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7화: 마지막 전쟁(3)
대문을 향해 핸들을 조작하며 빵하고 경음기를 울렸다.
그러자 경비실 문이 열리고 관리인 전두섭이 재빨리 나와 대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그그긍!
권혜림은 천천히 대문을 벗어났고 관리인 전두섭이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부우웅!
차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대문은 굳게 닫혔다.
일요일인 탓에 차가 막혔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가 넘었다.
권혜림은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가정부가 받아 놓은 따뜻한 물이 욕조에 가득 넘치도록 채워져 있었다.
알몸의 권혜림은 욕조 속으로 몸을 담갔다.
“아아! 따뜻해!”
물의 온도는 적당했고 풀어 놓은 장미꽃 향기가 코끝을 파고든다.
이 맛이다.
권혜림은 눈을 감았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권혜림이 눈을 떴는데 이마를 찡그렸다.
뭔가 이상하다.
그 이상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정확한 표현이나 대답을 할 수는 없다.
분명한 건 머리가 무겁다는 것이다.
충분히 쉬었는데도 머리가 깨끗하지 않고 아주 혼탁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부북!
권혜림은 양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힘껏 누르며 내일 병원에 한 번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샤워를 끝내고 간단히 저녁 화장을 한 뒤 거실로 나갔다.
남편은 어제 중계된 월드컵 유럽 예선 경기를 보고 있었다.
“여보 한 잔 할래?”
“아 어떻게 알았어. 딱 한 잔 하고 싶었는데.”
“오케이!”
권혜림은 나이트 가운을 걸치고 진열장에서 양주 한 병을 꺼냈다.
“제가 할께요. 사모님.”
2층에서 가정부가 내려왔다.
“아녜요. 아줌마는 올라가 쉬세요. 내가 하겠어요.”
“그럼 편히 쉬세요.”
가정부가 사라졌다.
양주에 안주는 굳이 필요없다.
잔과 얼음만 준비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또르르!
권혜림은 언더락스 잔에 얼음을 넣고 술을 따랐다.
남편의 잔에도 같이 잔을 채우고 둘은 미소를 지으며 건배를 했다.
쨍!
건배를 하고 막 마시려던 권혜림이 잔을 떨어뜨렸다.
파악!
잔은 소파 탁자에 떨어졌고 권혜림은 쿵하며 이마를 탁자에 찍었다.
그 바람에 깨진 유리가 권혜림의 얼굴에 쑤셔 박힌다.
“여보!”
남편은 재빨리 권혜림의 상체를 세웠다.
“맙소사!”
권혜림의 얼굴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으으으윽!”
권혜림이 갑자기 온몸을 떨며 입에서 거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남편은 당황하며 외쳤다.
“여보, 여보! 정신차려.”
“까으으악!”
권혜림이 괴성을 질렀다.
시끄러운 소리에 2층에서 달려 내려온 가정부가 권혜림을 발견하고 소스라친다.
“아줌마119 불러요.”
“끼아아!”
마치 까마귀가 우는 것 같은 소릴 내며 권혜림은 벌렁 뒤집어진다.
“이...이런!”
권혜림이 간질 환자처럼 온몸을 떨었다.
투툭!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양손으로 소파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투투!
질긴 가죽 소파를 뜯으며 손톱이 뜯겨 일어났다.
남편도 너무 놀란 듯 어쩔 줄 모른 채 바라보고 있었다.
퍼어억!
권혜림이 좀비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머리를 벽에 박았다.
퍼퍼퍽!
“여보 그만!”
머리가 깨지고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으 살려줘. 살려줘.”
권혜림의 발작은 거칠고 강력했다.
콰앙!
남편은 그녀를 붙잡기 위해 감쌌다.
그러나 고통을 견디지 못했는지 권혜림의 힘은 놀라웠다.
남편을 집어 던지듯 밀었는데 날아가듯 맞은편 벽으로 나동그라졌다.
“꾸아꾸아!”
권혜림의 눈이 완전히 뒤집혀 흰 자위 뿐이다.
자신의 머리를 쥐어 뜯으며 몸부림치는데 걸치고 있던 나이트 가운이 산산이 찢어지면서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드러났다.
주르륵!
입에서는 급기야 피거품이 넘어왔고 그녀는 주문 같은 이상한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부라사카, 마도퍼피, 나버랄 조랄, 그긍까아알.”
빡빡박!
그러더니 마루바닥에 다시 이마를 찧기 시작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재빨리 가정부가 문을 열어줬고 119가 들것을 들고 나타났다.
119대원들도 난장판이 된 방안을 보며 깜짝 놀란다.
그런데 그토록 발작하며 소릴 지르던 권혜림이 느닷없이 조용해졌다.
“아아아!”
축 늘어진 채 신음을 흘리던 권혜림이 눈동자를 움직인다.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내일 퇴원이다.
얼굴의 붓기는 많이 가라 앉았으나 부러진 이는 앞으로 시간을 두고서 치료를 해야 한다는 담당 의사의 소견이 있었다.
딩동!
벨소리에 침대에서 내려온 설미주는 입구로 걸어갔다.
스윽!
헝클어진 머리 채로 걸어나오다 인터폰 화면에 나타난 권총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다.
그러면서 재빨리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다듬어 끈으로 묶더니 거울 앞에 섰다.
화장도 하지 않은 생얼굴이 불편한 듯 이마를 잠시 찡그리더니 출입구로 다가갔다.
딸칵!
“바...바오로. 어 아빠.”
권총수가 앞에 들어섰고 그 뒤로 아버지 설치수가 웃으며 들어선다.
“어떻게 같이 오죠?”
“병원 앞에서 만났다.”
“그것 뭐에요?”
설치수가 탁자 위에 조그만 쇼핑백을 놓았다.
“엄마가 주더라.”
“뭐지?”
쇼핑백 안의 물건을 꺼냈는데 나무로 된 도시락이다.
“아니 내일 퇴원할 건데 뭘 이런 걸 보내.”
“내일 퇴원하면 아침은 안 먹니?”
“병원 밥 먹으면 되지. 엄마도 참.”
투덜거리며 밥과 반찬 통을 열어 확인하던 설미주가 흘끗 고개를 돌렸다.
권총수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자 약간은 쑥스러운 듯 말했다.
“뭘 그렇게 봐.”
권총수는 피식 웃었다.
“나도 거칠었지만 너도 만만치 않았지.”
“뭐가 만만치 않아? 내가 어땠는데? 난 공부 밖에 몰랐어.”
설미주는 목청을 높였다.
“빅토리아 거짓말하면 안된다. 난 지금도 원장 수녀님이 널 데려오던 날 했던 말씀을 기억한다.”
“원장 수녀님이 뭐라고 했는데요?”
“바오로에게도 결코 밀리지 않는다고 했다. 두들겨 맞으면서도 달려든다고 말이다.”
“아빠 무슨 말이야. 원장 수녀님 전화번호 있죠.”
“돌아가신지 오 년째다.”
“돌아가신 분에게 따질 수도 없고.”
설미주는 도시락을 들고 일어나 안쪽 냉장고에 넣었다.
“냉장고에 밥을 넣으면 안되지.”
“아 맞다!”
설미주는 미소를 지었는데 얼굴이 빨개졌다.
권총수 앞에서 허둥대는 자신이다.
설미주는 냉장고 문을 열고 밥그릇을 꺼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내가 왜 이러지’
얼음 같다는 말까지 들을 만큼 쉽게 흥분하지 않고 긴장을 모르고 살아왔다.
수많은 생방송을 경험했고 시사토론 사회자로 쌓을 만큼 쌓인 여유가 오늘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당황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렇다.
바로 권총수 앞에서 자신이 주눅 들고 있었다.
주눅이란 시켜서가 아니라 상대의 기세에 눌릴 때 나타나는 정신적 긴장이다.
“병원비는 칠성쪽에서 모두 정산했더구나.”
칠성이라는 말에 설미주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 놈은 이집트 지사로 발령이 났다.”
“이집트?”
설미주의 눈이 커졌다.
“그 사람 올 봄 쯤 계열사 사장으로 승진 발령된다는 말이 있었는데?”
가까운 미국이나 일본 놔두고 재수 없으면 총맞을 수도 있는 그런 곳으로 보냈느냐는 시선이다.
아버지가 한쪽에 서 있는 권총수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
“여기 권대표가 그렇게 조치했다.”
설미주는 권총수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5년 동안 절대 국내에서 근무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만약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땐 이번 일을 절대 그냥 넘기지 않겠다고 했지.”
“세상에!”
설미주의 눈이 커졌다.
칠성은 재벌기업이다.
대한민국에서처럼 재벌이 권력인 곳은 지구상에 없다.
모든 것이 오로지 재벌을 위해 존재하고 재벌이 사라지면 국가가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처럼 언론들이 호들갑을 떤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재벌과 대립각을 세워야 할 잘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 편에 서 있다는 것이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했다.
과부가 홀아비 마음 알고, 가재는 게 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니다.
그들은 재벌 회장은 웬만한 죄를 지어도 용서해줘야 한다고 떠든다.
재벌에 땀을 착취당하면서도, 눈곱만큼도 안 되는 깨알 같은 지분으로 자신들의 목숨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그들을 염려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정작 국가 발전과 경제성장의 중심은 자신들이다.
그런데 재벌 오너들이 한국 경제를 이끌어왔다는 이해 못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1세대도 아닌 2,3세대들에게 말이다.
“정말이에요?”
어이가 없어서 묻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바라보는 것이다.
청와대라고 해도 민간 기업의 인사에 관여하지 못한다.
“난 일이 있어 가봐야겠다. 권대표 또 봅시다.”
“아빠!”
탁!
설미주가 다급히 불렀지만 아버지는 사라졌다.
이 늦은 밤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건가.
갈 곳이라고는 집밖에 없을 것이다.
설미주는 불편한 시선으로 닫힌 병실 문을 바라보더니 창밖을 내다보고 서 있는 권총수를 슬쩍 바라보았다.
병실에 침묵이 찾아 들었다.
아버지가 있을 때는 생기가 있고 부드러웠는데 갑자기 불던 바람이 멈춰 버린 듯 했다.
설미주는 일어나 싱크대쪽으로 걸어가 수돗물을 틀었다.
설거지 할 것도 없다.
태어나 싱크대 수돗물을 틀어 손을 씻어 보긴 처음이다.
언제까지 수돗물에 손을 씻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참을 틀어 놓고 손을 비비던 설미주는 꼭지를 잠그고 옆에 있는 행주수건에 손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감시 하듯 창밖을 보고 서 있는 권총수를 보더니 재빨리 소파 탁자에 있는 리모컨을 들고 텔레비전을 켰다.
탁!
텔레비전 화면이 켜졌는데 축구 중계를 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것이 축구다.
가끔 축구를 볼 때마다 어쩌면 저토록 건조하고 딱딱한 스포츠가 있을 수 있는지 호기심이 생길 때가 있다.
월드컵 경기라도 열리면 다음 날 출근해서 보면 난리다.
그야말로 자기 가족중 누군가가 골을 넣은 듯 남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목청을 높이며 흥분한다.
그리고 더욱 웃기는 건 그들 모두가 전문가이고 감독이라는 것이다.
4-3-3이 어쩌고 3-5-2가 어쩌니 하면서 내놓은 분석들을 보면 이빨만큼은 국가대표였다.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데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나둬 봐.”
움찔!
설미주는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권총수 목소리가 너무 단호했다.
“월드컵 최종 예선 경기잖아. 오늘 이란을 이기면 월드컵 본선에 나간다고.”
월드컵 정도는 안다.
단일 종목이지만 올림픽보다 더 흥행이 되는 지구촌 최대의 마법 스포츠다.
스코어는 0대0.
후반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한국이 밀리고 있었다.
역대 전적을 보면 9승 9무13패로 한국이 절대 열세에 있다.
특히 테헤란의 아자디 스타디움에서는 1974년 이후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
그곳은 한국 축구의 무덤이다.
이란에게 지면 본선에 나가지 못한다.
그러나 비기거나 이기면 무조건 진출이다.
반면 이란은 비겨도 안 되고 져서는 더욱 안된다.
한국을 이겨야 월드컵에 나갈 수가 있다.
설미주는 자신이 큰 실수를 할 뻔 했다는 것을 알고 숨을 죽이며 화면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