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624화 (624/651)

제624화: 역공(1)

최루 연기는 오로지 피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푸욱!

문 밖으로 뛰쳐 나오는 순간 사내들은 목이 따가움을 느꼈다.

당연히 최루가스를 마셨으므로 목이 따가운 건 정상적인 증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건 최루가스로 인한 따끔함이 아니었다.

예리한 칼이 목을 지나면서 남긴 아픔이었다.

사내들은 서너 걸음 뛰다 복도에 나동그라지기 시작했다.

꽈당!

퍼억!

복도는 순식간에 핏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1550호 객실에서 맨 마지막으로 뛰쳐 나온 양추수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아직 제대로 복도 상황을 보지 못했다.

콜룩콜룩!

아무리 525정찰대대의 현역 군인이지만 최루가스 앞에서는 양추수도 아무런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양추수는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면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뛰었다.

일단은 피해야 한다.

자신들도 함정에 빠졌지만 중국 공안에 신고가 들어갔을 것이며 지금쯤 출동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누르기 위해 가까스로 눈을 떴지만 범벅이 된 눈물로 잘 보이지 않는다.

움찔!

양추수는 놀랐는데 아무도 없다.

그러고 보니 먼저 방을 나온 부하들이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는 것이 순서다.

그런데 주위에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갑작스런 최루가스로 인해 이성의 끈이 잠시 흔들렸고 정신이 들면서 뭔가 아찔하다는 걸 느꼈다.

함정이라는 것이 단순히 최루탄 한 가지였을리 없다.

그으응!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퍼억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등을 떠밀었다.

그 바람에 양추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머리를 부닥치며 들어갔다.

곧 문이 닫히며 양추수는 고개를 들었다.

흠칫!

두 사내가 자신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나란히 서 있었다.

히죽!

왼쪽 뿔테안경에 수염이 있는 사내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마치 당황할 것 없다는 듯 등까지 토닥였다.

양추수는 재빨리 허리에 꽂아 놓은 권총을 잡기 위해 더듬거렸지만 없었다.

그 대신 뿔테 안경에 수염을 기른 사내가 권총 한 자루를 쥐고 살펴보았다.

부르르!

자신의 권총이다.

이리저리 살피던 권총을 사내는 자기 것인 양 허리에 꽂아 넣는다.

쨍!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퍼어억!

왼쪽 사내가 사정없이 등을 앞으로 밀었다.

바깥으로 나온 양추수는 너무 충격을 받아 다시 섰는데 사내가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스스로 좀 알아서 하시죠.”

빨리 가자고 재촉한다.

양추수는 두 사내를 따라 걸어갔고 검정색 승용차에 강제로 태워졌다.

부우웅!

승용차가 호텔 주차장을 빠져 나갈 때 중국 국가안전부소속 요원들이 호텔로 들이닥쳤다.

리콴총이 보였고 부하들로 보이는 십여 명의 사내들이 호텔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이때 엘리베이터는 모두가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권총수는 몰래 찍은 양추수 사진을 조식만에게 보냈다.

조식만으로부터 답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북한 보위성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자신도 몇 번 본 인물로 굉장히 공격적이며 거칠다고 했다.

탈북자들 사이에서는 저승사자로 알려진 인물이자 북한 탈출을 돕던 남한의 종교계 인물 십여 명이 실종된 것도 그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식당 말고 권총수가 두 번째로 양추수를 본 것은 호텔 주차장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호텔과 연계된 렌트카 업체에서 차량을 빌려 돌아오는 길이었다.

양추수가 정장을 한 호텔 직원과 뭔가 얘기를 나누더니 두 장의 카드를 받고 있었다.

뭔가 의심스런 생각에 호텔직원을 뒤따라가 신원을 확인한 결과 지배인이었다.

지배인과 양추수의 은밀한 만남은 권총수의 눈에는 절대 대충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권총수는 내공을 끌어 올려 지배인으로부터 양추수에게 전달된 카드에 대한 장면을 좀 더 선명하게 끌어 올렸다.

그리고 곧바로 입구에 꽂힌 객실 키를 살핀 결과 지배인 손에서 양추수 손에 넘겨진 카드와 동일하다는 걸 알았다.

지배인의 손을 통해 객실 키가 외부인에게 넘어갔다는 건 자신들에게 위험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권총수는 다시 조식만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북한정부와 카이로스 호텔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물었다.

조식만은 북한자금이 조금 들어갔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고 대답했다.

분명치 않으면 분명한 것이다.

정보원은 나에게 행운이 있겠지 보다는 난 운이 없을 거야 하며 항상 불리한 위치에 세워 놓을 때 생존 확률이 높아진다는 맥보란의 말을 상기됐다.

“우릴 공격할거야.”

권총수는 확신했다.

“그럼 어떡하지? 우린 빈손이잖아.”

오민철이 눈을 빛냈다.

여긴 중국이다.

총기를 사용할 때에는 과감히 써야하지만 가급적 자제하는 것이 좋다.

더구나 호텔에서 총격전이란 결코 앞으로 사업을 하는데 좋은 결과를 불러오지 못한다.

특히 중국과 사막의 흑새는 혈채가 있다.

북한은 은밀히 자신을 노리지만 중국 안전부요원들은 대로에서라도 자신을 발견하면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그래서 대북사업과 함께 지금 가장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이 안전부소속의 고위관리를 포섭하는 것이었다.

수시로 안전부의 움직임을 귀띔만 받아도 사업은 무리 없이 진행할 자신이 있었다.

지금 조식만은 포섭할 만한 안전부 고위관리를 찾고 있다.

최루탄은 조식만에게 받았고 장도(長刀)에 가까운 70센티 짜리 회칼을 준비하여 거의 정신을 잃다시피 하며 객실을 뛰쳐 나온 보위성 요원들의 목을 벤 것이다.

달리던 차가 멈췄다.

“조장님 내리시죠.”

내리지 않고 앉아 있자 오민철이 허리를 숙여 차 안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양추수는 천천히 내렸다.

강이 흐른다.

해란강(海蘭江)이다.

겨울에 접어들고 있어 수량은 많이 줄었지만 언젠가 이곳을 찾아 부하들과 오붓한 한때를 보낸 적이 있었다.

탈북자를 돕던 남조선 목사 두 명을 땅에 파묻은 공로를 인정받아 하루 휴가를 받은 것이다.

민물 매운탕에 술까지 곁들이며 오랜만에 세상사는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더욱 절치부심 공화국에 충성하리라 맹세를 했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한 페이지로 기억되는 장소에 왔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어쩌면 여기가 무덤이 될 수도 있다.

아직 고문을 받아 본 적은 없다.

주로 고문을 가하는 입장에 있었다.

고문이 가해지면 대부분 입을 여는데 아주 가끔씩 끝까지 버티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자신은 어느 쪽일까

고문 시작하자마자 입을 열까 아니면 결코 죽을지언정 당과 위원장 동지를 위해 침묵하고 죽을까.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갑자기 오민철이 노래를 불렀다.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양추수의 눈이 빛난다.

북한에서는 결코 불러서는 안되는 금지곡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감정까지 금지된 건 아니어서 가끔 콧노래로 흥얼거릴 때면 묘하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런데 지금 선구자 노래때문인가 절대절명의 상황인데 마음이 흔들린다.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오민철의 노래는 2절을 건너 3절로 이어졌다.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양추수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따라 불렀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양추수는 뜨거워지는 가슴에 독립에는 남과 북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낀다.

“작사 작곡가 모두가 친일 행적으로 시끄럽긴 하지만 부대 있을 때 많이 불렀지.”

권총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인이라면 이 노래를 부를 때 누구든 뜨거운 기운을 느낄거야.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고 결코 적을 용서치 않겠다는 기세를 태우는 거지. 일제 때 내가 있었다면 나카무라 새끼들

모조리 죽여 버리는건데.”

그때 음성이 들렸다.

“양추수씨 이리로 오세요.”

권총수의 목소리다.

양추수는 멈칫했다.

자신의 목줄을 틀어 쥐고 있는 상대치고 음성이 너무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양추수는 주춤거리며 걸어가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앉았다.

양추수가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자 권총수는 담배를 권했다.

딸칵!

불을 붙여주고 권총수는 어둠에 덮인 강을 내려다보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잘 들어야 할 것입니다. 양추수씨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보위성으로부터 무슨 지시를 어떻게 전달 받았는지 내게 모든 걸 털어놓는 일이고.”

권총수는 기침을 하며 말을 멈췄다.

“두 번째는 나를 따라 남한으로 가는 것입니다.”

결국 두 가지라고 했지만 한 가지나 마찬가지였다.

살고 싶으면 모든 걸 털어 놓아라.

털어 놓으면 당신을 데리고 남한으로 가겠다.

살길을 열어주겠다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양추수는 권총수가 건네준 말보로 레드를 빨아 들였다.

북한 담배처럼 독하다.

한 모금 삼키자 목이 따끔 거린다.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경고문이 붙었지만 북한의 흡연율은 굉장이 높았다.

어쩌면 갑갑한 삶을 담배 한 개비로 위로 받는지 모른다는 생각하곤 했다.

“시간이 지체 될수록 상부에서는 당신을 의심하기 시작하겠죠.”

빨리 결정하라는 독촉이었다.

“가족...은?”

양추수 목소리가 떨린다.

가족 얘기를 꺼냈다는 건 상황에 따라 협조할 의향이 있다는 뜻도 된다.

“가족이 선택을 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되겠죠. 가족과 만날 수 있도록 해드린다는 약속은 하지 못하지만 최선은 다해 보겠습니다. 얘길 들으니 돈만 있으면 탈북자 가족으로

분류되어도 그다지 큰 고생은 않는다더군요.”

스윽!

양추수가 고개를 돌렸다.

자신에게는 가족을 그런 식으로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대피시킬 돈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사람이 그러는데 오천 달러면 위험은 완전히 제거된다더군요.”

조식만의 얘기였는데 양추수는 크게 반색한 얼굴을 하지 못했다.

탈북자와 정치범, 또는 북한의 고위 공직자의 남한 귀환은 죄의 경중에서 차이가 있다.

자신 같은 경우 정보원이기 때문에 적지 않은 비밀이 남한으로 빠져 나갈 것이 뻔하고 당연히 가족에 대한 처벌 수위가 일반 탈북자들보다 높을 것은 자명했다.

오천 달러로는 어림없다는 얘기다.

“가족이 안전할 수 있을 만큼의 자금은 지원하겠습니다.”

그래도 양추수는 주저했다.

“양추수씨!”

침묵하던 오민철이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 이런 제의면 오케이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자동소총까지 동원하여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이토록 포근하게 감싸준단 말입니까? 나 같으면 이미

방아쇠 당겼던지 뒈지게 뺑뺑이 돌렸을거요.”

후우!

양추수는 길게 연기를 내 뿜었다.

담배는 거의 필터까지 타들어 오고 있었다.

망설인다.

망설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의 미래가 달린 일이다.

“당신 말을 내가 믿어야 합니까?”

“아이 진짜, 싫으면 관두고.”

오민철이 버럭 소릴 질렀다.

그 만큼 시간을 주었으면 이제 협조를 해야 할 것 아니냐는 짜증이었다.

“사람을 못 믿어.”

오민철이 눈을 부릅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