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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629화 (629/651)

제629화: 정말 행복한가(2)

신의주에서부터 평양까지 기차로 오는 동안 북한 농촌의 모습은 겪어보지 않았으나 부모님들 얘기를 참조한다면 우리의 보릿고개 시절과 차이가 없었다.

외신에 의하면 평양 시민들만 그럭저럭 입에 풀칠을 할 뿐 지방은 초근목피가 전설의 고향이 아니라고 했다.

“냉면 나왔습니다.”

음식을 실은 카트가 다가왔고 여자직원이 네 사람 앞에 냉면을 한 그릇씩 놓고 돌아갔다.

“듭시다!”

박철진은 야심만만한 표정이다.

왜 평양냉면이라고 하는지 그 찬란한 맛을 한 번 보라는 듯한 시선이다.

권총수는 젓가락을 들고 면을 집어 입속에 넣었다.

후루룩!

권총수는 면을 씹었는데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차가운 고기국물에 동치미를 섞은 맛이다.

면도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음식의 장단점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일단 많이 먹어봐야 하지만 냉면이라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다섯 손가락도 다 채우지 못할 만큼 몇 번 되지 않는 냉면 경험을 가지고 맛을 평가하기란 무리다.

다만 초대 받은 자리이고 평양 사람들이 어깨를 으쓱하는 음식이기에 극찬을 해 주었다.

그에 반해 오민철은 실망의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오민철은 냉면뿐만 아니라 모든 분식은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라면, 국수, 수제비, 칼국수등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절대 거절하는 법이 없는데 표정이 심상찮다.

‘형 웃어’

귓가로 전음이 파고든다.

오민철의 성격상 무슨 말을 뱉어 낼지 모른다.

‘맛있다고 표현할 적당한 말이 없으면 계속 고개만 끄덕여. 지금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생각 하라고’

순간 오민철의 굳은 표정이 조금씩 풀렸다.

갑자기 웃으라는 말에 나름 노력을 하는 듯 했지만 연기자도 아닌 이상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업을 위해서는 웃어야 한다.

사실 박철진의 처남이 525정찰대대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특수부대 104정찰대대 지휘관 백순용이다.

강원도 평강군에 본거지를 둔 104정찰대대는 전쟁이 일어나면 남한의 제2의 도시 부산 점령을 맡고 있다.

우리의 예비군에 해당하는 노동적위대를 총괄 지휘하는 당중앙군사위원회 소속 백정만이 104정찰대대장 백순용의 아버지가 된다.

즉 백정만이 박철진의 장인인 셈이다.

이른바 처가 쪽이 세다.

물론 박철진의 가문도 김일성 시대 때부터 노동당 주요 간부를 지냈지만 처가에 비하면 약간 밀린다.

“좋군. 역시 좋아.”

어느 정도 표정 처리가 가능해진 오민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건 상대에게 맛있습니다 하는 말보다 훨씬 더 큰 효과를 가져왔다.

박철진이 거 봐라 우리 평양 냉면 먹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 없다는 듯 웃는다.

“조선생은 어떻습니까?”

열심히 먹는 조식만에게 물어본다.

권총수는 피식 웃었다.

음식 맛에 대해 참 고루고루 묻는다.

맛에 대한 지나친 칭찬 요구도 굉장한 결례라는 걸 모르는 듯 했다.

“말 걸지 마세요. 한 그릇 더 먹어야 하니까.”

그러면서 볼이 터지도록 면을 넣고 씹는 조식만을 보며 박철진은 만족스런 표정을 했다.

조식만은 말 대로 한 그릇을 더 주문했다.

그러면서 언제 먹어도 이거야 하면서 엄지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다행이다.

조식만이 능청맞은 연기로 박철진의 기분을 한껏 추켜 세워 놓는다.

강물이 출렁거린다.

대동강이다.

날씨가 좋으면 밤에도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미 영하로 떨어지고 있는 평양 날씨다.

전력이 모자라 강변의 가로등도 모두 꺼져 강은 그야말로 먹물을 칠해 놓은 듯 새카맣다.

두 사내가 천천히 강변을 걷고 있는데 한 명은 박철진이고 다른 한 명은 짧은 스포츠 머리에 건장한 체구의 군인이었다.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어깨에 와이(Y)자로 네 개의 작은 별을 달고 있다.

대좌, 우리로 말하면 대령 계급이다.

104 정찰대대장 백순용이다.

두 사람 모두 표정이 잔뜩 굳어 있는데 분위기는 불어오는 찬 바람 만큼 얼어 있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것입니까?”

백순용의 목소리가 깔린다.

“이번에 일이 잘되어 장인 어른께서 위기를 빠져 나온다고 해도 좋아할 것 없지.”

“왜요?”

백순용이 자형 박철진을 바라본다.

“자넨 이 공화국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서도 아직 모르나.”

백순용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낙인, 죽어 살이 썩기 전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시뻘건 도장이 장인어른은 물론 나와 자네 온 가문에 찍힐 거야. 공화국에서 지금까지 붉은 도장에 찍히고 제 명대로 살다간 사람

단 한 명도 없네.”

“보위성 고위인물들을 만나보겠습니다.”

“자네가?”

“그럼 이대로 지켜보자는 겁니까?”

“누굴 만나 뭘 어찌하려고?”

“높은 사람 붙잡고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눈감아 달라고 해야죠. 아버지가 죽을 수도 있는데 이대로 지켜보자는 겁니까?”

“공화국이 누구 부탁받고 도와주고 감춰주는 남조선인줄 아나? 지금으로서는 한 가지 말고는 장인 어른을 살릴 방법이 없어.”

“그게 뭡니까?”

“돈! 밖에 나가면 휴지조각 만도 못한 공화국 돈은 필요 없고 오직 달러만이 그들의 마음을 움질일 수 있네.”

“위대한 주체사상으로 뭉쳐도 모자랄 판에 달러라니, 미제 앞잡이들의 쓰레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뻐억!

백순용은 길가 낮은 가드레일을 사정없이 걷어 찼다.

“쳐죽일 반동새끼들.”

“돈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직 모르는군. 돈의 무서움을 알 때면 비로소 세상이 보일걸세. 처남, 그 반동 소리도 쏙 들어갈테고.”

박진철이 천천히 걸어갔다.

한참을 씩씩거리고 있던 백순용이 걸어가는 박진철을 향해 말했다.

“얼마가 필요한 것입니까? 나와 집사람, 그리고 아버지가 아마 숨겨 놓은 돈이 조금 있을 겁니다.”

저 만치 멀어졌던 박철진이 느리게 걸어왔다.

이윽고 3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걸음을 세우더니 빙긋 웃는다.

“처남!”

“이것 저것 모두 정리하면 일억원은 될 겁니다.”

“일억원, 남한 돈으로 천만 원, 윗대가리들이 좋아하는 달러로 환산한다면 일만 달러도 채 안되는구나.”

“도대체 얼마가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남한돈으로 최소 5억이다. 달러로 사십만 달러가 조금 넘지. 그 돈을 마련할 수 있겠어?”

너무 큰 액수에 놀란 듯 백순용의 눈이 커졌다.

“한 놈이 아니다. 최소한 보위성 김원홍 부장동지와 그 아래 리만구 국장은 먹여야 하지. 그런 고위 간부들은 이미 자본주의 맛을 보았지. 우리의 생각과 단위가 틀리다는 뜻이다.”

“무슨 수로 50만 달러를?”

백순용의 아버지 백정만은 당군사위원회 열두 명의 위원중 한 명이자 노동적위대를 관리하는 관리대장이다.

그런데 한 달 전 비리혐의로 보위성의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상상을 초월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북한 돈으로 노동적위대 예산 천만 원을 개인 용도로 사용한 것이 드러난 것이다.

북한에서 공금 유용은 액수에 따라 징벌에 차이가 있지만 최소 노동교화소 아니면 처형이다.

“방법이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전혀 없지는 않다.”

오십만 달러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이다.

공사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이 인정되지는 않지만 평양시민 대다수가 자기 이름으로 된 집에서 산다.

특히 노동당 당원들은 더욱 말할 것도 없다.

또한 고위 간부 일부는 해외에 적지 않은 재산을 숨겨 놓았다는 말도 있다.

“자형에게 돈이 있을 리는 없겠죠?”

어디서 나오는 돈이냐고 묻는다.

“처남, 한 가지만 분명히 말하겠네. 처가 집안의 생사가 달렸네. 이조시대처럼 삼족을 멸하지는 않겠지만 우리 후손은 두 번 다시 당원이 될 수 없고 평양에서 살지 못할거야.”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아무리 어려서부터 치열한 사상과 세뇌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어른이 되면서, 특히 고위직에 있다보면 북한이 어떤 나라인지 알게 된다.

하지만 북한이 어떤 나라인지를 알게 되는 순간 충성심은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이름하여 기득권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지금처럼 사회 지도층 인사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위로는 충성하고 아래로는 감시의 끈을 더욱 조인다.

용꼬리보다는 뱀 대가리가 낫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랫사람에게 더욱 악랄하게 굴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눈치를 보이는 간부들이 있다면 당장 고발하고 찌른다.

‘상대를 죽일수록 내가 산다’

긴장한 듯 백순용이 침을 삼킨다.

“결심이 서면 언제든지 날 찾아오게. 이건 내 혼자 일이 아닌 자네와 내가 같이 진행해야 할 일이지.”

백순용의 표정이 굳어진다.

잘못되면 자신도 같이 엮어 들어간다는 의미다.

자형 되는 박철진이 자신에게 원하는 건 딱 한 가지였다.

104정찰대대 전역자들을 조식만에게 소개해 달라는 것이다.

물론 이미 조식만을 한번 만나긴 했다.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중 누군가 반 공화국적 반동행위로 걸리면 연좌제가 적용되는 북한이다.

저벅저벅!

박철진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백순용은 한참을 바라보더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피워 물었다.

104정찰대대장.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김정은이 지방을 방문하면 미리 이삼일 전에 내려가 근처지역을 완전 통제하고 지키는 특수부대이다.

신원조회에서 털끝만한 오점이 있어도 오를 수 없는 자리다.

525정찰 대대가 항일 빨치산 세대, 즉 김일성과 같이 독립 운동을 한 후손들이라면 104대대는 노동당의 주류 후손들이다.

북한의 군대는 다른 나라와 전혀 다르다.

특히 특수부대로 갈수록 신분과 가문의 내력이 분명해야 한다.

단순히 뛰어나다는 이유로 야전부대 지휘관으로 앉혀 놓으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어쨌든 빨치산 활동을 한 조상은 없지만 충성심 하나로 북한에서는 지배층에 들어 있다.

백순용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후우우!

담배연기가 대동강 물 위로 퍼져 나갔다.

권총수는 호텔에 있었다.

오민철과 객실 하나에 같이 투숙했는데 두 사람은 호텔 데스크에 부탁해 장기판을 놓고 앉아 있었다.

“조식만은 어떻게 해서 박철진의 장인 백정만이 공금유용으로 위기에 몰렸다는 걸 알았을까?”

오민철이 장기판에 시선을 두고 물었다.

“오랫동안 평양을 드나들었는데 선이 한두 곳이겠어.”

“박철진 말고도 다른 선을 갖고 있다?”

오민철은 권총수를 바라보았다.

“정치적 브로커, 로비스트들의 특징이 뭐야? 맥보란이 그러는데 그들을 절대 하나의 선만을 고집하지 않는다고 했어. 위험하다 싶으면 언제든지 그 선을 차단하고 다른 선으로 갈아타는

거지.”

“위기에 빠진 자신을 구출해줄 정도의 선이면 조식만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선도 박철진 이상의 무게를 가진 사람이라는 건가?”

“그렇다고 봐야지.”

“누군지 물어볼까?”

그제서야 권총수가 고개를 들었다.

“아마추어처럼 왜 이래? 모른 척해야지 조식만이 우릴 스스럼 없이 대할 것 아냐. 우리가 자신의 다른 선까지 알고 있다는 걸 알면 거래가 제대로 이뤄지겠어?”

오민철이 눈을 좁혀 떴다.

권총수는 다시 장기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오민철의 시선이 신경 쓰인 듯 눈을 치켜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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