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6화: 그 도시(1)
권총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은 양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무장지대 같은 곳이다.
“우린 압록강도 우리 땅으로 배웠잖아.”
오민철이 인상을 썼다.
압록강이 이상한 지대로 바뀐 것에 화가 난 것이다.
“내가 알기로 6,70년대까지만 해도 강은 북한 소유라는 것이 사실이었죠. 그런데 90년 이후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북한이 슬며시 눈 감아 버리더군요.”
“돈 있는 이웃에게 얻어 먹다보니 어쩔 수 없었겠지.”
덜커덩거리며 기차는 압록강 철교를 지났다.
드디어 강을 건너 북한에 들어섰다.
그 시간 권혜림은 인천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통일부가 마련한 기자회견 장소에는 수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자리를 채웠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는 만나서 무슨 얘기를 나누셨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권혜림은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주 반가워 했고 더 이상 남과 북이 서로를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하셨죠. 정치는 쉽게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도 경제를 비롯한 여러 민간분야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웃집처럼
가까워 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다음 분!”
백서그룹 직원, 권혜림의 수행비서 고철웅이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여기저기 앉아 있던 기자들이 손을 들었는데 고철웅이 한 명을 지목했다.
“거기 카키색 점퍼 입으신 분, 예 예!”
내가 맞냐는 듯 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키자 고철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KBC 전두몽 기자입니다. 금강산 개발은 백서보다 앞서 현도건설이 선점했습니다. 당시 북한정부는 분명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고 반 영구적으로의 독점 개발을 현도가 갖기로 합의했죠.
그런데 그들은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하며 판을 깼습니다.”
“전 기자님, 간단히 질문해 주시죠.”
고철웅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나올까봐 신경을 곤두 세운다.
“백서건설과도 판을 깨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런 일은 더는 없을 거에요.”
권혜림이 자신있게 받았다.
“무엇으로 자신하죠. 숟가락 들기 전에 말해놓고 숟가락 놓기 무섭게 번복하는 북한입니다.”
고철웅이 끼어 들었다.
“전 기자님 우린 다릅니다. 북한정부는 우릴 신뢰하고 있습니다. 다음 분 질문 해 주시죠.”
또다시 기자들이 벌떼처럼 손을 들었다.
“빨강색 넥타이 매신분, 예!”
정장을 한 기자 한 명이 일어났다.
“VTN 최명렬입니다.”
최명렬이란 기자는 마이크를 한번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전 백서건설과 태산건설이 컨소시엄을 결성해 수주한 사우디 대규모 유전개발 공사에 대해 한 가지 묻겠습니다.”
방북이 아닌 다른 질문이라는 말에 마이크를 잡고 있던 고철웅이 멈칫 한다.
그때 어느 기자가 여긴 방북 문제만 질문하는 회견장이잖습니까 하며 항의했다.
“압니다. 하지만 이 문제도 백서건설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어제 영국 BBC 인터넷판 보셨습니까?”
“어제?”
그러면서 권혜림은 고철웅을 돌아보았다.
“어제라면 우린 평양에 있었습니다만 알다시피 그곳에서 북한당국의 허가 없이 외부 언론과 접촉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죠.”
“어제 날짜 BBC인터넷 판에 한 사람의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다름 아닌 사우디아라비아 경제기획부장관 오타이프였습니다. 워낙 공사가 컸기 때문인지 BBC기자가 한국 건설사로
넘어가기까지 있었던 에피소드에 대해 물었는데 의미심장한 대답을 했더군요.”
처음에는 북한 방문에 관계된 질문만 하라고 다그치던 다른 기자들까지 일제히 최명렬 기자를 바라보았다.
권혜림의 얼굴도 처음과 달리 살짝 굳어 있었고 사회를 맡은 고철웅의 눈이 반짝 거린다.
“오타이프 장관은 사우디 정부 입장에서는 프랑스 건설사들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고 했죠. 그렇지만 이번 공사는 가격과 기술 말고 제3의 요소가 수주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말하면서 한 사람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누구죠?”
최명렬은 권혜림을 빤히 바라보았다.
“뜸들이지 말고 빨리 좀 말해봐요.”
그러자 기자들이 아우성을 쳤다.
“사막의 흑새입니다.”
“사막의 흑새.”
“어, 권총수라는 사람 아냐.”
최명렬 기자의 말이 이어졌다.
“사우디 쿠데타 진압의 일등공신인 그에게 자신이 물었다는군요. 블랙잭이 우리 사우디에서 일하는데 관공서 인허가 문제나 그 이외의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달라. 곧바로
조치할 것이라고, 그런데 그는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서 이번 유전개발공사 수주를 한국 회사로 밀수 없느냐고 말했다는 겁니다. 가격이나 기술에서 큰 차이가 없다면 한국의 백서와
태산으로 해달라고 말이죠.”
“사실입니까?”
누군가가 재빨리 권혜림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던데 말씀해 주시죠?”
집중된 기자들의 시선에 권혜림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재치 있고 순발력 좋다는 고철웅도 상황을 정리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했다.
“금시초문입니다. 전혀 아는 바 없습니다. 우린 최선을 다해 태산과 협력했고 아름다운 결과를 얻어 냈을 뿐입니다. 사우디 관계자가 무슨 뜻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우린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노력했다는 것이에요. 다음 질문해 주세요.”
권혜림이 직접 화제의 방향을 바꿨다.
“북한 고위층에서 남한 정부에 보내는 어떤 메시지를 받지는 않았습니까?”
“없습니다. 말했다시피 정치적인 얘기는 일체 꺼내지 않았죠.”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차 안의 공기는 무겁다.
이제 오타이프 경제기획부 장관이 보낸 축전의 뜻을 알게 되었다.
‘뭐지 이 더러운 기분’
권혜림의 얼굴은 잔뜩 성이 나 있었다.
감사한 것이 아니라 분노가 치밀고 낯이 뜨거워 진다.
한번도 도와달라는 말 한 적 없고 도움받을 생각도 없었다.
자신과 권총수는 물과 기름이다.
극적인 역전골을 넣었는데 갑자기 똥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다.
“고비서!”
“예 회장님!”
조수석에 앉은 고철웅이 상체를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알아봐요. 사우디쪽에 고비서 인맥이 조금 있다고 했죠?”
“미국 유학시절 몇몇 왕족의 후손들과 교류가 있었습니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쳐죽일 놈 지금 어디 있다고 했지?”
“연길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연길!”
권혜림은 나직히 중얼 거렸다.
문득 떠오르는 장면 하나가 있었다.
그건 영화였다.
어느 영화에서 보았는데 그쪽 사람들은 돈만 주면 사람을 닭 모가지 비틀어 죽이듯 한다고 했다.
그래서 구장철에게 물었더니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만 만만치 않다고 했다.
태국 필리핀등 동남아 못지 않는 폭력조직이 난립해 있다고 했다.
권혜림의 눈이 가늘어졌다.
“흑사회는 뭐고 삼합회는 뭐죠?”
고철웅이 깜짝 놀란다.
하도 권총수 때려 죽일 생각을 많이 하다보니 전 세계 폭력조직에 대한 공부를 자신도 모르게 했다.
“흑사회는 특별한 조직 이름이 아닌 중국의 뒷골목 범죄세계를 통칭해 일컫는 말입니다.”
“삼합회는?”
“한마디로 중화권의 마피아입니다. 흑사회가 중국의 크고 작은 소매치기, 마약, 청부폭력, 사기꾼 등 모든 범죄자들과 그들이 속한 집단을 통칭한다면 삼합회는 야쿠자와 같은 하나의
단일 조직이죠.”
고철웅은 삼합회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설명이 끝났을쯤 차는 사직터널을 지나가고 있었다.
차는 광화문을 지나 안국동 입구에서 멈췄다.
권혜림은 차에서 내려 좁은 골목으로 걸어들어 갔는데 안쪽에 ‘다정(茶亭)’이라는 원목으로 된 조그만 간판이 걸려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겉에서 보기와 달리 찻집은 상당이 넓고 컸다.
손님은 그다지 많지 않아 비교적 조용했는데 코끝으로 녹차향이 진하게 파고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정장을 한 두 명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혜림은 생긋 웃었다.
“늦었죠. 제가.”
“아닙니다. 기자회견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켜지는 일이 아니죠.”
늦어진 걸 이해한다는 얘기였다.
“녹차 한 잔 주세요.”
“우리도!”
개량 한복을 입고 다가온 여주인에게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청와대 비서관들이다.
김정은이 보낸 메시지를 전달 받기 위해 권혜림을 만나는 것이었다.
슥!
권혜림은 핸드백에서 서류 봉투 한 개를 꺼냈다.
누구도 뜯어 볼 수 없도록 입구를 봉인하고 김정은의 친필사인이 겹쳐졌다.
봉투를 열어 보려면 김정은의 사인에 흠결이 생긴다.
대통령 말고는 누구도 열어 본다는 건 불가능했다.
“다른 얘기는 없었어요. 대통령께 전하고 싶은 말은 봉투에 모두 들었다면서.”
김정은과 만찬 중에 있었던 얘길 해주었다.
두 사내는 빛나는 눈으로 권혜림의 얘길 듣고 있었고 그녀의 자켓 단추 한 개는 녹음기 역할을 하고 있다.
혹시 전달과정에 문제가 생길 걸 우려한 나름대로의 비상 조치다.
언젠가 남북회담에서 훈령이 조작된 엄청난 사건이 있었다.
1992년 9월16일 평양에서 열린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 둘째 날 아침 남쪽의 대표단은 서울에서 온 뜻밖의 훈령을 받았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관련해 북한이 요구하는 ‘이모씨 송환건’에 대해 3개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지 않으면 합의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회담에 앞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남북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과 판문점 면회소 설치 문제를 반드시 실현하라고 지시했다.
그때 북한은 자신을 고향으로 보내달라는 남쪽의 미전향 장기수 이모씨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었다.
‘대표단은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과 판문점 면회소 설치만 북쪽이 응하면 이모씨를 송환한다는 협상전략을 대통령으로부터 재가 받았다’
그런데 당시 대표단 대변인인 특보 오동복은 납북된 동진호 어부들의 송환도 추가하는 협상전술까지 내밀었다.
북한이 동진호 어부 송환을 받아들이면 좋고, 안 된다면 앞서 두 가지 조건으로 합의하자는 것이었다.
다행히 고위급회담 첫날부터 북한은 의외로 타협적인 자세로 나와서, 애초에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던 교류협력·군사·정치 3개 분과 모두에서 부속합의서가 일괄타결됐다.
북한은 또 이모씨만 송환하면 이산가족 방문과 면회소 설치도 수용하겠다고 합의해줬다.
여기까지는 남쪽으로서는 모든 협상전략 조건이 충족된 큰 성공이었다.
대표단은 이런 합의를 알리며 최종 승인을 해달라는 ‘청훈’(외국에 나가 있는 대사·공사·사절 등이 본국 정부에 집무에 관한 명령이나 지시를 청함)을 보냈다.
그런데 다음날 서울에서 애초에 ‘동진호 어부 송환’이 관철 안 되면 이산가족 상봉도 합의하지 말라는 훈령이 왔다.
이는 애초 대통령이 승인했던 협상 조건을 뒤집는 것이었다
동진호 선원 문제는 남북 협상의제에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에 매달려 다른 안건들이 파행되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내렸고 확실히 못까지 박았다.
어쨌든 서울에서 온 훈령이 이러하므로 대표단은 이산가족 상봉 문제 협상을 결렬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빈 손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대표단이 서울에 오자 놀라운 일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