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3화: 백기투항(1)
쭈욱!
이재천은 바닥에 조금 남은 커피를 단번에 비운다.
암담한 표정이다.
이재천은 상체를 의자에 비스듬하게 붙이더니 가볍게 눈을 감았다.
파르르!
눈썹이 떨린다.
그렇게 잠시 앉아 있던 이재천이 눈을 뜨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꾸우욱!
단축 번호 하나를 누르는데 이름이 떴다.
‘아버지’
이재천의 아버지는 칠성그룹의 회장 이두재였다.
묵직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린다.
이재천은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밤이다.
이재백은 친구 최무열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최무열은 국내 최대 유통그룹인 달산제과의 세 아들중 막내이다.
아버지 최우등이 달산제과 회장인 것이다.
둘은 어려서부터 자주 어울렸고 대학도 같이 졸업했다.
두 사람은 조니 워커 블루라벨을 세 병째 비우고 있는데 동석한 여자들은 브래지어와 팬티만 걸친 반라 차림이다.
이재백의 좌석에 들어오는 여자들은 한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미모는 말할 것도 없고 반드시 옷을 벗고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만지고 주물러도 거부하거나 화를 내면 안된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의 한 손은 쉴 사이 없이 여자들의 몸을 더듬었다.
지이잉!
한참 웃고 떠들 때 핸드폰을 꺼낸 이재백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최변호사.”
최변호사라는 말에 잠시 멈칫했던 좌석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그건 떠들어도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뭐라구요?”
이재백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술좌석은 재빨리 숨을 죽였다.
“그래서? 확실해요? 자세히 알아봐요. 그새낀지 아닌지?”
그러면서 몇마디 더 욕설을 뱉더니 전화를 끊었다.
이재백은 화가 난 얼굴이다.
혼자 거친 욕설을 뱉더니 잔을 비웠다.
“개 같은 소릴 하고 자빠졌어.”
“무슨 전화야? 최변호사 같더만?”
최무열이 물었다.
“내가 말했잖아. 어제 일 말이야.”
“깔끔하게 정리됐다면서.”
“그게 아닌가봐.”
“뭐가? 아니긴 뭐가 아냐? 돈 많이 달래? 돈 줘버려. 그 여자 그렇게 안 봤는데.”
최무열은 슬쩍 설미주를 불평했다.
아직은 완전히 이재백의 편이 되어 나쁘게 씹을 때가 아니다.
설미주에 대한 이재백의 집착이 강하다는 걸 알고 있다.
여전히 사랑하고 뜨거운 감정을 품고 있는데 멋모르고 욕을 퍼부었다가 이재백의 화를 돋을 수 있다.
“최 실장, 혹시 권총수라고 들어봤어?”
최무열에게 묻는다.
“권총수? 기업총수라는 말은 들어 봤지만.”
순간 이재백이 피식 웃고 만다.
“사람이야?”
“전혀 몰라?”
“글쎄 연예인 같지는 않은데 누구야?”
“블랙잭이라는 보안 기업 있지?”
“블랙잭? 아, 오늘 아침 뉴스에 보니까 아주 잠깐이었지만 어제 우리 돈으로 시가총액 백조를 돌파했다더라고, 민간 보안기업으로는 아카데미를 제치고 세계 최고라는 것 같지.”
꿈틀!
최무열의 이마가 좁혀졌는데 그제서야 뭔가 간파한 눈치다.
“블랙잭 대표 권총수 그 사람? 천왕그룹을 사분 오열시킨 것이 그 사람이라던데 진짜야?”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고 그 년이 그 놈과 아는 사이인 듯 한데.”
“아는 사이라면, 미주씨 애인 없다고 했잖아?”
“애인 관계는 아니고.”
조금전 최형식 변호사가 전화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찾아가 정중하게 사과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책입니다’
이충문 변호사를 대표로 한 로펌 감앤장에서 이번 사건에 뛰어들 기세도 보인다는 것이다.
이충문 변호사와 만나 조금전까지 애기를 나눴지만 그쪽이 강경하다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무조건 찾아가 무릎을 꿇고 형사적 처벌은 물론이고 민사적 배상까지 피해자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백기투항이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서둘러야지 머뭇거리다 때를 놓치면 더욱 골치 아프다고 말하면서 마약을 투약한 사실까지 알고 있다고 해 주었다.
술맛이 떨어진다.
“한 잔 드세요.”
옆에 앉은 여자가 술을 따라준다.
KBC 사랑과 친정에 단역으로 나오는 여자지만 엄연히 배우이기도 한 이수수였다.
이재백의 표정은 좀 체 풀리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그녀와 오늘 밤 환락의 시간을 즐기려는 계획도 기분도 모조리 부서진다.
그때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는데 이번에는 형 이재천이었다.
“어디냐?”
“왜요?”
“아버지가 찾는다. 빨리 와라.”
“무슨 일인데?”
뚜우우!
전화가 끊어졌다.
“아 씨발!”
퍼억!
이재백은 핸드폰을 내동댕이 쳤다.
본가에 얼마 만에 오는지 모르겠다.
할머니 할아버지 제사에도 참석을 하지 않다보니 거의 3년은 넘은 듯 했다.
차를 대문 앞에 세우고 내리자 딸칵하는 소리가 들리며 안에서 열린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어서와 처남!”
바로 손 위 누님의 남편, 이재백에게는 매형이 되는 신내출이다.
누님과 미국 유학시절 만나 결혼했다.
부모님은 두 사람의 혼인을 반대했다.
신내출의 집안이 너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인데 아버지는 동사무소 직원이고 어머니는 미장원을 운영한다.
하지만 아이까지 낳아 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시켰는데 집안에서 가장 찬밥이다.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비아냥거려도 아직까지 화를 내는 법을 보지 못했다.
“왜 부른답니까?”
신내출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빙긋 웃는다.
“들어가봐. 할 얘기 있나보지 뭐.”
자신은 전혀 아는바 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 오밤중에 아버지 집을 왜 왔단 말인가.
“난 오라고 해서 온거야.”
불러서 왔을 뿐 무엇 때문에 호출을 당했는지는 관심없다는 뜻이다.
워낙 면전에서 야유하고 이 사람 저 사람 주저 없는 짓밟힘에 주눅이 들어 집안일을 남의 일 보듯 한다지만 너무 태평스런 대답이다.
이재백은 마당을 가로질러 불이 환하게 켜진 집안으로 들어갔다.
다섯 사람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 이두재가 굳은 표정으로 바라본다.
오른쪽으로 어머니 우채옥, 그 옆으로 조금전 대문 입구에서 만난 신내출의 아내이자 바로 위 누나인 이미윤이 앉았다.
아버지 왼쪽으로는 형 이재천과 변호사 최형식이다.
잠시 한 사람 한 사람 쳐다보던 이재백은 누님 이미윤 옆으로 앉았다.
“이쪽으로 앉아 네놈이 여자야?”
여자와 남자로 구분하여 자리를 앉은 모양이다.
아버지의 인상에 이재백은 일어나 최형식 변호사 옆으로 앉았다.
그때 담배를 모두 피운 듯 신내출이 주춤거리며 들어와 이재백 곁으로 앉았다.
“최변호사 말해봐.”
최형식은 사건을 간략히 설명했다.
“아니 이런 일이 한두 번 아니었으니 크게 놀랄 것 까지는 없죠.”
“그럼 뭐가 문제죠?”
누님 이미윤이 물었다.
부산에 있는 칠성백화점 사장이기도 했다.
“설미주가 다니는 방송국도 얘기가 됐고 경찰에서도 덮기로 결론이 났다면서요?”
“재수가 없으려니 원, 설미주 뒤에 블랙잭이란 회사가 있습니다.”
“블랙잭이라면? 포커 게임?”
신내출이 그 블랙잭이라는 얘기냐고 바라본다.
“가끔 뉴스에 나오잖습니까? 국내 최대 민간보안기업, 전쟁회사 말입니다. 특수부대 출신들을 데려다 중동이나 아프리카 이런 분쟁국가에 보내는 회사.”
“용병?”
신내출이 눈을 빛냈다.
“그곳 대표가 설미주와 잘 아는 모양입니다. 그것도 하필 사건이 일어나던 날 밤 목격자이자 현장까지 찾아와 이실장을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어어!.”
신내출이 재빨리 핸드폰으로 검색을 한 듯 놀란다.
“엄청나잖아. 시가총액 팔백억달러, 뭐야? 우리 돈으로 백조라는 건데. 와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손에 천왕그룹이 공중 분해 됐다는 거죠.”
그러면서 옛날 뉴스를 복기하듯 권총수와 천왕그룹, 그리고 권씨가문 사이에 얽힌 비화를 말했다.
모두가 얼어 붙는다.
그건 긴장을 넘은 두려움이었다.
아침이다.
권총수는 아침 운기조식을 마치고 바위에서 일어났다.
한겨울이지만 추위는 느끼지는 않는다.
현관으로 들어선 권총수는 손을 씻고 압력밥솥을 열었다.
운기조식 전에 밥을 앉혀놨는데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것이 잘됐다.
탁!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식탁 위에 놓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전화 오는 소리다.
권총수는 수돗물에 손을 씻고 재빨리 행주에 닦은 뒤 거실 탁자로 걸어갔다.
모르는 전화번호다.
잠시 바라보던 권총수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너무 이른 아침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설치수라고 합니다.”
설치수라면 설미주의 아버지다.
“예 교수님, 무슨 일입니까?”
“오늘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바쁘시면 제가 회사로 찾아 가겠습니다.”
“아닙니다. 시간 있습니다.”
“일부러 내실 것 까지는.”
“괜찮으니 말씀하세요. 예! 예! 알겠습니다.”
권총수는 전화를 끊었다.
이른 아침에 전화를 한 걸 보면 위기에서 설미주를 구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는 건 아닐 것이다.
궁금하다.
잠시 전화기를 들고 서 있던 권총수는 다시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기 시작했다.
제일 대학교 앞이다.
설치수가 회사 근처로 나온다는 걸 자신이 학교 앞으로 가겠다고 한 것이다.
설치수는 교수들이 자주 가는 일식집으로 권총수를 데리고 갔다.
점심시간에 맞췄기 때문에 식당은 사람들이 많았고 설치수는 아는 교수들과 인사를 나누기에 바쁘다.
두 사람은 작은 방으로 안내 되었고 권총수는 설치수가 주문하는 걸 지켜보았다.
설치수는 복어탕을 주문했고 권총수는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권총수가 한쪽에 있는 컵을 설치수 앞에 놓고 병에 들어 있는 물을 따라 준다.
“고맙소!”
권총수는 빙긋 웃었다.
“사실 사과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미주 데려온 보육원에 찾아가 권 대표에 대해 물어봤어요. 너무 놀랍습니다. 그토록 많은 돈을 소리소문 없이 기부하는 줄 몰랐습니다.”
권총수는 대수롭잖다는 듯 웃고 말았다.
괜히 이러쿵저러쿵 혓바닥 놀려봤자 자화자찬이 될 뿐이다.
“그런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사실 나도 여러곳에 기부를 하고 있으나 기껏해야 일 만원 이 만원이죠. 내가 번 돈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도록 선뜻 내놓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여전히 권총수는 웃기만 했다.
한마디로 자신이 지금 어떤 사람인지 알아봤다는 뜻이다.
그건 딸을 둔 부모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권총수를 바라보는 설미주의 시선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부모가 왜 모르겠는가.
시설에서 데려왔기에 더욱 애정을 쏟은 터라 그녀의 미세한 감정의 변화도 알아 차린다.
권총수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어제 밤 칠성그룹 이두재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권총수 눈이 커졌다.
“그때가 밤 1시가 넘었죠.”
“새벽 한 시에 전화를 했단 말입니까?”
“집으로 오겠다는 것입니다. 너무 놀라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어요. 무슨일이냐고 자꾸 묻자 찾아뵙고 얘기하겠다며 어찌나 고집을 피우는지, 가까스로 말렸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책임을 통감하고 진심을 다해 사과한다는 겁니다. 미주의 치료는 물론이고 충분한 배상도 할 것이며 내일 해가 뜨는 즉시 아들을 병원으로 보내 용서를 청할 것이라면서.”
설치수의 말을 듣는 권총수의 눈이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