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3화: 지옥의 일부(2)
말보로 레드다.
멈칫하던 김원홍이 한 개비를 뽑아 물자 라이터를 켜서 불까지 붙여준다.
권총수 역시 한 개비 피워물었는데 길게 빨아당기더니 천장을 향해 연기를 뿜었다.
“언젠가 나와 부장님이 술잔을 놓고 마주 앉는 날이 오길 기대하겠습니다.”
권총수는 칼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사무실을 걸어나갔다.
놀란 사람은 오민철이었다.
김원홍까지 죽여 버려야 한다.
살려두면 더욱 이를 악물고 블랙잭의 사업을 방해하고 끊임없이 목숨을 노릴 것이다.
“그냥 가면 안 되잖아.”
오민철이 다급히 말했다.
권총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오민철은 앞을 막아섰다.
“죽여야 돼. 살려두면 우리 편안히 평양을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그럴 일은 없어.”
“무슨 소리야.”
권총수는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곧장 문이 열렸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오민철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권총수를 바라보았다.
“제아무리 김정은의 신임을 받고 있다고 하지만 이런 큰 사고가 났어. 우릴 공격한 일곱 명, 지하 사무실에서 최백근을 포함한 네 명, 모두 열한 명이 죽었지. 이 사건이 밖으로
펴져나가봐. 북한이라고 정치적 라이벌이 왜 없겠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고 폭로되면 백 퍼센트 총살감이지.”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자기 목숨 온전해지기 위해 미치도록 오늘밤 일을 덮겠지.”
“더 이상 우린 쫓지 않는다는 거야?”
“나를 쫓아봤자 소득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 지금으로서 가장 현명한 방법은 서둘러 모든걸 묻어야 한다는 거지.”
꿀꺽!
오민철은 침을 삼켰다.
처음에는 병력을 동원해 쫓을까 했다.
하지만 객실 상황을 보고나서 분하지만 물러서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무려 여섯 명의 목에 젓가락을 박아 죽인다는 건 영화속에서나 가능하다.
영화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 이상 아무리 설치고 쫓아도 권총수를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남은 건 한시 바삐 처참한 오늘 밤의 패배를 흔적도 없이 지우는 일이었다.
김원홍은 목이 잘린 장영국의 시신을 내려다 보더니 전화를 걸어 보위성 안에서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심복 십여 명을 불렀다.
호출을 당한 그들은 20분도 안되어 호텔에 도착했다.
시신이 치워지고 객실이 정돈되었다.
총소리 한 방 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또한 호텔관계자들을 불러 오늘 밤 일은 처음부터 없었던 일이라는 걸 강조했다.
만약 비밀을 누설하면 가족을 몰살시켜 버리겠다는 말에 직원들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눈앞의 인물이 누군가.
사람 한두 명은 얼마든지 직권으로 죽일 수 있는 사내였다.
“예!”
“걱정 마십시오. 우린 죽을 때까지 오늘 일은 모릅니다.”
십여 명의 직원들은 벌벌 떨며 대답했다.
다음 날 평양역에 박철진이 배웅을 나왔다.
권총수는 표를 끊고 개찰구를 빠져나가려다 뭔가 잊어버린 것이 있다는 듯 돌아왔다.
“하마터면 잊을 뻔 했습니다.”
부드럽게 웃으면서 어제밤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으헉!”
박철진은 기절할 듯 놀랐다.
“기회입니다.”
“기회?”
박철진의 눈이 작아졌다.
권총수는 왜 기회인지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김원홍의 약점 또 하나를 잡았지 않습니까? 이번 사건도 잘 이용하면 김원홍과 적당히 밀당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박철진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놀라운 사람이다.
자신과 장인어른은 꿈에도 생각 못한 계책을 내놓았다.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현세에 나타난다고 해도 이토록 완벽하게 김원홍을 덫에 빠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더욱 놀라운 건 김원홍 스스로가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이쪽에서 잡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과 장인, 그리고 처남인 현역인 백순용은 김원홍에 충성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수직적인 상하관계의 충성만은 아니다.
가끔은 수평적이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자신들이 김원홍 위에 올라서는 역충성이 될 것이다.
즉 충성을 하지만 유리한 위치에 서는 것이다.
“언제나 볼지 모르겠습니다.”
박철진이 악수를 하며 말했다.
권총수는 잔잔하게 웃었다.
“운명은 모르죠. 내일 갑자기 만나게 될지.”
“하긴, 잘가시오. 사막의 흑새.”
권총수는 눈을 빛냈다.
북한 사람 입에서 처음으로 전장에서의 닉네임이 나온 것이다.
기분이 묘하다.
북한은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이며, 김정은은 지도자가 아니라 숭배의 대상이다.
최소한 북한 땅에서는 김정은 말고 누구도 존중해서는 안된다.
존중의 시작은 호칭인데 사막의 흑새는 권총수에 대한 분명한 존경이었고 흠모였다.
“조 사장님도 고생 많았습니다.”
조식만과도 악수를 나눴다.
박철진은 세 사람이 개찰구를 빠져 나갈 때까지 서 있었다.
“당신은 멋진 사람이오.”
박철진은 몸을 돌렸다.
기차가 용정역 근처에 왔을 때 계속 침묵하고 있던 권총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우리가 칠보호텔에 묵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렇잖아도 갑자기 말이 없어진 권총수의 눈치를 보던 오민철이 눈을 좁혔다.
아무도 모른다.
박철진도, 장인 백정만은 물론 같이 왔던 조식만에게도 묵는 호텔 만큼은 알려주지 않았다.
물론 오해를 살 수 있기에 연길에서 출발전 양해를 구했다.
호텔은 공간이 워낙 특별하여 공격을 받으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곳이다.
그래서 테러범이든 살인청부업자든 호텔숙박에 가장 신경을 곤두 세운다.
권총수는 강호인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창문을 통해 탈출할 수 있으나 일반인은 입구만 막히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인데요.”
조식만도 눈을 빛냈다.
누군가 자신을 미행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육식귀원에 이른 강호고수의 감각을 피해 따라 붙는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권총수의 표정은 좀체 펴지지 않았다.
뒤에서 오는 화살은 피하기가 쉽지 않다.
작은 구멍이라고 우습게 보다 한 방에 무너지는 것이 둑이다.
기차는 용천역을 떠나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압록강 철교 진입을 앞두고 갑자기 기차의 공기가 이상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권총수는 지나가는 승무원들 얼굴에서 단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찾아 냈다.
“뭔 일 있는 것 같지.”
권총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다 승무원이 지나가자 불러 세운다.
“승무원 선생.”
승무원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날 불렀소?”
“무슨 일 있소?”
“무슨 일 말입니까?”
“아무일 없는 것입니까? 뭔가 이상한 것 못 느낍니까?”
“선생 대단합니다. 사실 단둥역에서 중국 공안과 안전부 요원들의 검문검색이 있지요.”
꿈틀!
오민철이 인상을 찌푸렸다.
“모든 기차의 출입구를 통제한 뒤 안전부 요원들이 승객들 한 명 한 명의 신원을 조사하죠.”
“언제부터 그랬소?”
오민철이 물었다.
“이틀 전부터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고라도 생긴 모양입니다?”
조식만이 입을 열었다.
“자세히는 모르고 닷새전 연길에서 큰 사고가 발생한 모양이더군요. 적지 않은 사람이 죽었고, 범인을 잡기 위해 열차를 검문검색하는 모양입디다.”
닷새 전이면 자신이다.
이틀 전부터 열차 검색을 했다면 자신이 평양에 들어간 걸 알고 있다는 뜻이다.
즉 나올 때 반드시 잡겠다는 의미다.
기차는 의주역을 지나 달리고 있고 20여분 지나면 압록강 철교를 지나간다.
다리를 지나면 중국 영토다.
중국 측에서 자신을 잡으려는 건 이해 한다.
그렇다고 지금은 충돌할 때가 아니다.
어차피 북한의 인력들을 블랙잭 용병들로 채용하려면 중국을 자주 찾을 수 밖에 없다.
소나기가 올 때는 아무리 우산을 써도 옷이 젖는 걸 피하지 못한다.
피하는 길 만이 최선이다.
아직 소나기에 맞설 때가 아니다.
“조사장님.”
“예 대표님!”
“우리 그만 헤어져야 겠습니다. 조 사장님 혼자 있으면 전혀 위험할 일이 없겠죠.”
“그렇긴 합니다만 어디로 가시려고.”
그러면서 밖을 보았다.
기차가 달리고 있는데 어딜 가느냐는 뜻이다.
그토록 거북이처럼 느리던 기차가 평지인 탓에 상당한 속도를 내고 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나와 오 이사는 기차에서 내리겠습니다. 자세한 건 나중 전화로 얘기드리죠.”
“달리는 기차에서 내린단 말입니까?”
권총수의 신비막측한 능력을 들었고 몇 번 불가사의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렇지만 일반인의 눈은 여전히 경이롭다.
권총수는 그렇다 치자.
시속 50킬로는 족히 될 것 같은 열차에서 오민철은 어떻게 내린단 말인가.
“그건 걱정마세요. 내가 알아서 할테니.”
권총수는 손을 내밀었다.
탁!
두 사람은 굳게 악수를 나눴다.
“비지니스는 신뢰라는 조 사장님 말씀 항상 가슴에 담고 있습니다. 이번부터 조사장님에게 20퍼센트의 이익이 더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대...대표님!”
한 명 모집하는데 800달러를 받는다.
그런데 960달러를 지불하겠다는 뜻인데 권총수는 1,000달러로 못 박자고 했다.
엄청난 인상이다.
권총수는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이번 평양방문에서 조식만의 진면목을 보았다.
조식만은 모르고 있겠지만 권총수는 그가 104정찰대대장 백순용을 만난 걸 알고 있다.
두 사람의 대화까지 엿들었는데 조식만은 그에게 놀라운 제안을 했다.
전역을 하거나 전역하는 부하들을 연길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한 명 당 200달러는 지불하겠다고 했다.
음모였든 아니든 아버지가 공금 횡령으로 처형당할 수도 있는 위험에 빠졌지만 돈이 살려냈다.
돈이라는 것이 무지막지한 공화국체제에서도 엄청난 힘을 지녔다는 걸 몸소 겪고 지켜본 터라 조식만의 제의가 놀랍지 않았다.
공화국에서도 돈이 있어야 장수한다는 걸 깨닫고 협조하기로 약속했다.
두 사람의 얘기를 엿들었기 때문에 20퍼센트를 올려 준 것이다.
즉 백순용에게 들어갈 돈을 권총수 자신이 보전해주는 것이다.
덜커덩 덜커덩!
기차가 마침내 압록강 다리에 진입했다.
다리에 진입하자 기차는 속도를 떨어뜨렸고 두 사람은 조식만과 헤어졌다.
둘은 기차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출입문은 잠겨 져 있고 정차할 경우 기관실에서 개폐를 통제한다.
수동으로 열 때는 오직 승무원만이 가능하다.
압록강의 물은 얼어 있었다.
평양을 떠날 때 영하7도였는데 지금 단둥의 기온은 영하12도라는 발표가 있었다.
압록강 북쪽으로는 겨울에 영하 30도는 예사로 내려간다.
기차가 다리를 거의 건너가자 권총수는 천장에 달린 잠금 장치를 옆으로 밀어내고 손잡이를 당겼다.
덜컹!
소리가 들리며 기차의 출입문이 열렸다.
스으윽!
오민철을 안은 권총수는 그대로 강물로 추락했다.
사람들 눈에 띄면 중국 공안에 연락이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가장 빨리 사라지는 것이 좋다.
강 가장자리는 얼어 있었지만 두께가 얇다.
성인 남자 둘이 밟고 서면 깨진다.
권총수는 얼음에 발바닥이 닫기 직전 내공을 초상비 식으로 전환하면서 둑으로 날아갔다.
스으으으!
두 사람은 강변에 내려섰고 열차가 지나가자 재빨리 강둑 위로 올라갔다.
단둥이다.
중국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