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9화: 개박살(1)
벽돌을 쌓아 만들어 놓은 걸 보니 절에서 이용하는 쓰레기장으로 보였다.
검은 그을음이 끼었다.
아마 태울 수 있는 건 여기서 태우기도 하는 듯 했다.
휙!
꽁초를 던지고 돌아서려던 권총수가 멈췄다.
천천히 걸어 쓰레기장 가까이 다가선 권총수 눈에 찌그러져 버려진 향로(香爐)가 들어왔다.
“제법 묵직하네.”
권총수는 청동으로 된 향로를 주워들고 살피더니 툭툭 쓰레기 담벽에 한 번 때려보고 나서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향로 아냐? 어디 쓰려고?”
“향 피워 줘야지.”
오민철은 움찔했다.
“그 여자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야. 다섯 놈이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날 향한 살인청부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땐 어쩔 수 없지.”
다섯 명을 죽여 마지막 경고를 보내겠다는 뜻이다.
오민철은 주머니에서 보자기를 꺼내더니 이슬람 여인들의 히잡처럼 머리에 썼다.
그리고 마스크를 썼는데 눈만 드러내고 있어 누군지 알아 볼 수가 없다.
일주문을 들어선 두 사람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여 미터 떨어진 곳으로 단층의 요사채가 있었는데 오민철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권총수는 다르다.
어느 정도 자신을 죽일 대책이 마련된 듯 가볍게 농담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오민철의 눈이 빛나면서 권총수 오른손에 들린 고장 난 청동향로에 머물렀다.
피식!
향을 피운다는 건 죽인다는 의미도 있지만 권총수는 다섯 명을 죽이는데 사용할 공격용 무기이기도 했다.
조직폭력의 세계의 용어로는 연장이라고 한다.
다섯 명의 사내들을 상대할 연장으로 청동향로를 택한 것이다.
탁!
권총수는 구두를 신은 발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진한 차 향기였다.
예고 없이 불쑥 들어선 권총수를 향해 사내들은 이마를 찡그렸다.
자신들 말고는 이 방에 아무도 들어올 사람은 없다.
“어어!”
그때 인천 연안부두파 우세종의 입에서 다급성이 흘러나왔다.
너무 놀란 나머지 얼른 말하지 못하고 누군지는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권...권총수!”
해방이후 대구지역을 처음 하나로 통일했다는 북두파 길성준이 더듬거렸다.
권총수는 입구를 막고 서서 의자에 앉은 다섯 명을 천천히 살폈다.
그때, 요사채 끝방에서 비명소리가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아아악”
“끅!”
오민철은 이미 작업에 들어간 듯 했다.
“지금 죽어도 여한들은 없겠죠.”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우세종이 품속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그대로 달려들었다.
탁!
권총수의 왼손이 찔러들어오는 우세종의 오른 손목을 낚아 쥐고 들고 있는 청동향로로 휘둘렀다.
뻑!
청동향로가 우세종의 얼굴을 정면으로 찍었다.
파아아!
피가 사방으로 튄다.
쿠웅!
잡았던 팔목을 놓자 우세종이 쓰러졌는데 죽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권총수의 얼굴과 앞가슴으로 피가 범벅이다.
꾸울꺽!
가독성의 목젖이 힘차게 요동을 했다.
청동향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구라도 청동향로를 들어 상대의 얼굴 정도는 찍을 수 있다.
놀라운 건 스치기만 해도 베이는 회칼을 쥔 손목을 잡았다는 것이다.
이 바닥 프로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을 권총수는 움직이지 않는 손목을 낚아채듯 간단하게 잡아 버린 것이다.
스윽!
침묵하고 있던 광주의 서거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주 동방파 두목이자 무등산에 있는 레인보우호텔 대표이기도 하다.
삭!
칼을 뽑는다.
그 역시 회칼이었는데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더니 권총수를 향해 자세를 낮췄다.
조금전 우세종이 어떻게 당했는지 본 탓에 함부로 공격하지 않았다.
그런 서거룩을 바라보는 권총수는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상대는 강호의 절정고수도 아니다.
강호의 고수라면 이쪽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도 꼼짝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확실한 틈을 얻기 위한 나름대로의 기회포착을 위한 전략인 것이다.
그러나 뒷골목 건달로 살아온 사내가 그런 강호무사들의 고품격 개인전술을 알 리 없다.
권총수가 서 있자 참지 못하고 바로 들어온다.
탁!
서거룩 역시 권총수에게 손목이 잡혔다.
그런데 히죽 웃으며 잡히지 않은 왼손을 움직인다.
허리 뒤에서 다른 칼 하나를 꺼내 재빨리 향로를 든 권총수를 찔렀다.
서거룩만의 회심의 일격이 펼쳐진 것이다.
콱!
하지만 권총수는 향로를 놓으며 서거룩의 왼손까지 잡았다.
서거룩은 왼손까지 잡힐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다.
그때 권총수는 양손에 힘을 주었다.
뚝!
뚜욱!
양팔목이 동시에 부러졌다.
마른 나뭇가지 꺾듯 젖혀 부러뜨려 버린다.
“윽!”
서거룩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는데 부러진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았다.
엄청난 고통도 고통이지만 손목 두 개가 동시에 부러졌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투툭!
서거룩의 양손에 쥔 회칼은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권총수가 허리를 구부려 떨어진 두 개의 회칼을 주워 들었다.
“후구히키보초(ふぐ引き包丁), 잘못 요리했다간 독살을 피하지 못하는 복어 전문 칼인데.”
번쩍!
갑자기 실내에 눈부신 광채가 피어났다.
눈을 뜰 수조차 없을 만큼 폭발한 은광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방안은 아무 일도 없다.
사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지만 분명히 빛이 폭발한 건 보았다.
쿠우웅!
그때 서 있던 서거룩의 육중한 몸이 나동그라졌다.
당연히 시선들이 서거룩에게 쏠렸는데 하나같이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우훕!”
서거룩의 얼굴이다.
얼굴에 바둑판처럼 선이 생겨났다.
가로세로 정확한 크기와 사이즈에 맞춘 칼자국, 그러나 피는 흐르지 않는다.
칼끝을 통해 들어간 극양의 내기가 얼굴의 피를 모두 말려 버린 것이다.
집을 짓는 목수가 먹줄을 튕겨 자국을 내는 것 같은 칼자국.
피가 흐르지 않아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칼자국은 세 사내를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했다.
“캡틴이라고 부른다고 들었소?”
가장 연장자답게 가독성이 입을 열었다.
권총수는 가독성을 보았다.
“우린 계획만 세우고 있었소.”
권총수 눈이 좁아진다.
놀라운 말이었다.
부산 칠성회라고 하면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에서 가장 단단하고 체계가 잘 잡힌 폭력조직으로 알려졌다.
자잘한 사건들은 있었지만 조직을 통째 뒤엎을 만한 굵직한 반란은 없었을 만큼 엄격한 조직이다.
그 조직의 우두머리가 지금 고백을 하고 있었다.
당신을 공격한 것도 아니고 계획만 세우고 있는데 이런 식의 습격은 너무 일방적인 것 아니냐는 하소연이다.
“더 이상 누구든 날 상대로 뭔가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입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아무리 때려도 바위는 꿈쩍도 않는다는 걸 보여주어 혹시라도 돈 몇 푼에 혹하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어리석은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경고였다.
촥!
촤아악!
두 개의 칼이 엑스(X)로 교차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큰 울림에 가독성은 눈을 감아 버린다.
쿠쿠쿵!
당당한 체구의 사내들이 넘어진다.
단순히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조선시대 전장처럼 목과 몸이 따로 뒹굴었다.
목이 잘린 것이다.
잘린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순식간에 방안을 적셨다.
이제 남은 사람은 가독성 자신 한 명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가장 연장자이고 선배인데 품에 칼을 넣고 다닌다는 것도 격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 경호원인 백두진이 갖고 있다.
탁!
권총수가 쥐고 있던 칼 한 개를 탁자 위에 올려 놓는다.
흠칫!
가독성이 놀란다.
자신을 죽이지 않고 탁자 위에 칼을 올려 놓는 권총수의 의도를 알기 때문이다.
당신만은 체면을 생각해서 자살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야쿠자쪽 사람들은 싸움이 기울면 적에게 잡혀 죽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더군요.”
가독성은 입을 다물었다.
권총수는 몇 번 야쿠자의 공격도 받은 경험이 있다.
그중 지금도 기억나는 이는 이나가와카이 계파중 한곳인 송죽매(쇼츠쿠바이타구조)우두머리 후쿠오였다.
데리고 온 부하들 아홉 명이 죽자 자살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권총수에게 청했다.
그들에게 자살을 허락하는 것도 자비로 여긴 듯 보였다.
“으음!”
피할 수 없다.
타살을 당한 네 사내에 비해 자신은 자살을 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결 명예를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겠다는 마음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 방을 살아 나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휘두르는 칼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칼로 바둑판을 만드는 신비막측한 사내 앞에서 어떻게 나간단 말인가.
흐흠!
가독성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길이 없다.
꽉 막혔다.
그렇다고 순순히 자살을 할 수는 더욱 없다.
휘익!
죽을 때 죽더라도 달려드는 길 뿐이다.
자살하라고 건네준 칼을 들어 권총수를 찔렀다.
푸욱!
가독성은 목이 뜨끔했다.
자신의 오른손에 쥔 칼은 아직 채 뻗지도 못한 상태인데 권총수의 칼이 목구멍에 박혀 있었다.
빨라도 이렇게 빠를 수가 있는가.
목구멍이 막혀 숨을 쉴 수가 없다.
숨을 못 쉬게 되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관자놀이에 힘줄이 불거진다.
부들부들!
온몸을 떤다.
눈알이 튀어 나올 듯 했고 호흡이 어려워지면서 허리가 나뭇가지처럼 꺾인다.
툭!
거의 같은 순간 권총수는 칼을 손에서 놓아 버렸다.
퍽!
가독성은 무릎을 꿇고 방바닥에 주저 앉는다.
칼에 목이 꽂혀 있어 숨을 여전히 쉬지 못했고 크게 경련을 하더니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사자가 얼룩말의 목을 물게 되면 네 다리를 바르르 떤다.
숨이 막히기 때문인데 지금 가독성이 사지를 떨더니 축 늘어졌다.
죽은 것이다.
권총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는데 오민철이 기다리고 있었다.
왼쪽 방도 조용했다.
“살려는 뒀어.”
오민철이 씨익 웃는다.
죽이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오민철이 누군지 모른다.
더구나 얼굴을 가렸다.
부우웅!
랜드로버가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절간의 저녁은 조용했다.
청명스님은 손님방을 기웃거렸다.
해가 떨어지고 저녁이 되었는데도 굳게 잠긴 문은 열릴지 모른다.
또한 구두가 나란히 있는 걸 보면 아직 회의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청명스님은 주지스님께 여쭤 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손님들을 어떡할 건지 물었다.
그러자 주지는 끼니가 되었으면 당연히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이라면서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요사채 앞으로 다가갔다.
찌이잉!
구우우!
여러 소리가 방안에서 흘러나왔는데 청명스님은 단번에 휴대폰 벨소리라는 걸 알아보았다.
“계십니까?”
여기저기서 울리는 전화벨소리 말고는 반응이 없다.
“보살님들 저녁 식사 하시지요. 주지스님께서 같이 저녁 공양을 들자고 청하셨습니다.”
멈칫!
말을 하던 청명스님이 눈살을 찌푸렸다.
흠흠!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고개를 갸웃 하더니 가까이 다가가 노크를 했다.
똑똑!
반응이 없어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린다.
꽈당!
그때였다. 오른쪽 끝방 문이 떨어져 나갈 듯 열리며 피투성이 사내가 굴러 나왔다.
“으헙!”
청명스님은 기겁할 듯 놀란다.
“스...스님 119...119”
사내는 혼신을 다해 119를 불러달라고 말하며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