 운기조식을 하는 바위가 있습니다.”

“운기조식?”

오민철은 대충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니까 날 더러 그곳에 앉아 운기조식을 하란 말이죠?”

“말도 못하게 하고 눈을 뜨면 안 된다고 할 것입니다. 중요한 건 복장입니다.”

“복장!”

“이 옷 안됩니다. 혹시 몰라서 내가 준비했습니다.”

오민철이 비닐봉지에서 긴팔 니트를 꺼냈다.

언뜻 긴팔이기 때문에 겨울옷으로 보이지만 아주 얇았고 바늘 코가 느슨하여 피부가 들여다 보일 정도였다.

“바지 역시 그건 안 됩니다.”

그리고 검정색 일자 통바지를 꺼냈다.

아주 얇은 폴리에스터로 된 여름 바지였는데 통까지 넓어 바람이 시원하게 통할 것 같았다.

“당장 갈아입고 오세요.”

“네에?”

설미주는 당황했다.

“이 추위에, 더구나 총수씨가 사는 동네는 북한산 골짜기라면서요?”

“당연히 춥습니다. 하지만 그 자식을 질리게 만들기 위해서는 추워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세요. 엄마가 너와 결혼하지 않을 거면 집에 들어오지 말랬다고.”

“그건 무슨 의미죠?”

“바위에 앉아 얼어 죽겠다는 의지인 것이죠.”

설미주의 눈이 커졌다.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요?”

채명천의 걱정에 설미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자를 모르는 권총수라고 들었고 자신이 강한 신체의 소유자이다 보니 타인의 아픔에 둔감할 수도 있다.

자신은 추워 벌벌 떠는데 그는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상대의 고통을 모를 수도 있다.

“이순신 장군 잘 아시죠?”

“갑자기 이순신 장군은 왜?”

“그분께서 이런 말을 하셨죠.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것이오.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바로 그겁니다!”

설미주는 다시 한 번 오민철이 내놓은 옷을 들어 본다.

여름에도 추울 듯 싶다.

“이것 말고는 입지 말라는 건가요?”

그렇다면 상의는 브래지어 뿐이고 하의는 팬티다.

그 두 가지는 전혀 보온효과가 없다.

“인생사 투자 없이 무엇을 얻으려 하십니까?”

“알겠어요. 갈아입고 올게요.”

그리고 온 것이다.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설미주는 떨기 시작했다.

‘참아야 한다’

설미주는 오민철의 말을 되새겼다.

‘얼어 죽으면 어떡해요?’

‘그건 걱정 마시죠. 워낙 능력이 출중한 놈이니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말요?’

‘지금은 믿어야 할 때입니다’

이제는 춥다 못해 아프다.

살점을 칼로 베는 듯 했다.

“미주!”

권총수는 이름을 불러 놓고 멈칫했다.

운기조식중에는 말을 하면 안 된다.

권총수는 드러나게 떨고 있는 설미주를 날카로운 눈으로 살핀다.

그러더니 끝내 소리 죽여 웃고 말았다.

그제서야 이 모든 것이 오민철의 작품이라는 걸 간파했다.

오민철이 아니면 어떻게 설미주가 운기조식을 알고 결가부좌 하겠는가.

오민철의 성격을 안다.

청혼을 하지 않으면 죽어도 일어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설미주 성격 역시 만만찮다.

자기가 원하는 건 기어이 손에 넣어야 한다.

설미주 같은 여자를 누가 싫어하랴.

다만 도무지 여자와는 비위를 맞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친해져 본 경험도 없고 그다지 자상하지 못한 성품 탓인지 자꾸 피한다.

자신인들 왜 설미주를 보며 결혼이란 말을 마음에 품어보지 않았겠는가.

동정지체를 파괴해서라도 설미주를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각오까지 했다.

다른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그토록 쉽고 가볍게 뱉어낸다.

하지만 그 흔한 사랑이라는 말이 자신의 입에서는 천근의 바위덩이라도 되어 버린 듯 도무지 혓바닥이 꼼짝하지 않는다.

지이잉!

전화가 울린다.

“어휴 멍청한 새끼. 뭐 하는 거야. 빨리 안으로 데리고 가야지.”

여보세요 하기도 전에 오민철이 버럭 소릴 질렀다.

근처에는 없다.

하지만 어디서 지켜보고 있는 듯 말하는 걸 보면 오늘을 위해 엄청 치밀하게 준비한 모양이었다.

“이런 멍청한 놈을 내가 동생이라고 오냐 오냐 키웠다니.”

오민철이 전화기에서 뛰쳐 나올 것 같았다.

“너 오늘밤 미주씨한테 도장 못 찍으면 더 이상 나랑 얼굴 볼 생각 마. 차려준 밥상도 못 쳐 먹는 빙다리 핫바지 같은 놈이 무슨 사막의 흑새라고. 에라이...”

전화가 끊어졌다.

권총수는 잠시 벌벌 떨고 있는 설미주를 바라보더니 허리를 구부려 끌어안고서 현관을 향해 걸어들어갔다.

설미주의 몸에서 차가운 냉기가 느껴진다.

안방 침대에 눕힌 권총수는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행동으로 들어간다.

이불을 덮어 몸을 녹여준다고 해도 감기는 피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런 이상 없는 상태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추궁과혈이 필요했다.

상의 니트를 벗겼다.

예상대로 브래지어 뿐이다.

아래 바지 역시도 벗겼는데 브래지어와 같은 색상의 팬티가 나타났다.

“의식 있는 것 알아. 하지만 감기에 걸리지 않게 하려면 어쩔 수 없어.”

사실 설미주는 의식이 있었다.

30여분 추위에 떨었다고 기절을 할 리는 없다.

다만 저체온증으로 정신이 가물가물했는데 그 와중에도 권총수가 자신의 옷을 벗기는 것을 알고 있다.

긴장과 흥분이 교차했다.

반항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빈수레가 요란하다.

자신도 입만 가지고 떠들뿐 남자를 경험해 본 일도 없고 사귄 적도 없다.

권총수를 만난 이후 자신이 몸뚱이만 여자일 뿐 남자를 사랑하는 기술이 전혀 없다는 걸 느끼고 재빨리 서점으로 달려갔다.

사랑에 관한 여러권의 책을 구입해 읽었지만 도무지 이해도 안될 뿐 아니라 낯 뜨거운 내용 뿐이었다.

“아아!”

권총수의 따뜻한 손이 온몸을 자극하자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

열기는 야릇한 색깔로 변해갔다.

기분이 좋아지면서 온몸으로 짜릿한 흥분이 출렁거린다.

툭!

몸을 뒤척이는 순간 브래지어 끈이 풀어지면서 가슴이 튀어나왔다.

설미주는 양팔을 뻗어 권총수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건 욕구였다.

추궁과혈로 몸이 달아올랐고 좋아하는 남자의 손길이라는 현실에 주저 없는 행동이었다.

놀라운 건 권총수였다.

전혀 거절한다거나 떨쳐내려 하지 않고 그대로 파묻힌다.

설미주가 목을 끌어 당기며 권총수의 얼굴은 그녀의 가슴에 묻혔다.

상쾌해야 할 아침이 이렇게 불편할 수도 있는 건가.

도무지 뭘 해야 할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마주치지 않을까를 연구하느라 둘 모두 정신이 없었다.

급기야 도저히 안 되겠다고 마음먹은 듯 설미주는 갈아입을 옷을 들고 2층 샤워장으로 줄행랑을 치듯 올라가 버렸다.

딩동!

권총수가 거실 소파에 앉아 어제 신문을 미친 듯 뒤척이고 있을 때 벨이 울렸다.

인터폰으로 다가갔는데 오민철이다.

“뭘봐 짜샤. 빨리 문 열어.”

태어나서 오민철이 이토록 반갑긴 처음이다.

들어선 오민철은 손에 서류봉투 한 개를 쥐고 있었다.

스윽!

여기저기 기웃거리더니 물소리에 2층을 올려다 보았다.

“2층에 누구야?”

“누군 누구야. 알면서?”

“그럼 어제밤 고지를 정복 한거야? 흐흐흐! 이런 개자식.”

쪽!

권총수를 벼락같이 안고 볼에 입을 맞춘다.

“뭐하는 거야!”

“어린놈, 넌 아직도 많이 배워야 해.”

그때 2층에서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어, 미주씨?”

설미주가 깜짝 놀라며 얼굴이 빨개졌다.

“이사님!”

“긴말 필요 없고, 일단 복장 갖추고 이리 좀 오세요.”

“무슨 일인데?”

“일단 와보세요.”

“네네!”

설미주는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간단한 화장을 하고 나왔다.

“앉으세요.”

설미주가 자기쪽으로 앉으려들자 오민철이 눈을 부릅떴다.

“어딜 앉는 겁니까? 저 자식과 나란히 앉으세요.”

“네네!”

설미주는 조심스럽게 권총수 옆으로 앉았다.

오민철이 들고 들어온 봉투를 열고 서류 몇 장을 꺼냈다.

화악!

억!

둘 모두 놀란다.

오민철이 내놓은 건 혼인신고서였다.

“써!”

슥!

권총수 앞으로 서류를 내밀고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준다.

“빨리 써.”

“혀어엉!”

“안 써!”

“결혼식도 안 했는데.”

“나도 혼인신고부터 하고 식은 나중에 올렸어. 너 지금 안 쓰면 나 이 자리에서 죽어 버릴거야.”

“뭐하니? 이사님 죽어버린대잖아. 이리 줘 내가 쓸게.”

설미주가 서류를 가져다 쓰기 시작했다.

그때 벨이 울렸고 인터폰을 바라보았는데 이번에는 채명천 이사였다.

“채 이사가 웬일인지?”

“웬일은 짜샤. 혼인 증인 서는데 대가리 두 개가 필요하다고 해서 온거야 임마.”

“뭐어.”

“빨리 증인님 들어오도록 문 열어줘.”

툭!

대문을 열어주고 권총수는 현관 앞에 섰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오이사 왔죠?”

들어서는 채명천이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안에 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채이사님.”

“어떻게 잘됩니까?”

“조용히 하세요. 미주씨가 지금 서류 작성중이니 방해하면 안됩니다.”

설미주는 빠르게 써 내려갔다.

순식간이었다.

“총수씨 이름 한문을 몰라서 못 썼어요.”

“거느릴 총(總)에 장수 수(帥)죠. 이리 주세요. 내가 쓰죠.”

오민철은 자신이 한문으로 권총수 이름을 썼다.

‘권총수(權總帥)’

오민철은 서류를 꼼꼼하게 살피더니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권총수를 불렀다.

“들어와 임마.”

권총수가 담배를 끄고 들어오자 말했다.

“지금 몇 시야? 아직 구청 문 열려면 멀었군. 미주씨가 일단 아침을 좀 챙기세요. 우리 밥 안 먹고 왔습니다.”

“네 알겠어요.”

설미주는 재빨리 일어나 부엌으로 걸어갔다.

“며칠전에 우리 집사람이 추어탕 가져다주었는데 아마 남았을 것입니다. 물 좀 넣고 펄펄 끓여 가져 오시죠.”

“알겠어요. 이사님!”

설미주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아홉 시.

종로구청으로 벤츠 한 대가 들어섰다.

입구 차단기가 올라가고 벤츠는 천천히 주차장 빈 곳을 찾아 들어간다.

앞 뒤 네 곳의 문이 열리고 네 사람이 내렸다.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오민철과 채명천이 내렸고 권총수와 설미주는 뒷좌석에서 내렸다.

“가자!”

오민철이 앞장서고 두 사람이 말없이 따라 들어간다.

혼인신고는 2층이라는 화살표를 발견하고 일행은 계단을 올라갔다.

2층 문을 밀고 들어선 오민철은 천장에 혼인신고서라고 걸린 팻말을 보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혼인 신고 하러 왔습니다.”

오민철이 말했다.

여직원이 묻는다.

“신랑 되십니까?”

“아닙니다. 두 사람 앞으로.”

권총수와 설미주가 다가왔다.

흠칫!

창구 여직원이 설미주를 보며 놀란다.

“설...설미주씨.”

“안녕하세요.”

공인이어서 어쩔 수가 없다.

설미주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설미주라는 말에 모든 직원들이 고개를 돌렸다.

“이쪽이 신랑, 이쪽이 신부, 서류 검토하시고, 증인은 나와 여기.”

오민철이 채명천을 가리켰다.

권총수와 설미주는 여직원이 신분증을 달라는 요구에 꺼내 주었다.

한참을 살피던 여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증인란에 사인 하시죠.”

오민철과 채명천은 여직원이 보는 가운데 이름을 쓰고 사인을 했다.

“됐습니다.”

“끝난 겁니까?”

“네! 이제 두 분은 합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습니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경고하면 가족관계증명서에 오를 것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와아아아!”

갑자기 직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부럽다. 부럽다. 남편님이 부럽다.”

설미주의 미모를 두고 직원들이 합창하며 말했다.

권총수는 직원들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며 웃었다.

사무실을 나온 오민철이 편지 봉투를 건넸다.

“받아!”

“뭐야?”

“뭐긴 뭐야. 축의금이지. 나 바쁘니까 얼른 가봐야 돼. 이사님 가시죠.”

두 사람은 쫓기듯 구청을 나가 택시로 사라졌다.

스윽!

권총수는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꺼냈다.

편지 한 장이 나온다.

‘군대 제대하고 처음으로 편지라는 걸 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떨리냐. 총수야.

이제 나 죽어도 여한이 없다. 동생 장가 보냈으니 뭘 더 바라냐.

내가 결혼해 보니까 장난 아니더라. 여자들 연애시절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얼마나 무서운데,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돼.

사랑이란 실체가 없다는데 거짓말이다.

사랑한다 말하고, 한 번 웃어주고, 천천히 가라고 다독여주는 것이 왜 실체가 없는 일이냐고, 내 말이 틀리냐

사랑을 하면 기다림도 즐겁고, 배가 고파도 기쁘다고 했다.

서로가 불편한 것은 나누고, 좋은 것은 보태 주는 것이 사랑이란다.

내 아내의 말이다.

육신은 반백을 살면 머리가 하얗게 되지만 사랑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검고 푸르게 변한대.

생각하고 또 생각해라.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져라.

미주씨에게 무조건 미안하다고 말해라.

혼자 태어 났지만 둘이 살아야 할 것 아니냐.

잘살아라.

행복해라.

다시는 울지 마라.

두 번 다시는 세상에 던져지듯 버려져서는 안된다.

너와 외인부대에서 처음 만나던 날 얼마나 기쁘고 반가웠는지 아냐.

진짜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도 그만큼 황홀하지는 않았을 거야.

우리 성공한 거지.

씨발 돈 벌었으면 성공한 거지 안 그래.

아, 미안 미안, 좋은 자리에 씨발이라니, 그런데 욕을 하면 건강하고 장수한다는 말이 있다고 들었다.

우리 어머니가 그랬어.

결혼식장은 네가 나왔던 보육원 성당으로 정했다.

어제 신부님 만나 얘기까지 끝냈어.

아카시아 피는 5월에 올리기로 했다.’

뚝!

권총수 눈이 빛난다.

“아니 남의 결혼식 날짜를 자기가 잡아.”

“뭔데요?”

설미주가 건네준 편지를 읽더니 고개를 들고 깔깔 거렸다.

“하하하!”

“누구 맘대로, 성당은 죽어도 안돼.”

검정색 제의를 입고 자신을 혼내던 신부님들의 얼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부는 하지만 성당을 다니지 않는 것이다.

“왜 안돼. 난 좋은데.”

권총수는 멈칫하며 설미주를 바라보았다.

난 좋은데...

고백이다.

그건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성당에서 결혼하자는 청혼이기도 한 것이다.

혼인신고를 하고 난 뒤에 청혼을 받는 사상 초유의 부부가 탄생하고야 만 것이다.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줘.”

설미주가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았다.

“회사까지만 좀 태워다 줘.”

택시비가 아까워서가 아니다.

남자친구가 태워주는 차에서 내리고 싶은 것이다.

권총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설미주를 태운 벤츠는 구청을 떠났고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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