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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640화 (640/651)

제640화: 남자와 여자(1)

하지만 이재백의 설미주에 대한 집착은 갈수록 강해졌고 심지어 집으로 찾아오는 일까지 발생했다.

결국 이재백으로 인해 설미주는 이사까지 자주 다녀야 하는 고충을 겪었고 급기야 법원에 접근금지 신청을 냈다.

하지만 칠성그룹이라는 막강한 배경은 결코 이재백의 접근을 막아주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같은 사고가 일어나고 만 것이다.

“뭐 하는 사람들입니까? 그들이 누군지 일단 알아야 어떤 조치가 들어가는데?”

“알면 내가 가만 놔두겠어.”

“약 했습니까?”

“무슨 약을 해?”

이재백이 버럭 소릴 질렀다.

바닥에 떨어진 주사기가 있다.

낯익은 주사기다.

“119 입을 통해 기자들이 올 수도 있으니 일단 여긴 나가죠.”

마약을 했으니 몸속의 피부터 세척할 필요가 있다.

물론 피를 세척하는 뚜렷한 방법은 없다.

마약은 오로지 시간이다.

보통 일주일에서 열흘이면 몸속에서 제거가 되는데 검사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소변 같은 경우는 소멸 시간이 빠르지만 체모 검사는 길게는 일 년까지도 반응이 나타난다.

모근에 필로폰 성분이 굳어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사태의 추이를 봐가면서 최악의 경우 외국의 공사현장으로 발령을 내는 출국 도피 방법이 있는데 여태 몇 번 시도했고 성공했다.

최형식은 만약을 대비해 이재백을 외국으로 보낼 준비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아침 산행을 했다.

북한산에 올라 내려다보는 서울은 밤새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폭설이다.

권총수가 올라왔지만 눈 위에는 아무런 발자국도 남아 있지 않다.

이름하여 답설무흔(踏雪無痕)이다.

많은 눈으로 인해 아침 등산객이 없어서 망정이지 누군가 봤다면 소스라쳤을 것이다.

봉우리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운기조식이 깊어지면서 주위 눈들이 녹으면서 사라진다.

극양의 심법은 운기중 적지 않은 열기가 발생하는데 눈에 덮여 있던 바위는 금세 깨끗하게 제 몸을 드러냈다.

“흐흠!”

눈을 뜨고 길게 숨을 내 쉰다.

구름이 낀 탓인지 아직 해는 보이지 않았고 자욱한 매연이 서울 하늘을 덮고 있다.

사아아!

다시 내려온다.

이번에도 여전히 발자국은 남지 않는다.

지이잉!

바위에서 일어나 내려오려는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오민철이다.

“어 형!”

“일어났냐?”

“산이야.”

“와우! 병원에 좀 가봐야겠다.”

“내가 왜?”

“어제 너무 늦어서 너에게 전화를 못했는데 나보다는 대표께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일이야?”

“비극이냐 희극이냐? 얼마전에 네가 말했지. 같은 보육원 출신 중 방송국 아나운서로 있는 여자가 있다고.”

파팟!

권총수 눈이 빛난다.

“어제밤 그 여자가 설미주였어. 너무 얻어 맞아 가지고 얼굴을 알아 보지 못했을 뿐.”

“진짜?”

휘이이이!

권총수는 이미 몸을 날고 있었다.

“무슨 바람 소리가 이렇게 세. 너 설마 신법 펼치며 전화 받냐?”

“말해.”

“어제 환자 보호자로 내가 등록했는데 사건이 경찰에 접수되어 우릴 찾나봐. 나보다는 네가 가보는게 낫지 않겠냐?”

“알았어.”

권총수는 어느새 대문 앞에 날아내렸다.

집에 도착한 권총수는 곧바로 샤워장으로 들어가 차가운 물로 몸을 씻었다.

빠르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또한 쫓기는 사람처럼 순식간에 샤워를 끝내고 넥타이까지 멨다.

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한번 살핀 뒤 옷장에 걸린 양복들을 가슴에 대어본다.

처음이다.

이렇게 가슴이 뛰고 이상한 느낌은 말이다.

태어나 지금까지 여자에게 어떤 감정을 가져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의 반응에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미주라고, 그 여자가’

다행이다.

만약 그 자리에서 설미주라는 걸 알았다면 이재백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진한 블루 색상의 정장을 걸쳤다.

대문 앞에 세워진 벤츠 S클래스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한편 KBC보도국장 차영종은 웃음을 지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칠성그룹 법무팀장 최형식이었다.

두 사람은 간단한 인사를 주고 받은 뒤 최형식이 입을 열었다.

“설미주 아나운서국 차장있죠?”

“설차창은 왜 찾으십니까?”

“글쎄! 으음!”

최형식은 잠시 말을 끊더니 침을 삼켰다.

“사실은 어제밤.”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얘기를 듣고 난 차영종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설미주씨에게 무슨 연락받은 것 없습니까?”

“전혀.”

“금전적 배상은 물론 최소한 다섯 개 이상의 프로그램을 우리가 협찬하겠습니다.”

협찬이라는 말에 차영종의 눈이 커졌다.

“아이구 그렇게까지.”

“전혀 섭섭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 차장의 입만 단속해달라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부상이 완쾌되려면 적어도 보름 이상은 걸릴 겁니다.”

“걱정 마세요. 설차장은 내가 알아서 말썽 없이 처리할테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아니면 내일 저녁에 술 한 잔 하죠.”

“저는 무조건 환영입니다. 결코 술을 거절하지 않죠. 오늘도 좋고 내일 좋습니다.”

“오케이. 오늘 어군에서 뵙죠.”

“감사합니다. 설 차장 문제는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아무 일도 아니니까.”

차영종은 전화를 끊고 나서 만족스런 표정을 했다.

다섯 개 이상의 프로그램을 협찬하는 건 금전적으로 엄청난 액수를 지원하겠다는 뜻이다.

이 또한 진급에 결정적인 자신의 능력으로 상부에 보고될 것이다.

이거야말로 더 없는 기회이다.

남은 건 설미주이지만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다.

비록 콧대 높고 한성질 하는 여자지만 자신이 누르는데 어쩔 것인가.

방송계를 떠나지 않는 이상 자신의 비위를 함부로 거슬리지는 못할 것이다.

“조부장 잠깐 건너 오세요.”

전화를 걸어 아나운서실 부장 조민준을 불렀다.

창가에 선 차영종은 하얗게 덮인 여의도의 눈을 보며 중얼 거렸다.

“좋은 일이야. 내겐 서설(瑞雪)이군.”

만족스런 표정을 지을 때 문이 열리며 마흔 초반 가량의 사내가 들어섰다.

아나운서실 책임자인 조민준 부장이다.

“부르셨습니까?”

“조부장 설 차장 앞으로 보름간 휴갑니다. 그렇게 아세요.”

“네? 갑자기 무슨 휴가? 아무 말도 없었는데요.”

“오늘 출근 안했죠?”

“아직 시간이 있으니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무슨 일이랍니까?”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요.”

조민준은 차영종을 살폈다.

영악하고 계산이 빠른 사람이다.

뭔가 있음을 직감했으나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대답해 줄 리도 없다.

“알겠습니다.”

조민준이 돌아나가고 혼자 남은 차영종은 소파에 주저 앉으며 흡족한 얼굴을 했다.

검정색 벤츠 한 대가 병원 지하 주차장에 멈췄다.

권총수는 엘리베이터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병원직원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는데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게 정말이야?”

“어제 당직 팀장인 보안과 김이준씨로부터 전화가 왔어. KBC설미주 아나운서가 얼굴이 떡이 되어가지고 119에 실려왔다고.”

“때린 놈이 누구야? 그 여자가 심심해 자기 얼굴을 두들기지는 않았을 테고.”

약간 마른 체형의 사내가 히죽 웃는다.

“119에서 경찰로 기록을 넘겼다고 하니까 곧 밝혀지겠지.”

작달막한 체구의 남자가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오늘 또 한 번 시끌벅적 하겠군.”

마른 체형의 사내가 동승한 권총수를 흘끗 보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엘리베이터는 지하 3층에서 멈춰 두 명을 더 태우고 1층에 섰다.

권총수는 사내들과 같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아직 근무시간이 아닌데도 원무과 앞에는 많은 외래 환자들이 몰려 있었다.

권총수는 원무과 앞으로 걸어갔는데 여자 직원 한 명만이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고 나머지 자리는 텅 비었다.

출근을 했을 것이나 아직 근무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선가 모여 잡담을 하거나 커피를 마실 것이다.

“어제 밤 119에 실려 온 환자 보호자입니다. 경찰에서 보호자를 불렀다고 들었습니다.”

여자는 유리 너머로 권총수를 보더니 이마를 약간 찡그렸다.

아직 일과가 시작되지 않았다는 의미인 듯 보인다.

“아직 업무 시간이 아닙니다. 십 분만 기다리세요.”

권총수는 아무 말도 않고 돌아서서 병원 현관 밖으로 나갔다.

눈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벗어 손에 들고 있던 코트를 다시 입고서 한쪽에 있는 산책로를 걸었다.

전혀 몰랐다.

그토록 두들겨 맞고 변태적인 가학행위에 시달리던 여자가 설미주 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룸에 들어섰을 때 이미 그녀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만큼 부어 있었고 더욱이 긴 머리가 얼굴을 가리고 있어 확인이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때 한 사내가 바쁘게 걸어왔다.

“저기 어제 밤 다쳐 들어온 설미주씨 보호자 되십니까?”

권총수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가시죠. 저희 과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권총수는 직원을 따라갔다.

직원은 원무과로 들어가지 않고 응급실 복도로 걸어가더니 아무런 간판도 붙어 있지 않는 문을 열었다.

“들어 오십시오.”

권총수는 안으로 들어섰는데 두 명의 사내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 잔을 놓고 앉아 있었다.

“과장님 모셔왔습니다.”

그러자 과장이란 사내가 고개를 돌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흔 중반 정도 보였는데 몇 가닥 없는 머리카락으로 대머리를 덮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원무과장 우원성입니다.”

“우린 어제 밤 보았죠.”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은 칠성그룹 법무팀장 최형식이었다.

“정삼오씨 여기 커피 한 잔만 부탁합니다.”

“예 과장님!”

직원이 밖으로 나갔다.

원무과장이 솔로 석에 앉고 최형식과 권총수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여기 최변호사님에게 대충 얘길 들었습니다. 피해자 설미주씨와는 아무런 관계가 아닌 우연한 기회에 사건 현장을 목격한.”

“맞소!”

“좋습니다. 가족도 아니니까 말하기가 쉽겠군요. 설미주씨 사건은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까 선생님께서 못 본체 해주셨으면 해서 말입니다.”

“못 본체?”

“어려운 일 아니잖습니까? 충분한 사례를 하겠습니다.”

“경찰이 불렀다고 해서 왔습니다만?”

권총수는 이마를 찡그렸다.

그러자 최형식이 입을 열어 말했다.

“경찰 문제는 이미 해결 됐습니다. 설미주씨 부모님과도 만날 예정입니다. 정중하게 사과하고 충분한 배상을 할 것입니다.”

“그래요!”

권총수는 빙긋 웃었다.

한 마디로 아무런 문제 없이 해결되고 있으니 이제 당신만 빠지면 깔끔하게 마무리 된다는 뜻이었다.

“최 변호사라고 했던가요?”

“칠성그룹 법무 팀장입니다.”

법무 팀장이라는 말에 힘을 준다.

“변호사가 아니라 사건 브로커 같습니다.”

순간 최형식의 표정이 굳어진다.

권총수는 핸드폰을 꺼내 단축 번호 한 개를 꾸욱 눌렀다.

신호가 가고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대표님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물어보시죠? 뭡니까?”

“최형식 변호사라고 잘 압니까? 칠성그룹 법무팀장이라는데?”

“그 친구 내 후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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