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649화 (649/651)

제649화: 그렇게 사는 것(2)

국정원장 황치수는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권총수가 들어서자 손을 내민다.

“결례를 알면서 전화 드렸습니다.”

황치수가 달라졌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야말로 고압적이었고 대한민국 최고 권부중 하나인 국정원 수장답게 냉기가 풍겨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틀리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갑작스럽게 만나자는 억지에 가까운 부탁을 했는데 허락해 준 것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감추지 않는다.

밖으로 나간 정현웅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와 두 사람의 앞에 놓았다.

“정국장은?”

황치수가 묻자 정현웅은 빙긋 웃었다.

“아침에 이미 두 잔을 마셨습니다.”

권총수는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자신도 회사에서 마셨지만 말없이 받아 들였다.

지금은 커피 한 잔을 더 마시고 덜 마시고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대표님!”

황치수가 눈을 빛냈다.

“요즘 가장 핫한 뉴스가 뭔지 아십니까? 물론 정치적으로 말입니다.”

권총수는 알지 못한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제 국회에서도 여야 모두 북한의 계속된 미사일 도발에 대한 규탄 성명이 있었죠. 그러면서 더 이상 우리도 미사일에 대한 사거리 제약을 둬서는 안 된다고 3당대표 이름으로

성명까지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보니 요즘 이삼 일 걸러 한 번씩 북한이 동해상으로 미사일을 발사하며 동북아 분위기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미사일 사거리는 우리의 결정 사항이 아니라고 들은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미국이 간섭하고 지정하죠.”

“미국과 혈맹인 나라 모두 그럽니까?”

“우리만 그렇습니다.”

피식!

권총수가 실소를 지었다.

“몇 차례에 걸쳐 미국 정부에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도 3,000km 정도 날아가는 걸 개발해야 한다고 했는데 미국의 반대가 워낙 심하더군요.”

“국가 안보에 대한 문제인데 국회 국방위원들이나 외교 분야에 있는 의원들이 미국을 한번 가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대표님, 한국 정치의 가장 문제점이 뭔지 아십니까?”

황치수가 정색했다.

“방안퉁수라는 말 들어보셨죠?”

권총수가 고개를 들었다.

“집안에서만 큰소리치는 못난 사람을 뜻하는 속담입니다. 여의도 국회의원중에 미국이나 중국 정부의 대(對)한 정책을 변형시키거나 부드럽게 전환 시킬 만한 인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느 국회의원은 5선을 했는데도 미국조야에 아는 정치인, 외교전략가 한 명 없더군요.”

외교는 비즈니스다.

나를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는 겸허함에서 외교는 시작된다.

집권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치인이라면 우리나라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강대국의 문턱을 닳듯 드나들어야 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면 여의도에서 삿대질하며 싸우며 시간 보낼 것이 아니라 틈 날 때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미국이나 중국 일본의 외교관계자들을 만나 치열한

소통을 해야하는 것이다.

“김대군 대통령을 제외하고 일본이나 미국에 외교적 영향력이나 한국쪽 우군의 정치인을 둔 대통령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현재 우리의 외교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점수로 말한다면 낙제에 가깝죠. 이번일도 우리끼리 소리지르다 조용해 질 겁니다. 미국은 눈 하나 깜빡 안하죠. 사실 미사일 사거리를 늘리면 북한보다는 중국이 두려운 거죠. 일본

역시도 편할리 없고.”

권총수는 커피 잔을 들어올렸다.

“미사일 사거리를 늘리는 일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청와대는 물론 여의도에 있는 300명의 국회의원은 나라를 구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허수아비들이죠.”

“군부쪽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난리죠. 그곳은 완전 전쟁 직전입니다. 아무리 못해도 2,000킬로는 되어야 중국과 일본이 우릴 향해 좀 더 신중해 진다는 것입니다.”

권총수는 상체를 쇼파 뒤로 붙였다.

이어 다시 상체를 펴듯 곧게 세워 맞은편에 앉아 있는 황치수를 바라보았다.

“대통령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 자리는 함부로 마음을 드러내는 곳이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굳이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아도 밑에 사람이 알아서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처럼 강대국에 포위된 나라는 없다.

그것도 정도껏 강대국이 아니라 중국 러시아 일본이라는 초일류 국가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지정학적으로 이렇듯 코너에 몰려 있는 나라의 대통령이 갖춰야 할 가장 최우선 능력은 외교다.

외교력이야 말로 곧 그 국가의 힘이다.

“전문가 집단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어디에서나 찬반의 목소리는 있죠. 중국이나 일본을 자극할 필요 있느냐면서 자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우리의 기술력을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는데

입을 모으죠.”

“내가 이런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보십니까?”

흠칫!

예상못한 질문인 듯 두 사람이 놀란다.

“국가가 나서도 미국을 설득하지 못했는데 나 같은 개인이 무슨 힘이 있을까요? 물론 백악관과 미 의회에 아는 사람이 적지 않긴 하지만.”

“죄송합니다만 CIA국장에 대한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신임 국장에 중동전문가 맥보란 중동지휘 센터장이 유력하다는군요.”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금시초문이다.

똑똑!

그때였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노크소리와 함께 한 명의 사내가 들어오더니 말했다.

“원장님 워싱턴입니다.”

황치수가 일어나 자신의 책상에 놓인 수화기를 들었다.

유선전화이지만 도청이 불가능하다.

“무슨 일인가? 그게 정말인가? 알겠네. 고맙군.”

전화기를 내린 황치수가 말했다.

“지금 막 백악관 발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주일 내로 인사청문회를 거쳐 맥보란씨를 CIA국장에 임명하려는 모양입니다.”

권총수는 눈을 좁혔다.

맥보란이 세운 공로가 크다는 건 CIA내부는 물론 백악관, 국방부 모두 알고 있다.

다만 맥보란 보다 더 높은 위치, 즉 국장에 이어 넘버2의 무게를 지닌 사람이 5,6명 된다.

그런 5,6명을 제치고 맥보란을 앉히려 하는 건 무슨 의도일까.

권총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한눈에 백악관에서 현재의 CIA를 무척 부담스러워 한다는 뜻이다.

자신들쪽 인물로 CIA국장을 임명했지만 몸통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같이 목을 치려는 의도다.

자신들쪽 인물인 국장도 치면서 같이 그 밑에 있는 인물들을 모조리 쳐내는 것이다.

맥보란은 공사가 엄격한 성품이다.

더욱이 의자에만 앉아 승진하지 않고 신입때부터 위험한 현장을 누빈 철저한 현장 중심주의자다.

그런 인물이 의자에 앉아 진급만 했던 그들을 절대 가만 둘리 없다.

한바탕 인사 피바람이 불건 자명했다.

국정원에서 돌아와 맥보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 정도 가더니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캡틴!”

“어딥니까?”

“아시면서? 워싱턴이죠.”

권총수는 빙긋 웃었다.

“그 말이 사실인 것 같군요?”

“KCIA(국정원)에서 가르쳐 준 모양이죠? 맞습니다. 지금 청문회 준비 하느라 무척 바쁩니다. 앞으로 열흘 정도는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용무가 있어 자신을 만나러 미국에 오려거든 열흘 이후로 날짜를 잡으라는 뜻이다.

“축하드립니다. 맥보란 국장님!”

“캡틴 지금 날 놀리는 것입니까? 날 반대하는 의원들의 송곳 질문을 어떻게 받아 넘겨야 할지 골이 지끈 거리는데 너무 하십니다.”

“놀리다뇨.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청문회 준비 잘 하십시오. 임명 뒤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권총수는 전화를 내렸다.

얼굴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는데 아는 사람이 승진한다는 것은 기쁜일이다.

더욱이 자신의 용병생활에서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맥보란이다.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맥보란 역시도 권총수로 인해 CIA내에서 벌어진 여러 권력 다툼에서 이길 수 있었다.

“맥이 랭글리 오야붕 된다고?”

오민철이 뛰어 들어왔다.

“어디서 들었어?”

“이거 왜 이래 나도 나름 선이 있다고, 그런데 정말이야?”

권총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문회 준비 중이래.”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거야? 랭글리 총수야 말로 백악관의 확실한 오른팔인데, 일거리는 분명히 더 늘어 날 것이고.”

맥보란이 CIA국장이 되면서 미군을 대신해 용병들을 움직이는 미국의 대외정책이 더욱 강화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 선봉에 블랙잭이 있다.

권총수는 대답 하지 않았다.

그러나 블랙잭쪽으로 행운이 몰려오고 있음은 분명했다.

내일쯤이면 나스닥에 상장된 블랙잭 주가가 또다시 뛸 것이 뻔했다.

“형 주식 안 팔거야?”

오민철이 갖고 있는 블랙잭 주식은 10퍼센트가 약간 넘는다.

돈으로 환산하면 어마어마한 액수다.

“내가 왜 팔아. 네가 오너로 있는 한 절대 떨어질 이유가 없는데. 흐흐흐.”

갈수록 오른다.

예상치 못한 불상사가 일어나면 그때 사막의 흑새가 되어 권총수가 직접 현장을 뛰면 추락하는 주가를 정지 시키고 다시 반등한다.

회사 오너가 신비막측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절대 망할 일도, 주식이 떨어져 깡통 찰 일도 없는 것이다.

권총수는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군은 불야성이다.

오오마 항에서 잡힌 고가의 참치들이 들어오고 있으며 그걸 맛보려는 미식가들이 줄을 선다.

모범택시 한 대가 멈춰 서더니 뒷문이 열리며 설미주가 내렸다.

스키니 청바지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를 걸쳤다.

긴 머리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고 그때 누군가 다가와 허리를 구부렸다.

“오셨군요?”

설미주는 고개를 들었다.

어군 사장 마낙춘이었다.

“사...사장님 아니세요?”

단둘이 차 한잔, 술 한잔 마셔본 적도 없다.

다만 가끔씩 들리다 보니 알려진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고 직원들이 아는 체는 했다.

하지만 마낙춘과 직접 대면은 오늘이 처음이다.

“이쪽으로 오시죠.”

마낙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설미주는 이해를 못하는 얼굴로 바라본다.

어군은 단순한 식당이 아니다.

정, 재계는 물론 우리 사회전반에 걸친 고위 공직자와 스포츠, 연예계 스타들까지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는 클럽 같은 곳이다.

특히 이곳 사장의 입이 무겁다는 소문이 돌면서 카메라 노출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

언젠가 모 기업 총수가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다.

분식회계로 인한 사건이 터지자 국회의원 몇 명에게 로비를 한 것이다.

그 사건의 증인으로 어군의 사장을 부른 것이다.

하지만 마낙춘은 일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묵비권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를 보여주었다.

나중 수사가 끝나고 검찰에서 흘러나온 얘기를 종합하면 그토록 입을 굳게 다문 사람은 처음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후 어군은 더욱 저명인사들의 은밀한 협잡과 로비가 벌어지는 최적의 장소로 굳어졌다.

조용한 별채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는데 자신도 이곳에 이런 건물이 있는지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산사의 저녁인양 희미한 석등이 불을 밝히고 있고 단청만 입히지 않았을 뿐 아름다운 한옥의 선을 그대로 드러낸 조그만 전각이다.

댓돌 위에 어둠속에서도 광이 나는 검정색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는데 올라선 설미주의 눈이 커진다.

‘트라메짜 (Tramezza)’

페라가모에서 출시되는 남자 구두 네 가지중 최고의 프리미엄 라인이다.

똑똑!

노크를 하자 안에서 문이 열렸다.

권총수다.

“왔네. 들어와!”

설미주가 고개를 돌렸는데 마석춘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설미주가 안으로 들어서자 권총수는 문을 닫았다.

평범한 방이다.

말 그대로 전통적인 한국식 온돌방인 것이다.

바닥은 한지를 여러겹 포개 깔고 옷칠을 한듯 자색이 감돌았고 벽 역시도 한지로 도배를 했다.

왼쪽으로 난 쪽문은 여닫이 문고리가 위로 붙어 있다.

아랫목으로 여덟 폭 병풍이 펼쳐져 있었고 오른쪽 벽으로 작은 액자 하나가 걸려 있는데 설미주가 놀란다.

‘竹爐之室(죽노지실: 대나무 화로가 있는 방)’

추사 김정희가 남긴 명작중 하나인데 과거 진품 정품이라는 프로를 잠깐 맡은 적이 있어 안목이 있다.

가짜가 아니다.

“사장님이 가끔 손님 접대를 하는 방인데 오늘 마땅한 자리가 없다고 선뜻 내주더군.”

두 사람은 끝을 높인 검정색 자개상을 놓고 마주 앉았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

그렇게 입단속을 했지만 KBC 방송국 모 여자 아나운서가 술을 마시던중 옆 좌석 손님들과 시비가 붙어 다쳤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인터넷에는 설미주라는 이름까지 떠돌고 있었다.

119는 아니고 필시 병원 직원들이 소문의 발설지임이 분명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번에는 웬 남자와 어군에서 목격되었다는 말을 듣기 싫어 권총수가 마낙춘에게 부탁하여 이곳으로 정한 것이다.

저녁식사 자리지만 둘은 물 한 잔 놓고서 이미 많은 얘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설미주는 궁금한 것들이 무척 많은 듯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냈다.

자신이 떠난 이후의 보육원 모습,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권총수가 독자적 사회 첫 발을 어디로 내 딛었는지, 지금도 보육원 출신 아이들과 서로 연락은 하는지 묻는다.

“너 같으면 나라는 놈에게 연락하겠냐? 보고 싶겠어?”

보육원 출신들과는 전혀 연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워낙 폭군처럼 굴어 어른이 된 지금도 권총수를 두려워 하는 이들이 많았다.

“혹시 걔 소식 알아?”

“누구?”

“걔 있잖아. 너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기어이 대들었던 아이 말이야. 별명이 코보였던가.”

코를 자주 흘려 코보라고 불렀는데 바로 유병칠이었다.

권총수는 빙긋 웃으며 유병칠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에게 신세를 졌고 그가 결혼도 했으며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해주었다.

하지만 언젠가 휴가 때 들어와 그에게 거액의 돈을 건네주었다는 말은 뺐다.

“그리고.”

잠시 주저하는 듯 하던 설미주가 오늘날 블랙잭 회사의 대표가 된 사연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권총수는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그 얘기는 오늘 다 못해.”

“조금이라도.”

그때 노크소리가 들리고 요리사들이 음식을 갖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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