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2화: 남자와 여자(3)
설치수의 눈이 커졌다.
“당신은 정비사가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거요?”
설미주 역시도 놀란 표정이다.
어머니는 말을 이었다.
“왜 내가 기억한 줄 알아요? 정비사 얘길 들은 미주가 입을 삐쭉 거렸죠. 보나마나 바오로 그자식이 그랬을거야 하고.”
그러면서 설미주를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군. 도대체 몇 년만이야. 30년? 그건 아니고 23년인가.”
“그나저나 이 일을 어찌할거니? 경찰에서는 쉬쉬하고 싶은 모양이던데?”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설치수가 단호히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 자식 더 이상 용서 할 수 없어. 재벌 아니라 대통령 아들일지라도 이번에는 그냥 못 넘어가.”
“당신 답지 않게 왜 이렇게 흥분해요.”
“흥분하지 않으면, 자식이 저모양 저꼴이 됐는데, 내 앞에 있으면 그냥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야.”
“대한민국에서 재벌을 누가 이겨요. 어느 대통령인가 그랬잖아요.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이 누구죠? 재벌 아닌가요.”
“회사에서는 뭐라고 하니?”
설치수가 물었다.
“이미 손을 썼나봐요. 몸이 회복될 때까지 쉬면서 마음을 잘 다스리라던데요.”
“똑같은 놈들 아니냐?”
어머니 표정이 굳는다.
“보나마나 프로그램 몇 개 협찬하겠다고 했겠죠. 나도 더 이상 참지 않을거에요. 법은 만 명에게만 평등한 대한민국이란 걸 인정하기 때문에 그 자식의 횡포를 참았지만 이번은 안
되겠어요. 내 인생이 거덜나든 아니면 그놈이 끝나든.”
설미주의 눈에서 독기가 뻗는다.
지이잉!
설치수가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본다.
‘총장님’
황급히 터치를 했다.
“예!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설치수는 조심스런 자세로 전화를 받았다.
아무 말도 않고 듣기만 하자 어머니의 눈이 빛난다.
설미주 역시도 불안한 시선이었는데 아버지의 얼굴이 갈수록 굳어지고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2분여 계속 듣기만 한 설치수는 알겠다는 말과 함께 통화를 끝냈다.
누가 보더라도 상대에게 일방적인 지시나 어떤 소식을 전달받은 전화라는 걸 짐작 할 수 있었다.
“무슨 전환데요? 누군데 그래요?”
“이거야 원!”
설치수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소파에 앉았다.
“칠성그룹에서 연락이 갔나봐.”
“학교로?”
“좋은게 좋은 것 아니냐는군. 계속 학생들 앞에서 강의해야 할 것 아니냐고.”
정년퇴직을 한 뒤 계약직으로 전에 있던 학교에서 계속 학생들을 가르친다.
“학교가 칠성그룹과 관계있어요?”
설미주가 물었다.
“우리나라 사학 재단이 한 다리 건너면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 아니더냐? 잘됐다. 그렇잖아도 몸이 불편해 쉬려고 했는데 이번 기회에 강단에서 완전히 물러나야겠다.”
“아빠!”
설미주의 눈이 커졌다.
“아빠도 한 번쯤은 당당하게 살아보고 싶다.”
먹고 살기 위해 끝없이 물러서고 양보하고 참으며 살아온 칠십 년이다.
삶 자체가 끝없는 고개 숙임의 연속임을 잘 안다.
그러나 이젠 지친다.
나도 사람답게 부정하고 불의한 일에 대해 한 마디 외치고 싶다.
‘이 나쁜 놈들아’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삼키며 살아왔다.
내 일이라면 몇 번이라도 더 고개를 숙이겠지만, 이제는 더 물러서기 싫다.
설미주를 바라보는 설치수의 눈빛이 아련하다.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권총수가 허리를 구부렸다.
“세례명 말고 이름이?”
“권총수라고 합니다.”
“권총수?”
설치수가 입안에 이름을 담고 이리저리 굴리듯 중얼거리더니 이마를 찡그렸다.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이 보다 더 끔찍한 일을 당했을 거야.”
설미주가 돌아보았다.
권총수는 살짝 미소를 지은 뒤 설미주 부모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병실을 나갔다.
“바오로, 명함 한 장.”
권총수는 문을 반쯤 닫았다가 돌아서서 침대에 누워 있는 설미주를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침대로 다가가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주었다.
화악!
명함을 보던 설미주의 눈이 커졌다.
“뭐야? 블랙잭 대표이사 권총수.”
설미주는 벌떡 일어나다 비명을 질렀다.
“아악!”
왼쪽 팔에 세 개의 링겔 바늘을 꽂고 있었는데 바늘 두 개가 빠진 것이다.
어머니가 전화기를 들고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님, 여기 환자 바늘이 빠졌어요.”
어머니가 핸드폰을 놓았을 때 설미주 시선은 여전히 명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정말 네가 그 권총수야? 그 권총수 맞아?”
권총수는 이마를 찡그렸다.
“왜?”
“난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 이름만 너와 같다는 생각을 했지 걔가 너 일줄은 진짜 요만큼도 몰랐어.”
“왜 그러니? 전부터 알고 있었니?”
“기절초풍한다더니 내가 그래야겠는데. 정말로 진짜 진짜 그 권총수가 너라고?”
권총수는 대답 대신 돌아서서 병실을 나갔다.
“누군데?”
설치수가 물었다.
“믿어지지가 않네. 아 이런 걸 두고 천지가 개벽할 일이라고 아빠가 그러셨죠? 언젠가 내가 일등 하니까 하늘과 땅이 뒤집힐 일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땐 너무 좋아서 그런거지.”
“그 사람 있잖아. 우리나라 최초의 보안기업 대표이사, 블랙잭이라고 유명하잖아요. 미국 나스닥에 상장까지 된 회사에요. 시가총액이 우리 돈으로 백조를 훌쩍 넘는다죠 아마.”
순간 어머니가 소스라쳤다.
“전쟁산업 운운하는 그런 회사란 말이냐?”
“네? 병역의 의무인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에게 가장 적절하고 최적의 시장이라며 언젠가 대통령까지 나서서 극찬을 하더군요. 특히 특수부대 출신들은 군에서 배운 뛰어난 실력을 그대로
썩히거나 극히 일부는 범죄에 악용하고 했는데 그들에게 엄청난 희망을 주었다고 말이죠. 방송에서 몇 번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했지만 일체 협조하지 않아서 불발로 끝았어요.”
그리고 다시 명함을 보며 고개를 젖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설미주는 눈을 좁혀 대표 권총수란 이름을 중얼 거렸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크리스탈 호텔2층 커피숍으로 권총수가 들어섰다.
권총수가 들어서자마자 누군가 말했다.
“여깁니다.”
권총수가 고개를 돌렸는데 최형식이 창가에 앉아 손짓을 했다.
권총수는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최형식은 정장을 한 낯선 사내와 앉아 있다.
‘닮았군’
권총수는 사내가 이재백과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이재백에게는 위로 형이 한 명 있다고 들었다.
“저희 그룹 부회장님 이십니다.”
최형식이 사내를 소개했는데 예상대로 이재백의 형 이재천이었다.
그의 직함은 칠성그룹 부회장이다.
아버지를 이어 넘버2인 셈이다.
“커피 하시죠?”
“예!”
최형식이 여종업원을 불러 커피 한 잔을 시켰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궁금하시죠? 별것 아닙니다. 부회장님께서 얼굴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셔서.”
이재천이 권총수를 한참 살피더니 불쑥 물었다.
“얼마 받고 싶소. 어제 밤 일 완전히 입을 다무는 조건입니다.”
권총수의 시선이 이재천에게 향했다.
그러더니 빙긋 웃으며 상체를 의자 등에 붙였다.
“얼마 주고 싶으시죠?”
“그쪽에서 받고 싶은 액수를 말해야 할 것 아닙니까? 일억, 아니 이억?”
그때 갑자기 커피숍 입구에 오민철이 들어섰다.
그 역시 정장 차림이었는데 실내를 두리번거리다 권총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대표님, 조금전 이 변호사가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그래요. 앉으세요.”
오민철이 권총수 옆으로 앉는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민철이 명함을 꺼내 주었다.
명함을 받은 최형식이 멈칫했다.
그러더니 다시 한 번 오민철을 보더니 시선이 권총수에게로 향한다.
“블랙 잭이라면, 혹시 그 곳?”
“어딜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회사는 보안기업이죠. 전쟁용병회사 블랙잭 말입니다.”
오민철이 당당하게 말했다.
“웁!”
이재천이 커피를 마시다 엎질렀다.
입가에 커피를 묻힌 채로 오민철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시죠. 이분께서는 민간군사기업 블랙잭의 권총수 대표입니다만?”
여종업원이 권총수 앞에 커피를 놓고 돌아갔다.
말하는 사람이 없다.
갑자기 벙어리가 된 듯 모두가 입을 다문다.
한쪽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반면 다른 한 쪽은 당황하여 입을 다문 것이다.
변호사 답게 분위기 반전 재주가 좋은 최형식이지만 그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블랙잭 기업이 어떤 곳이고 그곳의 대표 권총수가 누군지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다.
“저...정말이십니까?”
최형식이 더듬거렸다.
언론에 기사는 자주 실렸으나 한 번도 권총수의 얼굴이 제대로 실린 적은 없었다.
사진이 실려도 먼거리에 서 있거나, 아니면 머리에 캐피야 또는 터번을 쓰고 있는 모습뿐이었기에 우리 시선에는 재빠른 구별이 되지 않는다.
즉 인상착의가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사진을 함부로 게재했다간 곧바로 고발당한다.
몇몇 신문사가 초상권 침해에 해당하는 사진을 게재하여 호되게 당하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피해자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이더군요. 아무튼 난 어제 밤 사건의 목격자이며 도움을 준 시민으로서 경찰에 고발조치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회사의 고문 변호사가 지금쯤
피해자와 앞으로의 일처리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최형식도 이재백의 형 이재천도 아무런 말이 없다.
아직은 백 퍼센트 권총수라는 사실을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짜라는 시선은 전혀 담고 있지 않았다.
“피해자에 대한 금전적 배상은 당연하죠. 또한 법적 처벌도 받아야 하고, 어제 밤 부회장님의 동생분은 마약을 했어요. 당장이라도 모발이나 소변검사를 한다면 필로폰 양성 반응이 나올
것입니다.”
“으흠!”
이재천이 이를 악문다.
이미 최형식으로부터 마약 사실은 귀띔 받았다.
경찰에서는 마약 검사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사건이 되어 이재천이 또 마약을 했다는 뉴스가 나온다면 여론은 두 번 다시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기울 것이다.
더욱이 여자를 납치해 폭행을 했다는 것까지 알려지면 아무리 좋은 변호 팀을 구성해도 최소 5년형은 피할 수 없다.
“잘 선택하십시오.”
권총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나갔다.
“그럼 전 이만.”
오민철이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이재천과 최형식은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웃음소리도 들리고 동창들인 듯 초등학교 시절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 음성이 귓속을 파고든다.
두 사람은 말이 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스윽!
최형식이 슬그머니 일어나 맞은편 의자에 앉는다.
후룩!
일부러 소리 내어 커피를 마셨다.
말 없는 침묵이 이토록 답답하고 가슴을 짓누를 줄은 몰랐다.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이채천의 입이 열렸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면서 또 다시 소리를 내어 커피를 마셨다.
쭈루루루!
일부러 더욱 소리를 냈다.
마치 졸고 있는 학생에게 헛기침을 하며 깨우는 선생님의 행동 같은 것이다.
“당장 알아보세요.”
“네에?”
“가짜인지 진짜인지.”
“만약 진짜라면?”
파팟!
이재천의 눈이 날카롭게 쏘아본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최형식은 재빨리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