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630화 (630/651)

제630화: 여기도 사람 사는 곳(1)

권총수는 짜증을 냈다.

“왜 또 그런 눈이야? 빨리 장기 두라고.”

“우리 사이 비밀 없지?”

“없지.”

“지금 있는 것 같은데? 귀신을 속여도 난 못 속여.”

“얼른 장기 두라니까?”

“말해봐. 너 조식만에 대해 내가 모르는 뭔가 알고 있지?”

“빨리 장이나 받아. 질 것 같으니까 잔머리는?”

오민철은 장기판을 한참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졌어. 한 판 더둬.”

“그만해.”

“뭘 그만해. 한 판 더 두자고.”

“우리가 평양에 장기 두러 왔어?”

그러면서 내기한 백 달러를 주머니에 넣는다.

백 달러를 잃은 오민철이 입맛을 다실 때 권총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닳고 닳은 사람이야.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평양에 뿌리 박아 놓은 자기편이 많아. 정치국 소속 농업부 차관과 형님 동생 할 만큼 가깝다면 다른 사람과도 소통할 가능성이

백 퍼센트지. 문제는 그가 숨겨 놓은 다른 선이 과연 우리에게 플러스인지 마이너스가 될지 좀 더 지켜봐야 돼.”

“언제부터 또 하나의 선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어?”

“그냥.”

“그냥?”

“형 장사 한두 번 해. 나 이란까지 들어갔다가 죽을뻔한 사람이야. 평양이 테헤란보다 더 위험했으면 위험했지 덜 위험하지는 않아. 그런 곳을 내가 그냥 따라 왔겠어.”

형에게 가르쳐 줄 말이 있고 나 혼자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모르는 것이 오히려 낫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고 있다.

분명한 건 조식만이 또 하나의 선을 갖고 있는 건 분명하다.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제 서야 오민철의 얼굴이 펴졌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처음 들어올 때는 약간 흥분도 되었는데 막상 평양에 와서 보니 살벌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처음 온 오민철의 오감은 바짝 팽팽해졌다.

그건 사방에 감시의 눈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호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를 끝내고 1층의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조식만이 찾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조사장님.”

조식만은 다른 호텔에서 묵었다.

오민철이 여자 종업원에게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은 조식만이 입을 열었다.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권총수의 눈이 빛난다.

“1시쯤 부벽루에서 보자는 군요.”

“누가 나옵니까?”

“아직은 박철진 차관만 접촉 가능합니다. 하지만 처남 백순용의 의견을 어느 정도 받았다고 봐야겠죠.”

“하긴.”

권총수는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대동강을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 커다란 한옥 한 채가 서 있다.

부벽루(浮碧樓)다

고려때 지어졌다가 임진왜란 때 불탔고 광해군때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는 북한 국보 제 7호다.

일반인 출입은 불가능하고 멀리서 사진을 찍거나 하는 건 상관없다.

부벽루에서 조금 떨어진 절벽 위에 네 사람이 서 있었다.

권총수와 오민철 조식만, 그리고 박철진이었다.

“50만 달러!”

박철진은 만나자마자 돈 얘기를 꺼냈다.

향후 평양시내 오렌지와 망고의 독점 판매권을 주겠다면서 50만 달러를 달라는 제의였다.

“어떻게 전달하면 됩니까?”

“아마 평양에서는 어려울 거요. 내가 계좌번호를 알아서 넘겨줄테니 그곳에 입금하면 될 것입니다.”

권총수는 박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하긴 50만 달러의 거금을 입금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인간의 신뢰관계는 하루이틀 만나 쌓이는 것도 아니고.”

박철진이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신뢰가 밑바탕 되지 않으면.”

“아닙니다. 난 돈을 보낼 것입니다. 다만.”

“다만 뭡니까? 말씀하세요?”

“50만 달러 이외에도 더 필요하다면 더 많은 액수를 지원할 수도 있습니다. 대신 평양시내의 오렌지와 망고 판매권만 확실하게 준다면 만족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농산물 판매에 관한 모든 것을 관리하니 믿어도 될 것입니다.”

“차관님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차관님에게 실망을 드리고 싶지는 더욱 않군요. 언제까지 입금하면 될까요?”

“언제쯤 가능합니까?”

“지금이라도 원한다면 넣어 드리죠.”

“지금?”

박철진의 눈이 커졌다.

권총수는 웃음을 지었다.

“은행 입금이라는 것이 메시지 한 통이면 끝나는 시대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

박철진은 더듬거렸다.

권총수는 그가 더듬거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외국 은행의 입금을 바라는 것이다.

즉 최종적으로 돈을 전달 받게 될 보위성 간부들이 해외에 비밀 계좌를 갔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나 서울이나 다를 건 없었다.

“송금은 바깥에서 바깥으로 이어집니다.”

권총수는 분명하게 말해주었다.

평양에는 일체 들어오지 않고 해외에서 이뤄진다는 말에 안심하는 표정을 했다.

“이제와서 뭘 숨기겠습니까. 빠를수록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계좌번호 주시죠.”

박철진은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건네 주었다.

종이를 펼치자 두 사람의 이름과 두 개의 계좌가 있는데 두 명에게 돈을 분산 입금하라는 뜻이다.

“두 사람 모두 20만 달러씩 입금하면 됩니다.”

결국 10만 달러는 자기 몫으로 달라는 뜻이었다.

“차관님 계좌도 있어야죠.”

“일단 두 사람에게 입금을 하시고.”

정말로 입금이 되는지 안 되는지 보겠다는 심산이다.

‘하긴 공산주의자들의 의심이 더 하지’

권총수는 10여 미터 걸어 일행과 거리를 두고 핸드폰으로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완전한 영어와 아랍어를 섞어 보내더니 이어 계좌번호를 찍는다.

그런데 박철진이 건네준 종이 속 번호와 다르다.

권총수가 보내는 건 모든 것이 받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만 알 수 있는 암호였다.

바로 서울로 가지 않는다.

일단 국경 밖 중국으로 나갔다가 다시 서울로 들어갈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굉장히 빠르고 신속하다.

받는 사람은 어디 은행으로 얼마를 넣고, 계좌번호가 몇 번인지 정확히 안다.

보내기를 누르고 권총수는 천천히 다가왔다.

“십 분만 기다린 뒤 확인해 보라고 하시죠.”

권총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십 분!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알게 모르게 절벽 위로 긴장이 깔리면서 조금 전까지 불어오던 강바람까지 멈췄다.

바람이 멈추자 주위 공기는 겨울철인데도 달아 오른다.

후우!

권총수는 길게 연기를 내뱉었다.

정확히 십 분이 지나고 나서 박철진이 전화를 받았다.

“하아 국장동지!”

국장동지라는 말에 권총수 눈이 빛난다.

보위성 넘버2인 리만구이다.

넘버1은 보위성을 총괄해 움직이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가보위성 부장 김원홍이다.

“감사합니다. 물론입니다. 국장동지 언제 한 잔 하시죠. 네네!”

전화를 끊은 박철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더니 또 다른 종이쪽지 한 개를 내밀었는데 이번엔 자신의 계좌였다.

“당장 넣죠.”

권총수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암호로 문자를 보냈다.

보내기를 누른 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잠시 후 절벽 끝에 서서 대동강을 바라보고 있을 때 입금 확인을 위해 저만큼 떨어져 나간 박진철이 다가왔다.

“고맙소. 뭐 이제와서 뭘 숨기겠습니까? 우리 조식만 동지에게 말을 전해 들었을 것이고.”

그러면서 자신의 장인인 백정만 당중앙군사위원이자 노동적위대 위원장의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말했다.

결국은 별일도 아닌데 재수 없게 걸렸다는 뜻이다.

즉 다른 간부들도 이렇게 저렇게 몰래 예산을 유용하고 빼먹는다는 뜻인데 권총수는 한숨을 쉬었다.

‘썩었군. 가난한데다 관료들까지 이토록 개판이니’

권총수는 이 체제가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았다.

“이토록 큰 도움을 주었는데 혹시 내 힘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더 말해 보시오.”

“장인어른 되시는 백정만 위원님을 한 번 뵐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장인을?”

“어려우면 거절해도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어려울 일은 아니고, 그럽시다. 언제 시간을 잡을까요?”

“난 오늘 저녁이라도 좋습니다.”

“알겠소. 조식만 동지를 통해 연락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죠.”

조식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연길지부의 궤멸은 엄청난 충격이자 사건이었다.

연일 대책 회의를 하고 있지만 뾰족한 해법은 내놓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국가안전보위성 부장 김원홍은 탁자 위에 있는 핸드폰을 들었다.

액정을 보던 김원홍의 눈이 빛난다.

‘Red bee(붉은 벌)’

김원홍은 재빨리 통화 버튼을 밀었다.

“뭣 좀 찾았나?”

김원홍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

“아직 뚜렷한 건 없습니다. 그런데 권총수가 평양으로 들어간 듯 싶습니다.”

“무슨 소리야? 권총수가 평양으로 들어오다니.”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그의 행적과 여러 주위 상황을 놓고 분석한 결과 평양행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중국 국가안전부의 판단입니다.”

“입국자 명부를 확인해 보면 알 것 아닌가?”

“권총수 같은 자라면 가짜 증명서 하나 만들어 내기란 식은죽 먹기겠죠.”

“으음!”

김원홍의 얼굴이 싹 변했다.

만약에 들어왔다면 긴장해야 할 일이었다.

결코 최고 존엄을 노리는 그런 작전이나 일은 벌이지 않을 것이다.

장사꾼이 가장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행위가 바로 정치적인 사건이다.

더욱이 백서그룹과 금강산 개발 문제로 남북의 공기가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측이 관계에 찬물을 끼얹는 일은 절대 벌이지 않는다고 본다면 결국 다른 일로 왔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일’

김원홍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보위성에서 그를 잡으려는 건 특수부대 출신자들을 끌어모으기 때문이다.

다른 노동자들처럼 북한 정부의 합법적인 허가를 받고 해외로 진출한다면 임금의 일정 부분이 당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블랙잭 같은 경우 단 한 푼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틀어 막아 버렸다.

인민의 배를 불리는 건 좋지만 인민만 배를 부르게 해서는 안 된다.

“좀 더 조사해보게. 만약 평양을 들어왔다면 심각한 일일세.”

“알겠습니다.”

김원홍은 전화를 끊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권총수가 평양을 왔다?’

신분증 위조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평양을 들어오기까지 겹겹이 쳐져 있는 검문의 거미줄 또한 어리숙하지 않다.

재빨리 전화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는지 잠시 기다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회안전성 최근백입니다. 김원홍 동지.”

“최동지 중대한 문제가 생겼소.”

사회안정성은 우리로 말하면 경찰이다.

최근백은 사회안전성 부장(경찰청장)이다.

“지금 즉시 평양일대에 비상 사태를 선포하시오.”

“무슨 일입니까?”

김원홍은 암호명 ‘붉은 벌’이 보내온 소식을 얘기해주었다.

순간 전화기 너머 최근백 부장의 목소리가 떨린다.

“알겠습니다. 즉시 경계태세를 강화하겠습니다.”

김원홍은 전화를 끊었다.

“감히 평양을 들어와. 들어왔다면 네 놈을 살려 보내지 않겠다.”

김원홍은 살벌한 웃음을 지었다.

박철진의 장인 백정만은 자신의 집에 있었다.

남향의 이층 단독주택으로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백정만은 올해 일흔다섯으로 보위성에 끌려가 많은 고초를 겪은 듯 초췌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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