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7화: 그 도시(2)
조영철 당시 통일부 장관이 대통령의 특별지시 사항인 “정히 안되면 이산가족 상봉 문제 만큼이라도 반드시 합의해 발표하고 오라”는 훈령까지 재차 보냈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합의를
못했냐고 추궁했다.
대표단으로서는 놀랐다.
이산가족 상봉문제가 회담의 의제중 한 가지이긴 하지만 그다지 중요함을 따로 받는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서울에 오자 협상이 불편하게 흐를 경우 다른 건 몰라도 이상가족 상봉 문제만큼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관철 시키라 재차 강조 훈령을 보냈다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보냈고 한쪽에서는 받지 못했다.
조사 결과 대표단 특보 오동복이 우삼탁 당시 안기부 기조실장에게 보낸 전문이 있었다.
이들이 주고 받은 전문을 들여다 보면 가족이 있는 북한으로 보내줄 것을 원하는‘이모씨 건에 대해 3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협의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작성한 가짜 훈령이 남북 회담을 개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특히 ‘이산가족 상봉은 무조건 합의하라’는 강조된 훈령은 당시 우리측 전원식 대표에게 전해지지도 않았다.
이 사건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1993년 11월 국회에서 설부영 당시 의원이 폭로하고, 감사원의 감사가 진행되면서 전모가 드러났다.
‘가짜 훈령 조작’, ‘진짜 훈령 묵살’ 등 총체적인 훈령 조작 사건이었다.
하지만 실행자인 오동복만 사표를 받는 선에서 끝나, 그 배후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한 대형사건이 있고 난 뒤부터 북한 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엄격하고 신중히 다룬다.
자신과 정부의 북한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훈령을 조작해 버리거나 아니면 없는 말을 꾸며 보고 할 위험은 상존해 있다.
그래서 권혜림도 나중 어떤 오해가 생길걸 염려해 두 사람과의 대화를 녹음하는 것이다.
“여기까지에요.”
권혜림은 얘기를 마쳤다.
두 명의 청와대 비서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 고생한 것 없어요. 돈 벌기 위해 북한을 갖는데요 뭘. 오히려 나를 밀어주고 우리회사를 지원해준 정부의 배려가 더 고맙습니다.”
권혜림은 가벼운 목례를 하고 찻집을 돌아 나왔다.
골목을 걸어 나온 권혜림은 다시 차에 올랐고 승용차는 사라졌다.
기차가 멈췄다.
남한처럼 몇 킬로, 많게는 몇십 킬로 달리다 하나씩 나타나는 역이 아니라 보통 한 자리 수 킬로미터 마다 있었다.
조식만은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자동차가 대중적이지 못하다 보니 주로 철도이용을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차는 답답하리만치 느렸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조식만이 옆에서 부지런히 설명을 해 주었는데 가슴이 조금씩 무거워 졌다.
레일이 낡고, 침목 교체가 제때 이뤄지지 않아 조금만 속도를 올리면 탈선을 한다는 것이다.
굳이 백 미터 선수를 끌어들이지 않고서도, 달리기 좀 한다는 사람이면 충분히 기차를 따라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반란 한 번이 안 일어난단 말이지?”
오민철은 이마를 찡그렸다.
자신의 어린시절 고향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새마을호라는 고속열차가 다녔고 무궁화호로 불리는 열차가 조금 느리긴 했지만 이렇게 느려 터지진 않았다.
시속 7,80킬로는 예사였다.
“북한이 왜 개혁개방을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들도 개혁 개방에 나서면 경제난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걸 잘 알죠.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권력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죠.”
“중국이 개혁 개방하여 망했습니까?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미국과 맞짱 뜰 수 있는 나라가 되었어요.”
“그렇긴 합니다만 북한은 자신이 없는 모양입니다.”
“북한 주민들도 그래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굶어죽나 맞아 죽나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한바탕 확 뒤집어 버려야지.”
오민철이 약간 흥분했다.
“평창올림픽 때 일입니다. 북측 대표단 일부가 서울 강릉 KTX를 타고 엄청 충격을 받은 모양이더군요. 북한 최고위 간부들인데도 모두가 처음 타봤는지 아주 당황했다는 후문입니다.”
“인민의 배나 불리고 삼대세습을 하든 삼십대 세습을 하든 할 것이지.”
오민철이 크게 한숨을 내 쉬었다.
“썩을.”
누구를 향한 짜증인가.
가난해 봐서 안다.
가난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없다.
가난은 여러모로 사람을 힘들게 하고 끊임없이 한숨 짓게 만든다.
“빌어먹을 놈의 나라.”
기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중 기름진 피부에 환한 표정을 가진 이는 단 한 명도 찾아 볼 수 없다.
삶에 찌들고 지쳐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자포자기의 얼굴들이다.
전쟁 난민촌은 아이들 웃음소리라도 있다.
여긴 아이들까지 무심하다.
그들이 무엇을 알아서 얼굴에 근심과 아픔을 담고 있어야 하는가.
“개자식들 인민들 얼굴에 고통을 씻겨줘야 하는 것 아냐.”
“형!”
권총수가 입을 열었다.
“그만해. 내가 지금 강기로 우리의 대화를 차단하고 있어. 서울에서처럼 차 안에서 떠들었다간 골치 아픈 나라라고.”
권총수는 오민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웃에게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자선이라고 했어. 형의 그런 마음은 아주 좋은거지만 적당히 해.”
“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
오민철이 노려보듯 바라보자 권총수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어느 신부님이 그렇게 말하더라고, 당시에는 무슨 이상한 소리지 했지. 마음만 관심을 가지면 뭐해. 당장 경제적 고통을 해결해야 하는 그들에게 한 푼의 도움이
필요한거지.”
“당연하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아.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경제적 지원은 어려워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미소로 맞이하고 힘내라고 격려한다면 그것도 자선 아니겠어.”
화악!
오민철의 눈이 커졌다.
“내 말이 틀린건가?”
“아니 굉장히 정확해. 그런데 지금 내가 놀란 건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까 갑자기 승표 스님 같은 기분이 들어서.”
“승표스님?”
“내 고향 뒷산 금전산에 있는 금강암 주지 스님이지. 출가하신 분이지만 유난히 나와 뜻이 잘 맞았어. 군에 있을 땐 면회까지 한 번오셨지. 우리 중대장이 스님이 면회 오는 놈은 너
밖에 못봤다고, 그런 스님에게 치킨을 사달라고 해서 쳐 먹는 놈도 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지.”
“스님에게 치킨을 사달라고 했다고?”
“우리의 우정이 워낙 깊어 그 정도 가지고는 전혀 구애받지 않아. 그런 승표스님이 지금 너와 똑같이 말했지. 민철아 자선은 잘산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단돈 십원도 어려운 이에게는
힘이고 용기다. 그들을 향해 웃는 것도 큰 자선이니라 하고 말씀했지. 그런데 너에게서 지금 승표 스님의 표정이 나타났어.”
권총수는 피식 웃자 오민철이 말을 이었다.
“그것 아닐까. 자선을 즐기는 사람의 얼굴에는 항상 기쁨이 넘친다. 조금전 네 얼굴이 아주 평안했어. 부드럽고 자비스러워 보였다고, 나무관세음보살.”
오민철이 합장을 하자 권총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추수가 끝난 북한의 들녘은 그야말로 휭 했다.
이삭을 줍는 사람들의 모습이 군데군데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아직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다.
북한의 식량난에 대해서는 외국에서도 가끔 뉴스를 통해 들었다.
아프리카의 식량난에는 국제사회의 도움이라도 이뤄지고 있지만 북한은 그것까지도 막는다.
외국의 도움이란 곧 권력 상층부의 무능력을 의미하는 것이고 자기 나라가 못산다는 걸 알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흐흠!”
권총수는 길게 숨을 내 쉬었다.
개인도 아닌 국가를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냥 한숨이 계속 나올 뿐이다.
기차가 룡천역에 멈췄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내렸고 새로 탑승한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가 거깁니까?”
오민철이 조식만에게 물었다.
“언젠가 김정은이 탄 열차가 지나가고 얼마되지 않아 엄청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는 역 말입니다.”
“맞습니다. 당시 사고를 놓고 김정은 암살설, 모사드 배후설등이 떠돌았지만 결과는 두 열차의 충돌이었죠.”
질산암모늄 비료를 실은 기차와 유조열차가 룡천역에서 정면 충돌했다는 것이 최종 조사보고서다.
물론 김정일은 자신의 열차가 지나가고 얼마지나지 않아 발생한 사고였기에 암살시도로 보고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어쨌든 질산암모늄과 기름을 혼합하면 ANFO라는 폭약물이 된다.
노후된 북한 철도로 인해 발생한 사고이며 결코 김정일을 죽이려는 암살과는 전혀 무관했다.
“이게 뭐야. 우리나라는 좋든 싫든 대형 사고가 생기면 그 일대는 새롭게 싹 바뀌어 삐까뻔쩍한데 여긴 여전히 허름하잖아.”
오래된 사고이긴 하지만 주위 풍경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새로 지었을텐데도 역사는 블록으로 쌓았고 지붕은 플라스틱 기와를 얹었다.
기차가 다시 움직였고 신의주에서 200킬로가 채 안되는 평양까지 지루하고 먼 여행은 계속 되었다.
평양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북한 정부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는 도시다.
특별한 허가를 받거나 아니면 평양시민증이 없이는 출입이 불가능 하다.
기차는 속도를 높였지만 권총수의 눈에는 제자리 걸음 하는 듯 했다.
길고도 지루한 기차여행이 끝났다.
평양에 기차가 도착한 것이다.
사람들이 내렸고 기차표가 아닌 평양을 들어오고 나갈 수 있는 신분증을 역무원들에게 내밀어 확인을 받았다.
조식만이 만들어 건네준 건 가짜가 아니다.
돈을 주고 브로커를 통해 직접 평양시에서 발행한 것이다.
평양역을 나가는 순간 조식만이 큰 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부장동지.”
정장 차림의 한 사내가 뒷짐을 지고 있다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오십 초반 가량의 짙은 푸른 색상의 싱글에 피가 묻어 나올 것 같은 빨간 넥타이를 맸다.
‘저 사람이 노동당 정치국 소속 농업부 차관 박철진’
조식만이 직접 거래하고 만나는 북한내 최고 권부에 올라 있는 인물이 직접 나온 것이다.
“직접 나왔다는 건?”
오민철이 목소리를 낮췄다.
“두 가지 겠지. 하나는 그만큼 받아 먹은 돈이 많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받을 돈, 즉 우리가 물주라는 걸 알고 기다리지 못하고 달려 나온 것이겠지.”
“개자식!”
권총수의 전음이 다급히 파고든다.
‘형 그런 감정 버려. 조금만 이상해도 눈치가 번개야. 내 마음속에 상대에 대한 혐오나 미움이 있으면 본의 아니게 얼굴에 드러나게 되어 있어’
오민철은 움찔했다.
권총수의 말이 얼음이라고 느껴질 만큼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무자비한 놈들이야. 오로지 의심하고 경계하며 살아온 놈들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돼. 잘못하면 우리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어’
오민철은 침을 삼켰다.
권총수의 말이 틀리지 않다.
3대가 세습할 만큼 강력한 철권통치를 하자면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뚫어 보는 눈을 가졌을 것이다.
저 놈이 내 앞에서 웃긴 해도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울고 있다고 슬픈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말이다.
“으음!”
오민철은 어금니를 물었다.
여긴 북한이다.
숨소리까지도 관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