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5화: 적색인물(1)
6시에 출발하는 인천행 상하이 항공 498편의 승객들은 탑승 수속을 하라는 것이었다.
커어!
오민철은 마지막 커피를 마시는데 마치 독한 소주 한 잔을 비운 소리를 냈다.
“공격 앞으로.”
오민철은 어금니를 질끈 물었다.
예상대로 출국 수속을 밟는 입구에 무장한 공안들과 사복차림의 국가 안전부 요원들이 떼를 지어 서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방아쇠를 당길 듯 공안원들이 들고 있는 QTS-11의 총구가 심사대를 향했고 국가 안전부 요원들도 차고 있는 권총에 오른손을 얹고 있다.
자세를 보면 권총수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빠르다’
권총수에 대한 정보에서 가장 이목을 끄는 내용이었다.
뭐든지 빠르다고 했다.
몸도 빠르고, 주먹도 빠르며 잠깐 방심하는 순간 이미 게임은 끝난다는 것이다.
“멕도웰씨?”
권총수의 여권을 보며 직원이 묻는다.
직원은 금테 안경을 끼었는데 권총수를 금방이라도 잡아 먹을 듯 노려 보았다.
“무슨 일로 중국을 오셨죠?”
“관광입니다.”
“나이가?”
“마흔다섯이오.”
변장을 하다보면 가끔 실수가 나온다.
워낙 긴장하기 때문인데 부지불식간에 여권에 기록된 내용과 다른 본래의 나이를 말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권총수는 사선을 밥 먹듯 넘나들었다.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 것이다.
권총수는 빙긋 웃었다.
직원은 쥐고 있던 여권을 건네주었다.
바로 뒤에 오민철이다.
권총수는 천천히 걸어가면서도 모든 감각은 주위 공안들과 국가안전부 요원들을 살피고 있었다.
오민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는 어쩔수 없이 출국장은 시산혈해가 되고 말 것이었다.
“럼스펠드?”
“예!”
오민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으로 가지 않고 인천으로 가는 이유가 뭐요?”
“선생, 나의 사적 일까지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필요해서 오늘은 물어 보는 것입니다.”
“대학시절 한국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를 만나기로 했소.”
“한국 친구?”
“태양그룹에 근무하는 친구인데 컬럼비아 대학 동창이기도 하죠.”
“이상하군!”
순간 앞서 걷던 권총수의 걸음이 멈추었다.
물론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양손 열 개의 손가락에 잔뜩 내공이 들어간다.
“이 비행기에 탑승하는 승객중 미국인은 저기 앞서가는 분과 럼스펠드씨 딱 두 명이오. 둘 모두 미국이 아닌 한국으로 간다는 것이오.”
들켰다.
권총수는 망설이지 않았다.
번개처럼 돌아서며 양손을 쭈욱 뻗었다.
쉭!
쉬이이익!
열 손가락에서 소림의 탄지신통이 뻗어 나갔다.
지풍은 빨랐고 총구까지 겨누고 있었지만 공안들중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마혈과 아혈이 동시에 제압된 무장요원들 모두 그대로 서 있다.
다만 눈은 흔들리고 있었는데 당황하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오민철을 향해 꼬치꼬치 캐묻던 직원이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금방이라도 체포할 것처럼 추궁하던 사내가 공손히 여권을 건네주며 미소까지 짓는다.
권총수가 기억력을 관장하는 뒤통수에 있는 강문혈(强門穴)을 눌러 버렸다.
직원 사내는 순간적으로 오늘 하루 있었던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
결국 평소처럼 친절하게 떠나는 사람들을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출국 수속을 밟은 다른 탑승객들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왜냐하면 공안원이고 안전부 요원이고 모두 자연스러운 상태 그대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두가 떠났고 권총수와 오민철은 비행기에 올랐다.
트랩이 치워지고 비행기는 활주로에 진입하더니 깜빡거리는 유도등을 따라 달리더니 어둠속으로 이륙했다.
한편 비행기가 떠나고 채 3분도 지나지 않아 승용차 한 대가 들이닥쳤다.
청사 입구에 멈춘 차에서 내린 사람은 리콴총과 오우동이었다.
공항 청사 입구를 지키고 있던 공안원들이 거수 경례를 했다.
“상황이 어떤가?”
“조금 전 비행기는 이륙했습니다.”
“이륙?”
놀라는 표정을 하며 두 사람은 출국 수속대를 향해 뛰어갔다.
헉헉거리고 도착한 두 사람이 조용한 모습의 관계직원을 향해 물었다.
“수상한 미국인들은 어딨나?”
“예약된 탑승객에서 한 명도 빠짐없이 떠났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초류산 팀장.”
권총을 차고 서 있는 쉰 가량의 정장 사내를 불렀다.
연변공항 경비대장 초류산 팀장이다.
초류산은 말이 없다.
꿈틀!
자신의 질문에 대답이 없자 리콴총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잖소? 그 미국인 두 명 어딨소?”
하지만 이번에도 초류산은 말하지 않았다.
불끈!
리콴총의 이마 주름살이 튕기듯 파동을 일으켰다.
“초 팀장 내 말이 안들리오?”
“지부장님 잠깐.”
뭔가 이상함을 간파한 듯 오우동이 수속대를 지나쳐 안쪽에 서 있는 초류산에게 다가갔다.
“이런!”
“뭔가?”
“설마?”
오우동이 초류산의 팔을 잡아 당겼다.
휘청!
하더니 그대로 넘어졌다.
오우동이 놀라며 부축하려 했지만 덩치도 큰 데다 예상 못한 일이었기에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주르륵!
피가 흘러내린다.
그만큼 세게 찧었는데도 신음소리 하나 없다.
“도대체!”
리콴총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다가와 무장 공안원들을 건드렸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고 침묵이다.
‘이게 뭐지?’
모두 열여덟 명이 석고상이 되어 버렸다.
눈은 움직이지만 말도 못하고 몸은 굳어버렸다.
“그...그말이 사실이라니.”
“무슨 말?”
리콴총이 오우동을 향해 물었다.
“사막의 흑새에게 사람을 꼼짝못하게 하는 마법이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사실이란 말인가?”
“보십시오.”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리콴총은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만지면서 말을 시켰다.
“어디 아픈가?”
“말할 수 있나?”
질문은 이어졌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단지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이 자신의 말은 알아 듣는 것 같다.
“지부장님 그것 아닐까요. 혈도 제압?”
리콴총은 이마를 찡그렸다.
소림사 무승들의 말을 빌리면 인체에는 삼백예순다섯개의 혈도가 있고 사지를 마비시키는 혈도인 마혈이 존재한다고 했다.
달마대사가 남긴 칠십이 역근세수경이 있는데 그중 상당 부분이 내려오며 소실되고 사라졌다.
거기에 보면 분명 마혈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신체 어느 부위가 마혈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있다고는 정확하게 내려 오는 마혈(魔穴)이란 혈도.
그 혈도를 제압하면 움직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말을 할 수 없도록 혀를 통제하는 아혈도 있으나 역시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고 했다.
결국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못한다는 건 권총수로 의심되는 인물에게 두 곳이 점혈되었다는 뜻이다.
제압된 혈도를 해혈하는 건 현대 의학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점혈한 사람만이 풀 수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도 있다.
점혈자가 직접 해혈하는 방법과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풀리는 두 가지였다.
아직까지 움직이지 못하는 걸 보면 어떤 점혈을 가했는지 속단할 수는 없다.
현대 의학으로 무리하여 해혈하려 들었다간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할 만큼 큰 부상을 입는다.
‘이것이 지금 현실인가’
리콴총은 할 말을 잃었다.
리콴총은 털썩 빈 의자에 주저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금연지역이지만 누구도 그의 흡연을 막거나 얘길 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담배 한 개비 피우고 싶을 만큼 답답할 것이다.
더구나 그는 권총수 추적의 최종 책임자다
담배를 절반쯤 피우던 리콴총이 말했다.
“보고서는 내가 직접 써서 올리겠네.”
오우동을 바라본다.
보고서를 자신이 직접 쓰겠다는 건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는 의미다.
절대 아랫사람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게 하겠다는 말에 귀는 열렸으므로 제압된 사람들까지 역시 하는 눈빛이다.
“어엇!”
그때 비명이 흘러나왔다.
아혈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우아!”
“어흐 말이 나온다.”
“몸도 풀렸어.”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자칫 스무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학살에 가까울 만큼 사람을 죽이고 사냥감이 유유히 사라졌다는 걸 상부에서 알면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놓치긴 했지만 인명피해가 없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권총수’
리콴총은 이를 악물었다.
‘세월이 어디 오늘 뿐이던가’
리콴총은 표정을 풀며 일어섰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고 했거늘’
리콴총은 병력을 철수시켰다.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들어서는 사람들 속에 권총수와 오민철이 보였다.
들어서자마자 권총수는 본래의 얼굴로 돌아갔지만 오민철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의 분장수준이었으므로 얼굴을 씻고 수염도 떼어내며 할 일이 많았다.
그 사이 권총수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권대표.”
놀란 듯 수화기 밖으로까지 목소리가 들려나왔다.
채명천 이사다.
오늘 귀국한다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인천에 도착했다는 말에 깜짝 놀란다.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잠깐 얼굴 좀 볼 수 있을까 해서요.”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나가겠습니다.”
“이곳으로 올 것 없고 사무실 근처에서 봅시다.”
권총수는 전화를 끊었다.
그때 오민철이 원래의 얼굴을 한 모습으로 걸어왔다.
“아 시원해. 분장 그것 아무나 하는 것 아닐세. 잠깐 몇시간 했다고 얼굴이 후끈거린다니까?”
“그래서 연예인들 분장하면 피부 트러블 생긴다는 말 있잖아.”
두 사람은 청사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총수야, 너 고민 있냐? 비행기 내내 표정이 굳었던데?”
“없어.”
“임마, 귀신을 속여. 이 엉아 눈치가 얼마나 빠른줄 아냐.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버려.”
피식!
권총수가 웃음을 짓자 오민철이 눈을 크게 떴다.
“너 지금 이 엉아 비웃었지?”
“그만해.”
권총수의 말투에 힘이 있다.
오민철이 장난스런 표정을 거두었다.
“우리 사이에 비밀 없기로 했잖아. 뭔데?”
“칠보호텔 사건 말이야.”
턱!
오민철이 걸음을 세웠다.
“맞아. 나도 그 생각 했어. 어떻게 우리가 그 호텔에 묵고 있다는 걸 알았을까? 조식만 사장에게도 말해 주지 않았잖아. 그렇다고 강호 고수인 너의 이목을 피해 누군가 미행을
한다는 건 말도 안되고.”
“내부 거래야.”
“뭐, 내부거래? 아니 우리 회사에서 스파이가?”
“곧 밝혀지겠지.”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공항을 출발했다.
회사 맞은편 골목으로 지하에 바(BAR)가 하나 있다.
‘클로버’란 간판을 달고 있는데 가끔 찾아와 술을 마시기도 하는 단골이다.
권총수가 나타나자 여사장 김면지가 깜짝 놀란다.
“어멋! 대표님!”
권총수는 가볍게 웃음을 짓고 구석 탁자에 앉은 채명천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여기 술 좀 주세요.”
오민철이 말하면서 걸어갔다.
세 사람이 탁자에 앉았고 권총수가 눈을 치켜떴다.
“채 이사님!”
“말씀하십시오. 대표님!”
전직 강력계 형사답게 채명천은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걸 눈치 챈 듯 평소와 달리 깍듯하게 대답했다.
“내가 칠보 호텔에 묵는다는 건 알고 계시죠?”
“대표님께서 귀띔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칠보 호텔로 전화를 하도록 조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