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5화: 역공(2)
오민철이 권총수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야, 그냥 정리하자.”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까지 내게 기회를 주는데 거절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내 가족들이 아버지이고 남편인 날 어찌 생각할지 그게 두렵습니다.”
“어이, 양추수씨, 사내자식이 일을 벌이다 보면 가족에게 피해가 가는 건 당연한 것이오. 우리가 지금 회사 비즈니스를 벌이는 줄 아십니까?”
“난 보위성 제5국 소속 참매 팀 조장.”
양추수는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림금련은 불빛 흐릿한 바에 앉아 있었다.
달그락달그락!
언더락스 잔을 좌우로 움직이자 안에 들어 있는 얼음조각이 부딪치며 소리를 낸다.
“미스터 천 지금 몇시죠?”
마른 행주로 술잔을 닦고 있는 빠텐을 향해 묻는다.
미스터 천이라는 빠텐은 손목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새벽 1시 10분 전입니다.”
삐이걱!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림금련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회색 중절모에 카키색 바바리를 걸친 육십 후반 가량의 노인이 들어섰다.
노인은 오른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실내를 둘러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컵을 닦던 빠텐 천삼둥이 노인을 보며 말했다.
탁자 십여 개를 놓고 있는 그다지 큰 바는 아니었지만 손님들이 꽉 차 있었다.
“괜찮으시면 이곳에 앉으시죠.”
림금련이 앉아 있는 바를 가리켰다.
바는 3미터 정도 길이로 의자 세 개가 놓여 있었는데 맨 오른쪽에 림금련이 앉았다.
천삼둥은 맨 왼쪽 의자가 있는 곳을 가리켰는데 초면인 두 사람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좌석 한 개 정도의 간격을 띄운 것으로 보였다.
“감사합니다.”
노인은 중절모에 살짝 손을 얹으며 예를 표시하고 자리에 앉았다.
“번번 위스키 있소?”
“물론입니다.”
“짐법 화이트 라벨.”
“예!”
천삼둥이 웃었다.
그건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미국 캔터키주를 대표하는 버번 위스키가 비록 조선족 자치주라고 하지만 중국땅에 버젓이 판매 되고 있는 것이 놀랍다는 듯 노인은 술병을 이리저리 살폈다.
딱!
마개를 연 노인은 스트레이트 잔에 술을 채워 단숨에 마셨다.
40도짜리다.
이곳 연길시는 지리적 지역적 영향으로 겨울이면 영하 2,30도를 예사로 오르내린다.
그러다 보니 도수가 높은 술이 의외로 잘 팔리는데 러시아의 보드카가 많이 들어와 있다.
또한 중국내에서도 연길은 경제적 여유가 다소 있는 편이어서 고급 양주 역시 소비가 제일 많다.
그런면에서 버번 위스키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중간 정도의 경제적 위치를 가진 사람들이 즐겨 찾는데 노인 또한 그런 조선족중 한 명이라고 빠텐 천삼둥은 판단했다.
노인은 두 번째 잔도 망설임 없이 비웠다.
“안주 좀 드릴까요?”
중국의 어느 도시보다 경제적으로 앞서고 있는 이 지역이지만 버번 위스키를 서슴없이 시켜 마실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천삼둥은 돈 없어서 안주를 시키지 않을 노인으로는 보지 않은 것이다.
넉넉한 주머니를 갖고서도 절약과 절제를 아는 사람에게는 서비스가 필요하다.
그들은 다음에 또 찾아오는 손님이 될 가능성이 높다.
노인은 미소를 지었다.
주면 거절하지는 않겠다는 행동이다.
빠텐 천삼둥은 익숙한 솜씨로 사과와 귤을 예쁘게 깍고 쪼개어 접시에 담아 냈다.
“고맙소!”
노인은 작은 포크로 사과 한 조각을 찍어 입에 넣었다.
“어디 사과입니까?”
“해주 사과입니다.”
“어쩐지.”
노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천삼둥이 물었다.
“신맛이 강하군요. 남한 사과는 달고 맛이 좋던데, 물론 비싼 것이 흠이긴 해도.”
“남한 사과 맛있는 건 모두가 알죠. 워낙 가격이 월등하다 보니.”
비싼 관계로 함부로 가져다 놓을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여기서는 해주 사과가 인기가 있습니다. 저렴하고 그런대로 먹을만 하다는 평입니다.”
“사과맛을 아는 사람들에게 신맛은 결코 환영받지 못하죠. 물론 신맛을 즐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과일은 달아야 좋은 것 아니겠소.”
“그건 그렇습니다.”
“정말 시군. 이런 사과를 최고라고 자화자찬하다니.”
늙을수록 신맛에 약하다.
그래서인지 노인은 한쪽 눈을 깜빡거리며 고통스럽게 사과를 씹었다.
사과를 먹으면서 해주 사과의 품질이 무척 저질이라는 혹평까지 주저하지 않는다.
“아무튼 잘 마셨소. 남은 술은 잘 키핑해 두시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미화 백 달러 한 장을 내놨다.
천삼둥이 깜짝 놀란다.
거액이다.
“나머진 자네의 아름다운 마음 값이네.”
안주를 내주는 호의에 감사한다는 뜻이었다.
노인은 천천히 지팡이를 짚고 가게 밖으로 걸어 사라졌다.
딱딱!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걷는다.
골목은 가로등이 있지만 그다지 밝지 못해 그늘진 곳이 많다.
척!
노인은 걸음을 멈췄다.
20여 미터 떨어진 골목 맞은편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누구신가? 내게 볼일이 있는 모양이군요?”
상대는 천천히 다가왔는데 노인의 눈이 빛난다.
조금전 바에서 보았던 림금련이었다.
그녀는 소음기를 끼운 권총을 늘어 뜨리고 있었는데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물었다.
“죽을 준비는 됐느냐?”
“왜 이러시오?”
“늙은이 넌 최고 존엄을 모독했다.”
북한에서 최고 존엄은 김정은 위원장이다.
“내가 뭘 모독했단 말이오?”
“네놈 입으로 떠벌렸으면서 시치미를 뗀단 말이냐?”
언젠가 텔레비전 뉴스에 김정은이 해주 사과농장에서 수확한 사과를 들고 최고라며 칭찬하던 모습이 보도 되었다.
림금련은 노인이 바에서 이런 사과를 최고라고 자찬하더라고 비아냥 댄 것에 분노하여 쫓아 왔다.
김정은을 모독한 것이다.
히죽!
갑자기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보위성 고위 간부라고 하여 쉽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의외로군. 이토록 쉽게 낚일 줄이야.”
파팟!
림금련의 눈이 빛난다.
“억!”
내려뜨린 권총을 들어 올리려는데 손이 꼼짝하지 않는다.
“충성이 지나쳐도 문제지. 정보원이 위원장을 비난했다고 이렇게 자제를 못하고 날뛰면 되겠소.”
재빨리 왼손으로 권총을 옮기려 했으나 늦었다.
양 손 모두 얼어붙었다.
“늙은이...넌?”
우두둑!
노인의 얼굴이 밀가루 반죽하듯 우그러지고 쭈그러진다.
“으허헉!”
림금련은 기겁했다.
사람의 얼굴이 뭉개지고 흐트러지며 여러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듣도 보지도 못한 기상천외한 현상 앞에 두 눈은 커질 대로 커졌다.
스윽윽!
한참을 출렁거리던 얼굴이 마침내 한 사내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권총수!”
림금련이 소리쳤다.
권총수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이스라엘 영화던가 본지가 제법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하군. 모사드 공작원들의 활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였는데 거기에 보면 당신이 배워야 할 장면 하나가 나오지.”
스윽!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담배갑을 꺼낸다.
권총수는 이로 담배 한 개비를 물어 꺼내더니 라이터를 켰다.
탁탁!
바람이 불면서 라이터 불이 자꾸 꺼지자 양손으로 바람을 가리고 붙였다.
“반 이스라엘을 외치며 이란과 손잡고 테러를 자행하는 헤즈볼라의 넘버 3 핫산을 스위스에서 체포했소. 무려 7년 동안 숨바꼭질을 한 끝에 검거한 거죠. 그런데 때마침 영국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소. 유학중인 딸이 헤즈볼라를 지원하는 세력에게 납치되었다는 협박전화였소. 영국에 유학중인 딸을 둔 모사드 요원이 있었는데 딸과 핫산을 교환하자는 내용의 전화였지?”
권총수는 림금련을 지그시 보았다.
“자식은 어떤 것보다 소중하지. 그렇지만 그는 핫산을 풀어주지 않고 이스라엘까지 끌고 갔소. 물론 딸은 살해 당했지. 가족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정보원은 나라가 우선인거요. 한
사람이 우선인 것이 아니라.”
권총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더니 림금련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기 시작했다.
누가봐도 조롱이다.
“당신이 그렇게 존경하고 숭배하는 최고 존엄을 모욕했다고 북한 정권이 무너지는 것인가 아니면 그가 죽는가? 그것도 아니면 뭔가?”
림금련은 어금니를 물었다.
낚시에 걸려들었다.
그리고 이미 게임이 끝났음을 짐작했다.
자신이 그곳 바에 있는 걸 아는 사람은 양추수 뿐이다.
양추수가 가르쳐 줬다는 것이고 지금쯤 죽었거나 아니면 권총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목적이 뭐냐?”
림금련이 물었다.
“난 내 사업을 할 뿐이오. 북한 정권과는 아무런 관심도 갖고 있지 않다는 얘기지요. 전역한 특수부대 요원 몇 명 데려간다고 체제가 바뀌거나 당신들의 최고 존엄의 신변이 위험해지는
것도 아니죠.”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
자신들 눈으로는 아주 심각하게 본다는 뜻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사업가요. 장사꾼이란 얘기죠. 장사하는 사람이 돈 말고 뭘 필요로 하겠소. 김씨들의 권력이 아주 허약한가 봅니다. 이런 일에 민감한 것이 말입니다.”
그때였다. 갑자기 골목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두두두두!
갑작스런 총소리에 림금련의 눈이 커졌다.
총소리는 잠깐 들렸다가 조용해졌고 잠시 후 권총수 등 뒤로부터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세 놈이더라고, 보냈어.”
다가온 사람은 오민철이었다.
림금련이 술을 마시던 바(BAR), 파이널(final)은 북한 국가보위성 연길시 안가이기도 했다.
술을 팔아 공작금도 마련하고 정보도 얻기 위해 운영되고 있다.
빠텐으로 있던 천삼둥 역시 공작원중 한 명이다.
림금련은 권총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먼저 움직였고 천삼둥과 나머지 공작원들은 뒤따라 온 것이다.
권총수는 양추수로부터 암살팀의 인원이 더 있다는 얘길 들었고 임금련을 지원하기 위해 온 것을 알고 있었다.
이왕 청소를 하려면 깨끗하게 끝내야 한다.
첩보계에서 하나의 공작선이 끊기면 다시 세우는데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당분간 북한 특수부대 전역자들을 상대로 하는 블랙잭의 사업은 지속되어야 하는데 오늘 같은 잦은 충돌이 계속 이어지면 곤란하다.
그래서 오늘 모든 걸 정리하고자 마음먹었다.
이렇게 북한이 수십 년 동안 유지해 오던 연길시내 보위성 조직도는 오늘로써 완전히 파괴 위기에 처했다.
분위기는 살벌해지겠지만 당분간 귀찮은 일은 없을 것이다.
저벅저벅!
권총수는 천천히 걸어가 림금련의 손에 들린 권총을 잡았다.
“잘가시오.”
여자라는 것을 감안해 편히 보내기로 했다.
푸슉!
정확히 총알이 이마를 관통했다.
림금련은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고 골목으로 한줄기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기차가 단둥역에 멈췄다.
단둥역에서 적지 않은 승객들이 올랐는데 거의가 보따리 장사꾼들이었다.
북한과 보따리 무역을 하는 조선족 상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이곳 선양이나 연길시 쪽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돌아가는 북한 주민이다.
하지만 열차에는 북한 사람보다 조선족이나 중국 사람이 더 많다고 조식만은 말했다.
그들은 관광객들이다.
권총수는 연길시에서 오렌지를 대규모로 매매하는 풍년상회 사장의 신분이며 이름은 리마홍이다.
풍년상회는 진짜 있고 주인 이름 또한 리마홍이다.
며칠동안 권총수가 그의 신분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반면 오민철은 동남아에서 들어오는 열대과일 망고스틴 수입업자 강만수였다.
망고스틴에 대해 미리 공부를 했지만 막상 북한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에 가슴 두근거림을 피할 수는 없었다.
조식만은 평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과일이 오렌지와 망고스틴이라고 했다.
열차가 드디어 압록강 철교에 진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