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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644화 (644/651)

제644화: 백기투항(2)

설치수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권총수 블랙잭 대표를 좀 만나달라는 겁니다.”

“저를 말입니까?”

“권 대표를 잘 아는 모양이더군요. 만나고 싶은데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하지 뭡니까?”

권총수는 이마를 찡그렸다.

자신과 이용철 회장이 만날 일은 없다.

이번 설미주 사건에 자신이 개입해 있다는 걸 알고 뭔가 무마를 하고 싶은 듯 했지만 법적으로는 철저히 제3자일 뿐이다.

“70이 넘는 재벌 회장이 새벽에 전화하여 사정하는데 당황스럽더군요. 난 권 대표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와 어떤 자리를 마련해 줄 능력이 없다고 했죠.”

권총수는 표정없는 얼굴로 듣기만 했다.

“그쪽에서는 이미 미주와 권대표가 같은 보육원 출신이라는 걸 알아낸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자신에게 부탁한 듯 싶다는 뜻이다.

권총수는 컵에 채워진 물을 마셨다.

벤츠 승용차가 멈추고 권총수가 내렸다.

권총수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설미주가 입원해 있는 7층에 도착했다.

쨍!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권총수는 멈칫했다.

정장을 한 건장한 사내 세 명이 엘리베이터 오른쪽으로 서 있다 일제히 돌아보았다.

권총수는 바라보는 세 사내를 스윽 훑어 본 뒤 걸음을 옮겼다.

707호에 도착한 권총수는 벨을 눌렀다.

벨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렸는데 이충문 변호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직 계십니까?”

“최 변이 좀 보자고 해서.”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최형식이 반갑게 인사를 하며 웃는다.

멈칫!

그러다 권총수의 시선이 한곳에 멎었다.

침대 아래 한 사내가 등을 돌린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권총수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아보았는데 이재백이다.

설미주는 종합검사를 받기 위해 병실에 없는데, 벌써 40분째 저러고 있다며 이충문 변호사가 설명했다.

“일어나세요.”

권총수가 말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보았던 세 사내 역시 이재백이 데려온 직원들인 모양이었다.

권총수가 나타나자 이재백은 완전히 창백해졌다.

이재백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앉아요.”

권총수는 소파를 가리켰다.

휘청!

너무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던 탓에 이재백은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이재백은 맞은편 쇼파에 앉았다.

“실장님 냉수 한 컵.”

최형식이 재빨리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가져다준다.

쭈욱!

이재백은 단번에 마셨다.

이어 넥타이를 반듯하게 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 변호사님, 어떻게 결론지었죠?”

이충문 변호사가 뒤쪽에 서서 말했다.

“법대로 처벌 받아야 한다는 것이 미주양의 입장입니다. 대신 마약 문제는 일체 거론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사람이 죽지 않은 이상 재벌 아들이다.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처럼 재벌에 약한 사법부는 없다.

보나마나 법정으로 간다면 칠성그룹에서는 눈이 부셔 바라볼 수 없을 만큼 호화 찬란한 변호팀을 내 세울 것이고 법원은 근엄한 얼굴로 집행유예를 내릴 것이다.

권총수는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법적처벌이고 손해배상이고 다 때려 치우고 소림의 백보신권으로 실컷 두들겨 주고 싶었다.

“용서해 주셔셔 감사합니다.”

이재백은 고개를 꾸벅했다.

“감사는 무슨.”

권총수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이재백씨.”

권총수가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예 대표님!”

“난 지금까지 호랑이만 때려 잡으며 살아왔습니다. 웬만한 맹수는 거들떠 보지도 않죠.”

움찔!

이충문과 나란히 서서 듣고 있던 최형식 변호사가 놀란다.

온몸에 얼음물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인간으로 말하면 먹이 사슬 꼭대기에 있는 돈과 권력을 쥔 사람들만 상대한다는 뜻이다.

즉 당신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때려 잡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재백 또한 권총수의 말 뜻을 알아차린 듯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때 권총수는 문자 한 통을 받아 본다.

잠시 문자를 읽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섰다.

“일이 생겨 회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충문을 향해 말했다.

“그러시죠.”

이충문은 무슨 일이냐는 듯 묻는 시선을 보냈지만 권총수는 말하지 않았다.

이충문이 비켜섰고 최형식은 가볍게 허리를 구부렸다.

탁!

권총수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실장님!”

이충문이 쇼파에 앉아 있는 이재백을 향해 말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한 겁니다. 내 말 아시죠?”

이재백은 어금니를 물었다.

엄청나게 운이 좋았다는 말인데 이충문이 말을 이었다.

“우리 대표님에게 한 번 찍히면 이생에서의 삶은 끝입니다. 뒤숭숭한 소문만 들었겠지만 난 권씨 가문의 몰락을 어느정도 들여다 본 사람중 한 명입니다.”

권씨가문의 몰락 얘기에 최형식도 이재백도 눈을 빛냈다.

“모두 사고로 죽었죠. 검찰과 경찰에서 미친 듯이 뒤졌지만 살해당했다는 흔적 하나 찾지 못했습니다. 증거도 없고, 알리바이도 완벽하고 사건현장의 CCTV에도 찍히지 않고, 이런

사람을 상대로 누가 덤빕니까?”

부르르!

비 맞은 닭이 온몸을 떨며 물을 털어내듯 이재백은 소스라쳤다.

무서운 말이다.

모골이 송연하다.

권총수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채명천 이사가 무거운 표정으로 들어섰다.

딸칵!

권총수는 담배부터 피워 물었다.

권총수는 들어오는 채명천을 가만 바라보았다.

“얌전한 강아지가 부뚜막에 오른다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홍나영씨가 올해 몇 살이죠?”

홍나영은 관리과 소속 대리다.

“서른셋입니다. 알아봤더니 지나치게 도박에 빠져 있더군요. 휴일날은 거의 강원도 정선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로 알려졌습니다.”

“도박으로 인한 빚이 많았다?”

“5억이 조금 넘더군요. 그런데 그 빚이 한순간 정리됐습니다.”

“권혜림쪽에서 회사 직원들을 감시했군. 내부자로 쓸만한 인물이 있나 훑다 홍나영씨가 그들 안테나에 걸렸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봐아죠.”

권총수는 담배를 껐다.

“어떻게 할까요?”

권총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이마를 찡그리며 몸을 돌려 잔뜩 찌푸려 있는 바깥 날씨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아랫사람을 관리 못 한 제 탓도 큽니다.”

권총수가 돌아섰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더군요. 홍나영씨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이사님은 내일 연변 출장 준비나 잘하세요.”

“알겠습니다.”

채명천은 평소와 달리 행동거지 말투 하나까지 조심스러웠다.

관리부 직원의 일탈로 권총수와 오민철이 평양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니다.

사실 책임을 지고 자신이 사직서를 쓸까 고민도 했다.

이런 일은 사표를 내는 것이 윗사람으로서 지휘 감독 부실에 대한 책임을 조금이라도 지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더 남아 있었다.

북한 특수부대 출신들을 지금처럼 숨바꼭질 하듯 숨어 데려오는 건 한계가 있다.

지금보다는 더 여유있고 안전한 방법으로 데려오는 길을 찾아 놓은 뒤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조금이라도 체면이 서는 일이었다.

한겨울인데 안은 뜨겁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뜨거운 바람과 돈을 따기 위해 뿜어내는 도박꾼의 거친 숨소리가 섞이며 공기는 터질 듯 달아 올랐다.

권총수와 오민철은 여기저기 기웃 거리며 구경을 다녔다.

할 일이 없어서 귀한 시간 소비해가며 온 것이 아니다.

한 여자를 쫓아왔다.

관리부 대리 홍나영이다.

어떤 사유로 도박에 빠졌는지 모르지만 조사결과 드러난 그녀의 채무관계는 복잡하고 치열하게 엉켜 있었다.

제2금융권에 손을 벌리다 못해 사채업자에게까지 손을 끌어다 써 꼼짝 못하고 부채의 덫에 걸린 그녀에게 나타난 이가 백서그룹이었다.

두 사람은 느긋하게 그녀가 하고 있는 바카라 게임테이블 근처를 서성거렸다.

누군가는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거든 바카라 도박을 가르치라고 했다.

너무 쉽기 때문에 곧 이길 것 같은 게임.

따라서 포커의 고수들은 좀체 바카라는 하지 않는다.

바카라가 갖고 있는 끈적한 유혹의 열기를 알기 때문이다.

블랙잭을 포함한 다른 게임과 달리 바카라는 카지노장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손님이 이길 확률은 거의 없다.

어쨌든 홍나영은 하필 빠져도 지독한 바카라에 걸린 것이다

“족히 이삼 천은 잃은 것 같은데.”

오민철이 바카라에 대해서는 조금 아는 편이다.

그는 근처에서 홍나영의 베팅을 지켜보며 그녀가 점점 무너지고 있다고 했다.

‘도박은 끝없는 찬물을 뒤집어써도 돈을 잃는다’

아무리 냉정해져도 도박으로 돈을 딸 수는 없다는 말이다.

두 사람은 몇 번 더 지켜본 뒤 카지노장 밖으로 나갔다.

야외 한쪽 커다란 봉고차 뒤에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연봉이 칠천.”

홍나영 대리의 연봉이다.

조금 전 나오기 전까지 자기 연봉의 절반은 털어 넣었다.

“어떻게 할 건데.”

“그런 여자들은 용서를 해주면 고마워 할 줄 몰라. 또 해코지를 한다고.”

“홍나영을 없애 버리겠다고?”

피식!

권총수가 웃는다.

“그럼 누구? 혹시 권혜림?”

“충분히 참을 만큼 참았어. 더는 안돼.”

담배 꽁초를 바닥에 던져 발로 비빈 권총수가 말했다.

“홍나영은 사표 수리하는 선에서 정리해.”

오민철이 한숨을 쉬었다.

“진짜 권씨들 징하다. 판정패로 진것도 아니고 하나같이 케이오 당해 일어나지 못하는데도 기어이 덤비는 이 무모함은 뭐지?”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태어날 때부터 선택받은 종족이라고 착각하고 있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에이 설마 그러겠어 하지만 아니야. 그 사람들은 진짜로 자신들이 우월한 DNA를

갖고 있으며 현대판 백작이나 귀족이라고 생각해. 우릴 노예나 하인으로 보는 거지.”

“개 돼지?”

“그렇지. 인간이 어떻게 개 돼지에게 당할 수가 있어. 그러니까 더 필사적으로 덤비는 거지. 개 돼지한테 당한다? 말이 되겠어. 형 같으면 가만 있겠냐고?”

“내가 보기엔 그 여자가 개 돼지다.”

“분수를 알면 세상엔 싸움이 없지. 제 분수를 모르니까 충돌이 일어나는 거야. 언젠가 어느 기자가 묻더라고, 고아출신으로 엄청난 거부가 되었는데 기분이 어떠냐고, 그래서 말했지.

난 그때도 고아였고 지금도 고아이며 앞으로도 고아일 것이다.”

평범한 사람으로 살겠다는 뜻이다.

부자가 되었다고 속된 말로 지랄 염병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저 여자 나오는데.”

오민철이 호텔 입구를 가리켰다.

홍나영이 나온다.

“같이 따라나온 남자가 애인이라고?”

오민철이 물었다.

“한심한 새끼 여자친구가 잘못된 길을 걸으면 가로막고 안된다면서 설득할줄 알아야지 같이 도박에 쳐 박히다니.”

“저 놈 건달이야. 이왕수.”

“어떻게 알아?”

“한 시간 전 쯤 채 이사님에게 홍나영씨 남자 친구에 대한 문자가 왔더라고.”

“어디로 전화하는 것 같은데.”

홍나영이 캔 맥주를 마시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권총수의 귀가 미세한 꿈틀거림을 보였다.

천리지청술을 전개한 것이다.

오민철은 권총수 표정에 집중했다.

권총수는 가만 듣고 있었는데 표정만으로는 홍나영이 누구와 무슨 내용의 통화를 하는지 짐작 할 수 없었다.

통화가 길다.

바람결에 뾰쪽한 목소리가 간간히 들리는 것이 언성이 높아지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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