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1화: 남자와 여자(2)
조용했기에 이충문 변호사의 목소리를 다른 두 사람도 똑똑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 사람, 그 분도 아닌 그 친구라는 표현을 썼다.
그건 최형식 변호사에 대한 조금의 존중이나 라이벌 의식 따위는 없다는 의미다.
오히려 아랫사람 대하는 듯한 호칭임에는 틀림 없다.
“여기 우리 회사에서도 2년 정도 근무했습니다. 칠성그룹 이만수 회장 먼 친척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최변호사는 왜 묻습니까?”
“아닙니다. 잘 알겠습니다.”
권총수는 핸드폰을 내렸다.
“누...누구십니까?”
최형식이 알텐데 모르는 듯 묻는다.
권총수는 나직한 소리로 말해주었다.
“이충문 변호사죠. 우리 회사 법무팀장입니다.”
“이 선배가.”
최형식은 깜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실례지만?”
원무과장 우원성이 묻는다.
혀로 입술을 한 번 닦는 것이 긴장해 보인다.
“블랙잭 대표 권총수입니다.”
권총수라는 말에 팍하는 소리가 들렸다.
최형식이 고개를 돌렸는데 막 문을 열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들어서던 직원 정삼오가 컵을 떨어뜨린 것이다.
“피해자 가족과 합의를 하던 말던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경찰의 입을 틀어 막는 일도 난 관심 없습니다. 단지 염려스러운 건 그 친구가 마약을 했더군요.”
관심 없다면서 마약 얘기를 꺼낸다.
그건 아픈 곳만 찌르겠다는 뜻인데 어쨌든 마약이란 말에 최형식의 안색이 굳었다.
“마약에 취해 여자를 때렸다. 그것도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혀놓고, 어떻게 내 입을 막을 생각 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최형식이 더듬거렸다.
어제밤 상황을 보면 싸움만 잘하는 사내로 기억되었다.
헌데 블랙잭이라는 국내 최대 보안기업 대표라는 말에 완전히 기세가 꺾였다.
만나지 못했을 뿐 권총수라는 이름을 모르지 않는다.
천왕과 백서그룹을 이끌던 권씨가문의 몰락에 직접 관여했다는 무수한 추측이 시중에 돌고 있다.
워낙 증거 하나 없는 일이었기에 살인이 아닌 사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정도였다.
‘이런 우라질’
최형식은 속으로 절망의 신음을 터뜨렸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말하지만 난 제3자입니다.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죠. 단지 어떻게 일의 처리가 되는지 지켜볼 권한은 있습니다.”
그러면서 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 최형식이 신경질적으로 뱉어냈다.
“완전 개 좆됐다”
최형식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권총수는 복도를 걸어 다시 원무과 앞으로 걸어갔다.
“그 환자 입원실 좀 알 수 있을까요?”
30여분 전에 자신이 말을 걸었던 여직원이다.
“그 환자는 현재 면회 금지 대상입니다.”
“전염병 환자입니까? 누가 막았죠?”
그때 엎어버린 커피를 대걸레로 닦고 들어온 정삼오가 권총수를 발견하고 급히 다가왔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정삼오가 재빨리 나오더니 엘리베이터쪽을 가리켰다.
자신이 앞서가 버튼을 눌러놓고 기다렸다.
엘리베이터는 지하에서 올라왔고 일 층에서 많은 사람들을 쏟아 냈다.
엘리베이터를 가득 채우다 시피 했던 사람들이 내리고 단 두 명의 노부부만 남았다.
노부부의 얼굴에 수심이 보인다.
하긴 병원에 온 사람의 얼굴 표정이 즐거울 리는 없다.
정삼오가 층을 누르려다 이미 눌러진 것을 발견하고 흘긋 부부를 바라보았다.
7층은 특실이다.
올라가는 동안 누구도 말하지 않았고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모두 내린다.
부부는 권총수와 정삼오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왔다.
정삼오는 끝에서 세 번째 방에서 걸음을 세웠는데 707호라는 글씨가 보인다.
‘가족이외의 면회 불가’
라는 팻말이 손잡이에 걸려 있다.
정삼오는 벽에 있는 인터폰을 눌렀다.
그러자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 한 명이 얼굴을 드러냈다.
“대리님!”
간호사는 정삼오를 보며 아는 체를 했다.
“고생 많아요. 차주희씨.”
그러면서 등 뒤에 서 있는 부부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이방 환자와는?”
“부모님 됩니다.”
노 신사가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모라는 말에 권총수는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칠십 가량 되어 보였는데 부부의 차림새는 단정했고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의 목에 십자가 목걸이가 있다.
권총수는 부부가 설미주의 양부모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때 정삼오가 차주희라는 여자를 향해 눈짓을 했다.
원무과에 알아보라는 신호인 듯 차주희는 안으로 사라졌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 원무과 정삼오 대리라고 합니다.”
“그래요!”
부부는 공손히 허리를 굽혀 예를 취한다.
무슨 일인지 알지도 못한 채 입원했다는 경찰의 전화 한 통을 받고 부랴부랴 달려왔다.
물론 밤새 전화를 해도 설미주가 받지 않아 무척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경찰로부터 그런 전화를 받았다면 당황하고 놀라면서 냉정해지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차분하다.
그건 두 사람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것이었다.
얼핏 양부의 직업이 교수라는 말은 들었다.
“면회 된대요.”
그제서야 정삼오는 문을 활짝 열고 노부부를 안으로 안내했다.
걸음의 속도가 빨라진다.
그리고 잠시후 어머니의 비명이 들렸다.
“맙소사. 이게 도대체.”
말을 잇지 못한다.
“오오! 하느님! 우리 빅토리아가 어찌된 일입니까?”
권총수는 천천히 들어갔다.
안쪽 침대에 설미주로 보이는 환자복 차림의 여자가 등을 돌리고 누워 있고 부모님들은 목을 빼며 숨겨벼린 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보여주지 않으려는 설미주와 보려는 부모들 사이에 잠시 신경전이 벌어졌다.
“미주야 아빠도 오셨어. 아빠까지도 모른 체 할거니.”
설미주는 등을 돌리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원무과장과 최형식이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최형식은 단번에 설미주 부모에게 굽신거리며 명함을 건넸다.
“최형식입니다.”
설미주 아버지는 명함에 적힌 칠성그룹 법무팀장 최형식이라는 글씨를 보며 표정이 싸늘해졌다.
“가해자가 칠성그룹 쪽과 관계가 있나보군요?”
“경찰에서 말 안 해주던가요? 맞습니다.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최선을 다해 피해자를 위로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금전적인 보상은 물론.”
“최 변호사라고 했소? 부모님들이 면회하는데 잠시 비켜서는 것이 우선 아니오? 그런 말은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잖습니까? 꼭 피해자가 있는 병실에서 꺼내야 합니까? 제대로 된
변호사라면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피해자 부모를 위로하는 것이 순서죠.”
움찔!
최형식이 놀란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조금 서둘렀습니다. 워낙 미안하다보니.”
원무과장 우원성이 최형식을 데리고 병실에서 나갔다.
아버지 설치수가 고개를 돌렸다.
처음부터 권총수가 누군지, 왜 자신의 딸이 입원해 있는 병실을 찾아왔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건 권총수의 한마디에 대기업의 법무팀장과 대학병원 원무과장이 두말 않고 물러갔다는 것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 권총수라고 합니다.”
멈칫!
등을 돌리고 누워 있던 설미주의 몸이 파동을 일으켰다.
“어제밤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알 수 없지만 우연히 미주가 납치되는 걸 저희 회사 이사님께서 발견하고 사건현장을 찾아 갈 수가 있었습니다”
홱!
설미주가 돌아누웠다.
“엇!”
“오오! 성모님!”
서로가 놀란다.
부모들은 붓고 터진 얼굴 상처에 놀랐고 설미주는 권총수를 발견하고 입을 쩌억 벌렸다.
“권총수, 바...바오로?”
피식!
권총수가 웃는다.
“몰랐다. 넌 줄 알았다면 내가 가만 놔두지 않았을텐데.”
“세상에!”
설미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그녀의 가슴속에는 언젠가부터 한 남자가 있었다.
말썽꾸러기였고 싸가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아이였다.
여자 아이들은 물론이고 남자들까지도 그 아이라고 하면 치를 떨었다.
걸핏하면 두들겨 패고 빼앗고 때린다.
그런 가운데 보육원을 떠났고 그렇게 그 아이는 잊혀졌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대학생이 된 어느 날부터 그 사내를 떠올렸다.
자신을 노리고 접근하는 어떤 사내보다 그는 더 매력적이고 남자다웠기 때문이다.
‘난 싫으면 죽어도 안 해’
입버릇처럼 내뱉던 그의 말이다.
절대 굽히지 않고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않으며 특히 비겁한 남자들은 가만 두지 않았다.
결정적인 건 자신은 보육원 아이들을 심심풀이 하듯 때리면서도 외부 아이들이 간섭하거나 괴롭히면 절대 가만 두지 않았다.
가끔은 권총수를 떠올리는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나란 여자도 특이하군’
말 그대로 보육원은 버려진 고아들의 집합체다.
자신도 버려졌다.
그러나 좋은 부모에게 선택되었고 마음껏 활개치고 세상을 날아 다닐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자신은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국내 제일의 명문대를 졸업했고 MBS라는 공영방송의 미국 특파원이 되어 있었다.
나중 CBS(Columbia Business School)를 졸업하고 이번에는 KBC로 스카웃 되어 중요 핵심프로그램의 진행자를 맡았다.
그런데도 기이한 일은 지금도 권총수라는 사내를 떠올린다는 것이었다.
“아빠 몰라요? 나와 같이 보육원 다녔던 친구 말이에요. 말썽 무지하게 피운다고 원장 수녀님이 말씀하시던.”
순간 설치수의 눈이 커졌다.
자신과 설미주 사이에 어떤 간극도 없다.
숨기는 것도 없고,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는 일도 없다.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기에 조금이라도 감추거나 덮게 되면 서로간의 신뢰는 깨진다.
한번 깨진 신뢰, 그것도 친부모가 아니라 양부모라면 돌이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걸 오픈하고 대문을 활짝 열어놔야 한다.
어느 부모는 신분세탁을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보육원을 찾아가지도 못하게 하고, 시설 출신 친구들을 만나는 걸 강하게 반대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자신은 절대 아니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육원이 생긴이래 그렇게 심한 말썽꾸러기는 처음이라는 원장 수녀님의 얘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미주 아빠
설치수입니다. 이쪽은 집사람입니다.”
“안녕하세요.”
설미주의 어머니 정민희가 고개를 숙였다.
권총수를 바라보는 정민희 얼굴이 환했다.
분명 병실로 들어설 때만 해도 어두웠고 엉망이 된 설미주의 얼굴을 보고서는 눈물까지 보였다.
그런데 지금 딸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림자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우리 차 펑크 낸 아이 맞군요?”
흠칫!
권총수는 깜짝 놀랐다.
보육원 앞마당에 주차된 승용차 앞 바퀴에 턱을 받치듯 나사못 두 개를 몰래 끼워 놓았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기 때문에 펑크가 났는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와서 펑크 난 얘길 하는 걸 보면 보육원을 떠나고 얼마가지 못해 펑크가 난 것을 알아 차린 모양이다.
“펑크 수리 아저씨가 그랬어요. 누군가 일부로 나사못을 세워 놓은 것 같다고, 그렇지 않으면 두 개가 나란히 박힐 리가 없다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