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648화 (648/651)

제648화: 그렇게 사는 것(1)

이란의 파상공세에 한국은 걷어내기 바쁘다.

권총수는 축구에 빠졌다.

축구 때문에 누군가 입을 열지 않아도 병실 공기는 처음보다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또 다시 두 사람은 각자 따로 놀아야 했다.

권총수는 축구를 보고 설미주는 핸드폰 게임에 빠졌다.

하지만 먼저 싫증을 낸 사람은 설미주였다.

게임에 일가견이 있다.

특히 텐바이텐은 이만 점이 넘는다.

그런데 오늘따라 제대로 점수가 오르지 않는다.

집중을 못한다는 의미였다.

그때 권총수가 탄성을 질렀고 재빨리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국이 역습에 성공하며 한 골을 넣은 것이다.

그것도 추가시간이 거의 끝났을 쯤에 넣어 완전히 선수들은 축제분위기였다.

좋아하는 권총수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빙긋 웃는다.

잠시 후 경기가 끝났고 권총수는 환한 얼굴로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다.

한참 동안 채널을 돌리던 권총수가 멈췄다.

화악!

설미주 눈이 커졌다.

CNN뉴스가 나오고 있었는데 권총수가 화면을 고정했다.

또다시 전운이 감도는 중동이라는 화면 기사와 함께 사우디 특파원이 아프카니스탄을 중심으로 반미 운동이 확산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은 아프카니스탄 정부가 의도적으로 반미 운동을 자극하고 부채질한다면서 모든 사건 사고를 깊숙이 들여다 보고 있다는 경고를 보냈다는 것이다.

“바...바오로.”

환자복 차림의 설미주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눈치 빠른 권총수가 먼저 입을 연다.

“알아 듣냐?”

권총수는 리모컨을 놓으며 말했다.

“대충!”

대충 아니다.

완벽하게 알아듣는다.

영어와 불어, 아랍어는 거의 현지인들 수준이다.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는지 궁금한 모양이지?”

“아니...!”

아니라고 하면서 내심 소스라쳤다.

자신의 속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본다.

육식귀원의 경지는 상대의 마음까지 읽는다.

고수일수록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경지가 높고 깊다.

그런면에서 일반인들의 속마음은 거울 들여다보듯 할 수 있는 것이다.

눈빛만 봐도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간파한다.

“고등학교 졸업하는데도 무척 힘들었지.”

그렇게 공부를 싫어한 내가 무슨 대학을 갔겠느냐는 뜻인데 CNN의 뉴스를 보는 내가 이상하게 보일 것이라는 뜻이다.

“외인부대를 들어갔어. 그렇게 불어 대충 때웠고, 전역후 용병으로 활동하면서 영어와 아랍어는 귀동냥 한 것이고.”

불어는 물론 영어와 아랍어는 결코 귀동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사람도 계속된 공부를 하지 않고서는 절대 CNN앵커가 빠르게 뱉어내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미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한 자신도 영어 때문에 적지 않은 고생을 했다.

“바오로.”

“총수라고 불러.”

권총수가 이마를 찡그렸다.

평소에는 총수라고 부른다.

그러나 혼을 낼 때면 원장수녀를 포함해 선생님들은 세례명을 불렀다.

그래서 이름을 부르느냐 세례명을 부르느냐에 따라 자신에게 닥쳐올 일을 알아차렸다.

어린시절의 추억이 트라우마는 아니지만 설미주의 계속 된 바오로란 호칭이 거슬린 것이다.

털썩!

설미주가 상당히 익숙해진 듯 맞은편에 주저앉으며 웃었다.

“알았어. 그 기분 이해해, 맞아. 너 혼 낼 때는 모두가 세례명을 불렀지. 그럼 넌 입이 댓발은 나온 채 걸어갔고.”

권총수는 가볍게 웃었다.

지금은 그리울 수도 있는 그 시절이지만 당시는 정말 싫었다.

권총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었다. 내일보자.”

“벌써 가려고?”

“11시야. 다른 사람은 이 시간이면 얼씬도 할 수 없어. 너만 칠성그룹과 관계된 환자라는 걸 인정하여 배려하는 거지.”

칠성그룹 얘기가 나오자 설미주의 표정이 굳었다.

“쉽지 않는 일이겠지만 이제 그만 기억속에서 지워. 빨리 털어 낼수록 좋아. 잘 자라.”

권총수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설미주는 한참 동안 닫힌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떠나면서 마음 한구석이 이렇게 휑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고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이었기에 그저 한숨만 쉴 뿐이었다.

모든 건 끝나 있었다.

원무과장 우원성이 병실로 찾아와 칠성그룹에서 깔끔하게 마무리를 하였기 때문에 그냥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홀가분하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분노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어머니 정민희는 병실 구석구석에 혹시라도 떨어뜨리고 가는 물건이 있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설미주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의 붓기는 완전히 사라졌고 찰과상도 다행히 흉터를 남기지 않았다.

가벼운 화장까지 된 얼굴은 그동안 햇볕을 보지 못해 약간 창백하긴 했지만 폭행당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안 갈거니?”

어머니가 문 앞에 서서 말했다.

어머니의 손에는 작은 옷가방이 들려 있었다.

“알았어. 아빠는 안 와?”

“오늘 강의 있다고 했잖니.”

“그래.”

그러더니 핸드폰 시계를 보았다.

설미주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병실을 스윽 둘러보았다.

뭔가 아쉬움이 짙게 묻어나는 얼굴이었는데 어머니는 문 밖으로 걸어나가고 보이지 않았다.

그때 쥐고 있던 핸드폰이 울리자 재빨리 바라본다.

문자 한 통이 왔는데 캐시백 운운하는 스펨이다.

후다닥!

돌연 복도로부터 구둣발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오더니 원무과 직원 정삼오가 급히 온 듯 헐떡 거렸다.

정삼오가 들어오자 나갔던 어머니가 다시 들어온다.

“이거 일이 좀 꼬이는데요.”

“왜요?”

“병원 앞에 기자 몇 명이 와 있습니다.”

기자라는 말에 설미주의 눈이 커졌다.

비록 홧김에 언론에 터뜨리겠다고는 했지만 안 될 말이다.

재벌 3세의 주먹에 맞아 입원했다는 기사가 처음에는 충격이 될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 금세 자신을 향한 비난과 비판의 댓글, 또한 가짜 뉴스들이 돌아다닐 것이다

아나운서들은 재벌을 좋아한다느니, 어느 여자 아나운서는 돈 많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 아나운서가 되었다는 소문이 거리낌 없이 돌아다니는 시절이다.

사실 아나운서실 후배중 미스 코리아 출신이 있었다.

모 재벌의 둘째 아들과 사귀었고 결혼 얘기까지 나돌았지만 어느 날 깨지고 말았다.

헤어진 이유가 여자의 심한 낭비벽 때문이라는 같은 동료인 자신들도 모르는 소문에 그녀는 무척 힘들어 했다.

여자가 오천만 원짜리 명품 시계를 대수롭지 않게 사달라고 하더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아는 그 후배는 무척 검소한 친구였다.

나중에 여자 후배는 엉엉 울면서 자살까지 생각했었다고 고백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남자가 뼈대가 되어 돌아가는 세상에서, 더욱이 재벌을 상대로 좋은 기삿거리를 기대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자기 또한 어느 미친놈들의 술안주거리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어떡해야 하죠?”

“글쎄요. 기자들이 떠날 때까지 기다리시든가. 아니면.”

정삼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이었다.

“그냥 무시하고...”

어떤 질문을 해도 묵묵부답으로 가버리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설미주와 연예부 기자들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다.

적당한 밀당과 가끔은 술자리도 마련하고 해야 하는데 그녀는 일체 그런 것이 없었다.

특히 KBC 방송국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면서 자신을 향한 기자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단지 남녀 차별 없는 공정을 외칠 뿐이었다.

“어떡하니?”

어머니 얼굴이 굳어진다.

아닌 건 죽어도 아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기 할 말은 하는 설미주의 성격을 알기에 지금까지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었다.

‘모 난 돌이 정 맞는다’

그렇다고 불의를 보고 외면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또한 남의 공박을 두려워해 강직한 성품을 버리라는 뜻도 아니었다.

충돌보다는 대화와 타협의 묘를 알아야 한다는 뜻에서 했던 말인데 주위에 아군보다는 적군이 많아 보였다.

“온다고 해놓고서.”

누군가를 향해 인상을 쓴다.

“누구 기다리니?”

“아...아니야 엄마. 그냥 가자.”

“괜찮을까?”

“세상 일이 년 살아? 내가 아무런 대꾸도 않겠다는데 어쩔거야. 지들이.”

앞장서서 복도를 걸어갈 때 전화가 걸려왔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재빨리 들어보는데 권총수 이름이 쓰여 있다.

며칠 전 명함을 보고 권총수의 번호를 저장해 놓은 것이다.

“어딘데?”

황급히 전화를 받는 설미주를 어머니가 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못 온다구? 그럼 할 수 없지? 나 지금 엄마랑 나가고 있어. 그래. 끝나고 전화 해.”

핸드폰을 내린 설미주 표정이 환해졌다.

조금 전까지 기자들이 왔니어쩌니하면서 그다지 밝은 표정은 아니었는데 전화 한 통에 환해진 설미주를 보며 어머니가 눈을 좁혔다.

“누구니?”

“바오...아니 총수.”

“권대표?”

“응! 갑자기 일이 생겨 못 온다면서 저녁 같이 하자 그러네.”

“저녁? 나갈거니? 오랜만인데 집에서 먹지 그래.”

“총수가 나오래는데.”

생긋 웃는 설미주를 보며 어머니의 눈이 커졌다.

“너 지금 웃었니?”

“왜? 내가 웃으니까 보기 흉해?”

그러면서 얼굴을 매만졌다.

상처는 없다.

약간 핼쑥하긴 해도 미스코리아 뺨친다는 미모는 그대로였다.

“난 또!”

설미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던진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맞아, 총수 전화 기다리고 있었어.”

설미주가 손에 들고 있는 가방을 들려고 하자 어머니가 저지했다.

“괜찮아. 그렇게 웃으니 기분은 좋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미주야?”

“네 엄마!”

“총수 결혼했니?”

“미혼이라는 것 같은데?”

“자기 입으로 그래?”

“아니 오 이사라는 분이 그랬어.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어머니는 엘리베이터 불빛을 보고 선 설미주를 흘끗 보았다.

표정 환한 딸을 얼마만에 보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성모님 하며 중얼거린다.

아직 겪어보지 않았다.

물론 지난 며칠 동안 권총수에 대해 나름대로 알아보았지만 가장 놀라운 건 기부였다.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출신 보육원을 갔더니 권총수 대한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작년 성탄절에 아프리카 잠비아에 300명의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는 학교와 기숙사를 세우는데 권총수가 모든 비용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년 소녀 가장들을 위해 써달라고 50억을 내놓았고, 오래된 성당을 보수하고 신앙 선조들이 참수당한 성지이지만 자금난으로 성역화 하지 못한 지역과 장소를 매입하는데

쓰라면서 가톨릭 재단에 30억을 기부했다.

너무 크다.

큰 인물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권총수는 차안에 있었다.

회사로 출근하여 몇 가지 일처리를 한 뒤 설미주의 퇴원을 챙기기 위해 사무실을 나서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국정원 제5국 대북 업무를 총괄하는 정현웅 국장이었다.

그동안 서로 바빠 전화 통화도 못한지 꽤 됐다.

급히 시간을 좀 내 달라는 것이었다.

국정원 고위 간부가 사적인 일을 위해 급히 만나자는 전화를 해올 리는 없다.

그래서 정현웅을 만났고 지금 국정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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