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9화: 빅토리아(3)
탁자를 지나가 안쪽으로 있는 문을 밀었는데 이번에도 열리지 않는다.
퍼억!
손잡이가 통째 떨어져 나가면서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권총수 눈이 커졌다.
양팔을 위로 벌린 여자 한 명이 천장에서 내려온 줄에 손목이 묶여 있었다.
여자는 브래지어와 팬티만 걸쳤는데 잔인하게 두들겨 맞은 듯 얼굴이 부었고 여기저기 핏자국이 보였다.
조그만 탁자 위에는 술병과 주사기가 놓여 있었다.
사내는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넌 내 자존심을 짓밟았어. 네까짓게 뭔데 나 이재백을 우습게 보냐고 씨발년아.”
여자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얼굴 일부를 가리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다.
“난 최선을 다해 네가 진행하는 프로에 광고를 넣었고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의 협찬을 얻어 내줬어. 그런데 나에게 이럴수 있어?”
사내는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는데 무척 흥분해 보였다.
“더 이상 못 참겠어. 오늘 밤 그동안 투자한 빚을 받아내야겠다.”
스윽!
숙여졌던 여자의 얼굴이 들려졌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여자의 눈이 빛난다.
“부탁이 있어. 나 죽여줄래. 정말이야. 날 죽여줘.”
여자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납치되어 반라의 모습으로 묶여 있다면 거의가 겁을 먹고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한다.
칼을 휘두르는 무사들도 막상 죽음이 면전에 이르면 살고 싶은 본능에 흔들린다.
그런데 여자는 겁을 먹는다거나 하다 못해 목소리도 떨리지 않았다.
“이런 싸가지 없는 년이.”
툭!
사내가 여자의 턱을 쥐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여자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다.
“날 똑똑히 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오늘 밤에 똑똑히 보여주겠어.”
확!
사내는 입술을 대려했다.
뻐억!
여자는 이마로 사내의 얼굴을 받아 버렸다.
“아이고, 이런 죽일 년이 말로 했더니.”
사내는 손으로 입을 스윽 훔쳐보았다.
피다.
이빨이 하나 부러지면서 피가 흘러나왔다.
뻐억!
사내는 권투 선수처럼 여자를 갈겼다.
파르르!
여자는 기타줄처럼 한차례 몸을 떨더니 축 늘어졌다.
기절한 모양이다.
“부부싸움 같지는 않고.”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사내가 빙글 돌아섰다.
사내는 서른 중반 정도 보였는데 눈빛이 매섭다.
그는 권총수를 보며 버럭 소릴 질렀다.
“이건 또 뭐야.”
권총수는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납치해 가던데?”
움찔!
사내가 놀란다.
여자를 납치한 걸 목격하고 뒤쫓아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들어왔다는 건 밖에 있는 자신의 편들이 권총수를 막지 못했다는 뜻이다.
사악!
사내는 탁자 서랍을 열더니 길다란 회칼을 들었다.
“배짱이 대단하군. 어디 뱃속까지 그렇게 단단한지 보자.”
사내는 단번에 달려 나왔다.
권총수 앞에서 잠시 멈칫하는 듯 하더니 그대로 찔러들어온다.
탁!
권총수 왼손이 칼을 쥔 사내의 손목을 잡았다.
사내는 힘을 썼다.
하지만 권총수 힘에 의해 꼼짝을 못했다.
권총수는 입에 담배를 문 채 말했다.
“성질이 지랄 같군.”
툭!
팔목을 조이자 사내는 쥐고 있던 칼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점점 이마를 찡그렸는데 손목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이 왔기 때문이다.
최대한 아픈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 했지만 대신 턱을 떨고 있었다.
이를 악물어도 고통스럽다 보니 턱이 떨리는 것이다.
뚝!
급기야 손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사내는 비명을 질렀다.
“으윽!”
권총수는 그제야 손을 놓았다.
그때 밖에 있던 오민철이 뛰어들어왔다.
“웃기는데 건달 들인가봐.”
“몇 명인데?”
“여섯! 걱정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여기 일 보라고.”
오민철이 신났다는 듯 웃으며 나갔다.
권총수는 탁자 위로 엉덩이를 걸터앉았다.
“뭐 하는 사람이오? 집사람 아닌건 확실해 보이고? 길거리에서 납치해 이곳으로 끌려오는 걸 봤는데?”
사내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손목이 부러져 바늘로 찌르는 듯 쑤신다.
“나 이재백이다.”
사내는 자신의 이름을 자신 있게 깠다.
이름에 자부심이 있는 듯 했다.
권총수 이마가 찌푸려졌다.
“이재백, 내가 아는 이재백은 칠성그룹 이용철 회장 아들인데, 물론 얼굴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이름만 들어봤다는 거고.”
사내, 이재백은 만족스런 표정을 했다.
자신이 누군지 안다는 건 말빨이 먹힐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내 손목을 부러뜨려? 가만 안 둘거야.”
그러더니 핸드폰을 왼손으로 들더니 번호를 눌렀다.
권총수는 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최변호사, 나 팔목이 부러졌소. 당장 좀 오시오. 어디긴 어디야. 엘도라도지.”
전화를 끊는다.
칠성그룹은 국내재계서열 3위다.
친환경 자동차 개발이 대세다.
그중 자동차 밧데리 기술은 향후 모든 산업을 삼킬 듯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밧데리 기술은 중국이 가장 앞서가고 있고 그 뒤를 한국과 일본 미국이 쫓는다.
그런데 중국에 밀리던 전기차 밧데리 분야의 기술을 한 단계 끌어 올린 기업이 칠성화학이다.
그래서 요즘 주가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재백이 비릿하게 웃는다.
사람 잘못 건드렸다는 뜻이다.
그때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오민철이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
“모조리 방안에 처박아 놨어.”
흠칫!
이재백이 놀란다.
필시 이곳 사장이 아는 폭력배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조직폭력배 여섯 명을 한방에 처넣었다는 건 그들 모두를 작살냈다는 뜻이다.
이재백의 표정이 굳는다.
평범한 사내들이 아니다.
하지만 이재백은 금세 얼굴 표정을 회복했다.
재벌기업은 대한민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이고 전지전능하다.
탁!
이재백은 탁자 위에 있는 술병을 들어 입에 대고 마셨다.
발렌타인이라는 영문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씨익!
이재백은 웃는다.
부러진 오른손목을 보며 말했다.
“날 이렇게 했으니 십 년은 살거야.”
징역을 얘기하는 듯 했다.
“헤이, 손목 부러졌다고 십 년이면 여자 납치해 저렇게 때린 놈은 몇 년이냐?”
오민철이 인상을 썼다.
“어휴 이런 싸가지 없는.”
오민철이 다가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이윽고 오민철은 여자를 묶고 있던 줄을 풀었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으면 피떡이잖아. 다른 곳도 아니고 여자 얼굴은 좀 배려하지 이런 개새끼.”
오민철은 여자를 소파 위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찢어진 채 팽개쳐진 옷으로 대충 덮어주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119에 신고를 했다.
“환자입니다. 심한 구타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빨리 오십시오.”
오민철은 자세히 환자 상태를 설명해주고 전화를 끊고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악착같이 증인이 되어서 네놈을 교도소에 보내고 말겠다. 칠성그룹 아들이라고 자랑했지. 오냐 신문에도 실컷 떠들어주마.”
그렇게 두 사람은 119가 오길 기다렸다.
신고자가 현장에 있어야 한다.
만약 자리를 떠나면 이재백의 성품상 여자에게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
이재백은 심심찮게 신문에 오르내린다.
칠성그룹 둘째 아들로 언젠가 연예인들과 마약파티를 벌였다는 뉴스가 떠오른다.
그것뿐만 아니라 논현동에서는 햄버거 집 여종업원의 뺨을 때려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그때마다 회사관계자가 기자들 앞에 고개를 숙이고 사죄를 했다.
흘긋!
이재백은 핸드폰 시계를 보았다.
변호사를 불렀지만 그건 한 가지 은밀한 신호였다.
팔목이 부러졌다는 건 얻어맞았다는 뜻이며 사람들을 데리고 오라는 뜻이다.
칠성 에스원이라는 보안 방범 서비스 계열사가 있다.
그곳에 근무하는 일부 직원들은 특수부대 출신들이거나 무술 유단자들이다.
그들이 자주 이재백이 저지른 뒷처리를 하곤 했다.
그들만 오면 만사 오케이다.
119 입을 막는 일은 간단하다.
“빨리도 오는군.”
권총수는 중얼거렸는데 계단을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시끄럽다.
필시 최변호사라는 이가 칠성 에스원 직원들부터 출동을 시켰을 것이다.
야간 근무자들이 몰려오는 것이 분명했다.
“갔다오지.”
오민철은 씨익 웃으며 사라졌다.
오늘 밤 신이 난 얼굴이다.
예상대로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오민철이 이번에도 다른 룸에 모조리 패대기쳐 가둬 버린 것이다.
“119입니다. 신고하신 분?”
119 대원 셋이 들어섰다.
그들은 소파에 누워 있는 여자를 발견하고 곧장 여기저기를 살핀다.
“맙소사!”
피투성이가 되어 부은 얼굴을 바라보며 재빨리 들것으로 옮겨갔다.
“보호자분 ?”
오민철이 멈칫했다.
“형이 좀 따라가.”
“오케이!”
오민철이 119를 따라 사라졌다.
이재백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여유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누가 그랬지. 폭력은 폭력에 쉽게 흔들린다고.”
현재 기분이 어떠냐?
네가 믿고 있는 이곳 조폭들도, 에스원 직원들도 모조리 깨졌는데 할 말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때 오십초반 가량의 사내가 급히 들어섰다.
한 눈에 이재백이 전화로 불렀던 최형식 변호사라는 걸 알아차렸다.
“실장님!”
최형식은 재빨리 다가가 몸을 살폈다.
“아얏!”
오른 손목을 만지자 이재백이 비명을 질렀다.
“이것 어떻게 된 것입니까? 빨리 병원부터 가시죠.”
그리고 권총수를 돌아보았다.
“당신 이분이 누군지 아시오. 게임 끝났소. 교도소 갈 생각이나 하시오.”
권총수는 가볍게 웃었다.
“언제든지 연락하시죠.”
권총수는 경찰이 부르면 달려가겠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짓고 사라졌다.
권총수가 떠나고 모든 설명을 들은 최형식은 소스라쳤다.
“전부 사실입니까?”
“그렇다니까 씨발! 그 개새끼가 나타나서 좆 된거야.”
최형식의 눈이 떨린다.
굉장한 사고이다.
더욱이 상대가 KBC에서 토크쇼와 시사 진행자로 유명한 설미주라는 말에 앞이 캄캄했다.
‘이런!’
방송국 입은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여자가 결코 호락호락 하지 않다.
똑똑하기도 하지만 결코 부당하거나 불의한 일 앞에서 고개 돌리는 물렁한 여자는 아니다.
그녀의 성격이 까칠하다는 건 이미 방송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적지 않은 남자들이 대시를 했지만 누구도 그녀의 콧대를 꺾지 못했다.
가끔 연예계 기자들로부터 결혼 언제 하느냐는 질문이 나오면 그녀가 입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어야 하는거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남자가 없다는 뜻이다.
설미주와 이재백은 대학 동창이다.
설미주의 미모는 이미 고등학교시절부터 유명했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많은 남학생들이 주위를 얼씬거렸다.
설미주를 무너뜨리기 위해 덤비는 남자들의 무기도 화려하다 못해 찬란했다.
그중 가장 많은 무기가 부모의 배경이었다.
기업을 운영하거나, 또는 현역 정치인이기도 하며 어떤 이는 강남에서 내로라 하는 대형교회 목사를 아버지로 둔 이도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유명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까지 뛰어들었다.
그중 한 명이 이재백이다.
대학때부터 그녀를 쫓아다녔고 직장생활을 하다 사표를 내고 유학을 떠나자 미국까지 뒤따랐다.
칠성그룹 뉴욕지사에 근무하면서 그녀를 쫓아 다녔지만 청혼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재백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건 사랑이 아닌 집착이었고 스토킹이었다.
설미주는 처음 몇 번은 최대한 부드러운 말로 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