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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631화 (631/651)

제631화: 여기도 사람 사는 곳(2)

어쨌든 혐의 없다는 결론을 받아 풀려났지만 예전의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한 번 의심을 받기 시작하면 그건 언제든 또 다른 도화선이 되어 폭발할 것이다.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만 무너지면 상관이 없다.

북한이라는 사회는 친가와 외가까지 포함한 두 가문을 풍비박산 내버린다.

즉 복수할 마음을 품을 정도로 가까운 핏줄은 살려두지 않는 것이다.

그건 김일성 때부터 전해오던 숙청의 특징이었다.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하여 당사자만 쳐버리면 그 아들은 언젠가 복수의 기회를 노릴 것이다.

잘못한 남편을 죽이고 여자를 살려둔다면 아내와 자식들이 김정은 체제에 대한 증오를 싹틔울 것이다.

그건 바람이 되고, 비가 되어 사방으로 퍼지고 체제는 조금씩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사위 박철진이 나타났다.

“시간 됐습니다. 가시죠.”

넥타이만 매지 않았을 뿐 검정색 정장을 입고 있어 곧장 따라 나갔다.

백정만을 태운 박철진의 승용차가 대문 앞을 떠났다.

차가 멀어지고 한참 뒤에 주차해 있던 흰색 승용차 한 대가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고 할 때 맞은편에서 검정색 승용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골목이지만 차량 두 대는 충분히 비켜 갈 만큼 넓었다.

그런데 검정색 차가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며 오고 있었기 때문에 흰색 승용차가 빠져 나가지를 못했다.

빵빵!

흰색 차의 운전자가 경음기를 울리며 비키라고 했다.

조수석 사내는 유리를 내리고 상체를 밖으로 내밀었다.

“차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검정색 차가 약간 뒤로 후퇴하더니 다시 전진하며 오른쪽으로 붙였고 그제서야 흰색 승용차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검정색 차량의 운전자는 변장한 권총수였고 조수석에는 오민철이 타고 있었다.

차량 주인은 조식만인데 아는 사람에게 잠시 빌렸다고 했다.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박철진 차관 승용차는 죽어도 따라가지 못하겠지.”

오민철의 확신에 권총수는 말 끝을 흐렸다

“글쎄! 거리에 차량이 서울처럼 많지 않아서.”

따라 붙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더 어렵지. 길이 잘 뚫린다는 건 그만큼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건데.”

“그 말도 맞고.”

두 사람은 차를 끌고 곧바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약속장소인 조선미술관 앞에 도착했다.

평소 관람객들로 붐비던 미술관은 저녁을 밝히는 가로등과 더불어 조용했다.

가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과 산책을 나온 젊은 부부만이 고즈넉한 미술관 앞 광장을 채웠다.

단 두 사람 권총수와 백정만이 천천히 산책을 했다.

“조금전 부장님 주택을 감시하고 있던 두 사내는 보위성 인물들로 밝혀졌습니다. 차량 또한 보위성 소속의 차량이었고.”

“얘기 들었소.”

“위기는 넘겼지만 보위성의 감시망은 풀리지 않았다는 뜻이죠.”

“죽일놈들!”

백정만은 이를 갈았다.

돈을 받았으면 최소한 며칠 몇 달이라도 사람을 편하게 해줘야 한다.

척!

걸음을 세운 그는 캄캄한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면 가장 먼저 고개를 내밀고 세상을 비추는 금성이 반짝 거린다.

“저 별 말이오. 우리 말로는 개밥바라기라고 한다지요? 새벽녘 동쪽 하늘에 떠있을 때는 샛별이라고 하고.”

김일성 대학까지 졸업한 부친 백성주는 빨치산 1.5세대로 김일성과 항일 운동을 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정통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면서 빨치산 세대의 후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김정은 주위에는 새로운 교육을 받은 신진인사가 많다.

그런데 단순히 아버지 후광으로 고위직에 올라 횡포를 부리는 자신들이 좋게 보일 리가 없다.

김정은 또한 빨치산 2,3세대들이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렇게 하나둘 숙청하고 갈아 엎으면서 노동당의 중심을 4,50대 신진세력으로 바꾸고 있었다.

이번 농업부 공금 횡령도 백정만이 함정에 걸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주동자는 필시 김원홍 위원장일 겁니다.”

“김원홍 그자가 돈은 돈대로 챙기고 나에 대한 감시는 계속한다는 건데 악질적이군.”

권총수는 씨익 웃었다.

“스탈린 시대 때 이마노프라는 소련 공산당 서기관 한 명이 있었죠. 차관급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재치가 있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스탈린이 위기에 빠졌을 때 돌파할 수 있는 계책을

세워 신임을 받았습니다.”

권총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때부터 이마노프의 횡포가 시작됐습니다. 특히 부패하고 자본주의적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은 전부 이중 스파이, 또는 부패자로 몰아세웠죠. 무자비한 피의 숙청이 진행되던 시기였으니

찍힌 그들이 얼마나 겁이 나겠습니까? 있는 돈 없는 돈 긁어 이마노프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나아진 건 없었죠. 감시는 계속됐고 이마노프의 주머니는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습니다.

뒤에 스탈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한 사람의 무조건적 신임은 그런 부패를 낳습니다. 하지만 우두머리는 알고서도 일부러 모른 척 합니다. 그 정도는 챙길 수 있게

해주어야 더욱 충성을 하거든요.”

앞으로도 계속 시달릴 것이라는 얘기였다.

“시달리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이 있다는 말에 백정만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장님이 그에게 바친 돈의 액수, 또한 부장님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돈을 갈취당한 사람들을 은밀히 모으십시오. 바친 돈이 정도 껏이면 몰라도 액수가 커지면 아무리 김정은이라고

해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계좌가 해외에 있다면.”

“수틀리면 위원장 동지나 아니면 김여정 동지 귀에 정보를 흘리겠다고 협박을 하라?”

“협박이 아닌 밀당을 하는 겁니다. 당신의 약점도 우리가 쥐고 있으니 같이 살아가자. 김원홍이 멍청하지 않는 이상 거절할 이유는 없겠죠.”

백정만의 눈이 커졌다.

“그래서 남한 사회에서는 함부로 뒷돈을 받지 않습니다. 잘못 받았다가는 자신의 약점으로 돌변하니까.”

“음!”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철저한 상명하복의 체제다 보니 윗사람을 협박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북한 사회다.

“만약 그러다 날 비밀리에 죽인다면?”

권총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증거물들을 가지고 있다. 날 죽여봤자 소용없다. 그렇게 말하면 상대가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어차피 날 죽여봤자 자신이 부패가 상부에 보고된다는 걸 알게 되니 죽여 입을 막는 일은 하지 못하죠.”

북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해볼 만한 작전임에는 분명하다.

“거액의 돈을 주었는데도 조금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감시당한다는 건 너무 억울하잖습니까? 이판사판이란 말이 있죠. 죽을 것이라면 한 번 칼을 겨눠보기라도 해봐야죠.”

“헛헛! 리 사장님 말을 듣고 보니 쉬운 세상을 내가 무척 힘들게 산 것 같소.”

북한 체제에서는 도박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약점을 잡고 거래를 한다는 건 자본주의에서나 가능할 일이다.

이 나라는 위에서 밑으로 내려올 수는 있으나, 밑에서 위를 향한 공격은 불가능하다.

일단 위에 사람은 옳고 아래 사람은 틀리다는 전제로 모든 일이 시작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일 년에 백만 달러씩 지원을 하죠.”

“으헉!”

백정만은 소스라쳤다.

얼마나 놀랐는지 휘청거리기까지 했는데 북한에서 백만 달러란 거액의 의미를 넘어 거부가 되는 액수였다.

“대신 개인적인 부탁을 하나 드리죠. 사위이신 박철진 농업부 차관께 얘길 들었겠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 연길에서 인력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조식만이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알고 계시는군요. 러시아에서 일할 광산 노동자가 필요한데 알다시피 그곳 일이 보수는 세지만 굉장히 고되죠. 일반적인 주민들은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북한에도 탄광이 있다.

범죄자들중 상당수는 광부로 보내는데 일도 힘들지만 위험하기까지 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노동적위대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현역 못지않은 전투력을 지닌 남자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이라면 광산일에 매우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가만, 그럼 정리를 해봅시다. 리 사장은 평양 시내 열대과일 독점권을 원하고, 노동적위대에서 신체 건강한 남자들을 조선생이 하는 인력 사무소와 연결을 해달라?”

“그렇습니다.”

“신체 건강한 남자.”

한 가지가 떠오른다.

노동적위대 안에 특별한 부서가 있다.

‘해방대’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에 투입되어 체제 선전, 선동 및 중요인물 제거작업에 투입되는 임무를 갖고 있는데 모두가 특수부대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다.

유일하게 그들 해방대는 한 달에 일주일씩 전투훈련을 받는다.

“지금 여기서 결정해야 합니까?”

“아니죠. 천천히, 물론 빠른 대답을 주시면 고맙지만 그래도 고민할 시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양에 며칠 체류할거요.”

“내일 돌아갑니다. 전화가 있으니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떠나기 전까지 대답을 드리죠.”

“감사합니다.”

권총수는 백정만과 힘차게 악수를 했다.

없다.

호텔을 뒤지고 숙박업소, 식당까지 철저히 조사를 했지만 권총수란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본명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얼굴 또한 변장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변장을 잘한다고 해도 어딘가에는 특징이 남는다.

보위성에서는 오래전부터 권총수의 사진을 구해다 변장했을시 바뀔 수 있는 십여 가지의 얼굴 모습을 만들어 요원들에게 인식시켰다.

특수 훈련을 받은 요원들이다.

CIA나 영국의 MI6의 정보원들에 비해 질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한 번 보는 건 기억하고, 실마리를 잡으면 반드시 해결을 한다.

모두가 김일성 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이자 일부는 러시아와 중국으로 유학까지 다녀왔다.

지이잉!

김원홍은 진동하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국제전화이고 중국에서 온 것이다.

“주 서기관입니다.”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 주만춘 2등 서기관이었다.

“지금 정보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말해봐.”

“두 사람이 칠보호텔에 묵고 있다는군요.”

“누구에게서 들었나?”

“우리에게 그런 귀한 정보를 줄 사람이 한 곳 밖에 더 있습니까?”

“맞아. 그렇군.”

전화를 끊고 난 김원홍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어금니를 물었다.

책상 위 유선전화기를 든다.

“지금 당장 병력 열 명, 아니 스무 명 정도 대기시키게. 중무장시켜서 말이야. 개인화기는 물론 혹시 모르니 수류탄과 RPG도 챙기게.”

탁!

수화기를 내린다.

그러더니 다시 수화기를 들고 번호 한 개를 눌렀다.

“나요. 칠보호텔을 찾아가 내 명령이라면서 사회안전성 요원 이십여 명을 투숙객과 호텔 직원으로 위장시켜 근무토록 하시오.”

이유가 없다.

상부에서 시키면 무조건 움직이는 것이 북한체제다.

“후훗!”

김원홍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승용차 한 대가 칠보호텔 앞에 멈추더니 뒷문이 열리고 권총수와 오민철이 내렸다.

두 사람을 내려준 승용차는 호텔을 떠났다.

백정만까지 포함한 네 사람은 모처럼 즐겁게 저녁 식사를 했다.

백정만은 생각할수록 권총수가 가르쳐준 방법이 좋다면서 술까지 몇 잔 마셨다.

“차 한 잔 하고 가지.”

오민철이 깜짝 놀라며 권총수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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