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6화: 상임위원(1)
일가족을 끌고 차량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던 사내들이 얼어붙었다.
나도출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엎어져 있고 두 사내가 담배를 피우며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화악!
유병구의 눈이 커졌다.
권총수다.
이제 살았다.
이것이 인생이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아직 오지도 않는 마지막을 미리 예단하여 스스로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
사우디 공사현장을 지휘하며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차를 몰고 볼일을 보러 나가는데 터번을 쓴 세 명의 사내가 AK를 겨누며 차를 세우도록 했다.
하지만 멈출 이유가 없어 그대로 밀고 지나가 버렸다.
총알이 빗발쳤고 앞 유리와 운전석과 조수석은 벌집이 되었는데도 단 한 방의 총알도 맞지 않았다.
또한 총에 가장 취약한 타이어 펑크도 나지 않은 것이다.
두 번째는 사우디 내의 반정부 활동 세력인 시아파 간부 두 명에게 타고 가던 차를 빼앗겼다.
그들은 유병구의 차를 빼앗아 사막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채 오 분도 되지 않아 귓청을 찢는 전투기 소리가 들리더니 엄청난 폭음이 사막을 울렸다.
자신의 차량이 불타고 있는 것이었다.
나중 알게 된 사실은 사우디 군에서는 쫓기는 차량이라고 확신하고 전투기에서 미사일을 발사 한 것이었다.
만약 자신이 타고 있었다면 꼼짝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운명이라는 것이 이렇다.
오늘 또 다시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운명의 현장을 경험하고 있었다.
“형님!”
사내들이 다가서려 하자 오민철이 앞을 막아섰다.
“어허, 여긴 내 땅이야. 동작그만.”
오민철이 사내들을 훑어 보았다.
“지랄같이들 생겼네. 뒤질래, 무릎 꿇고 반성할래?”
화아아!
한 사내가 오민철의 머리를 향해 야구방망이를 내리쳤다.
스윽!
옆으로 살짝 비켜 방망이를 피하더니 왼발로 빈 사내의 옆구리를 정확하게 찍었다.
“후욱!”
사내는 쥐어짜는 신음을 토하며 그대로 무너졌다.
경문혈(京門穴)이다.
복서가 옆구리를 맞고 숨을 쉬지 못하며 주저앉는 것 역시 이곳 경문혈을 가격당했기 때문이다.
혈도는 급소이다.
물론 급소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지만 그 부위가 너무 작아 비켜 맞거나 스쳐 맞게 되면 거의 충격이 없다.
그러나 제대로 맞으면 절명하기도 한다.
오민철의 해머 같은 구둣발이 정확히 경문혈에 박힌 것이다.
탁!
오민철은 사내가 떨어뜨린 야구방망이를 주워 들었다.
“이 새끼가!”
빠악!
넘어져 꿈틀 거리는 사내의 등짝을 후려쳤다.
“이런 씹새끼들이 지금 뒈지려고.”
오민철이 세 사내를 향해 다가갔을 때 야구 방망이를 든 사내가 흉포하게 소리치며 후려친다.
싸아악!
빠르다.
권총수는 오민철이 비록 중간에 무공을 배우다 포기는 했지만 보법이나 심법의 구결은 잊지 않고 있어 약간의 시늉은 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옆으로 비켜서는 동작은 불영보를 시늉낸 것으로, 권총수 눈에는 느리지만 일반인들 눈에는 빠를 것이다.
즉 자신의 공격을 오민철이 피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은 이미 늦다.
빠아악!
피하자마자 사내의 머리로 떨어지는 야구방망이에 붉은 피가 사방으로 퍼졌다.
홱!
또 한 명의 사내가 오른쪽에서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달려들자 오민철은 쥐고 있는 방망이로 세차게 쳐냈다.
까앙!
야구 방망이와 방망이가 부딪치고 불꽃이 튄다.
사내의 방망이가 튕겨 나고 오민철의 몸이 180도 회전하며 오른발 뒤꿈치가 사내의 얼굴을 찍었다.
빠르고 강한 돌려차기에 걸린 것이다.
사내는 땅바닥을 나뒹굴었다가 일어섰다.
하지만 충격이 큰 듯 휘청거리며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했다.
휘이이!
오민철이 그대로 뛰어 날아가 오른쪽 무릎으로 얼굴을 찍어 버렸다.
퍽!
사내는 뒤로 7,8미터 날아가 쓰러졌다.
오민철은 회칼 사내를 바라보았다.
대저 어느 조직이든 칼잡이는 최고의 에이스다.
단순히 칼만 잘 쓰는 것이 아니라 몸도 여러 가지 무도로 단련되어 있다.
“형 비켜!”
오민철은 비키기 싫은 모양이었다.
얼마든지 처리할 자신이 있었지만 권총수 의도를 알기에 뒤로 물러났다.
칼잡이 사내가 전혀 항복을 한다거나 물러설 스타일이 아니라는 걸 권총수는 본 것이다.
그런 사내는 한 가지 뿐이다.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난 권총수라고 합니다.”
사내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권총수를 모르는 모양이다.
팟!
늘어뜨리고 있던 회칼을 사내가 세웠다.
손잡이에 흰색의 거즈를 칭칭 동여맸다.
칼이 상대의 복부를 파고들면서 흘러나온 피가 손잡이에 묻거나, 아니면 부주의로 자신이 손을 다쳐 피가 묻을 경우 미끌어지는 걸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흠!”
사내는 금방이라도 찔러 들어올 것 같더니 움찔했다.
자신을 보고 웃는다.
그러나 권총수의 두 눈은 자신을 직시했다.
“찔러 보시죠. 그렇게 쳐다만 보지 말고.”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내의 칼이 복부를 노리고 들어왔다.
빨랐다.
오른발이 앞으로 한걸음 내딛으면서 파고드는 칼은 군더더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동작이다.
능숙하다.
한두 번 해 본 칼질이 아니다.
그러나 상대는 절정의 강호고수다.
탁!
들어오는 사내의 칼이 아닌 손목을 잡았다.
사내는 가만있었다.
자신의 손목을 쥐고 있는 권총수의 왼손을 보고 또 본다.
처음 겪는 일이고 전광석화와 같은 동작인데 어떻게 정확히 손목을 거머쥘 수가 있을까.
꿈을 꾸는 것 같은 상황에 사내는 한참을 더 있더니 홱 하며 손을 뿌리쳤다.
꼼짝도 않는다.
단단한 쇠사슬에 팔목이 묶여도 이보다는 나을 듯 싶었다.
요지부동.
“으으!”
끝내 신음을 흘렸는데 온 힘을 다하고 있다는 뜻이다.
뚜욱!
그런데 너무 지나쳤을까.
움직이지 않는 손목을 빼내기 위해 강하게 비틀다 보니 그만 손목이 부러져 버린 것이다.
으아아악.
고통이 밀려온다.
스으으!
권총수가 당겼다.
사내는 버틸 수가 없었고 힘없이 끌려갔다.
휙!
사내는 좁혀진 거리를 기회 삼아 왼주먹을 날렸지만 역시나 잡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권총수가 가만 놔두지 않고 손목을 분질러 버렸다.
뚜툭!
“컥!”
양 팔목 모두가 부러진 것이다.
권총수는 사내의 왼손을 풀어준 오른손으로 아직까지 잡혀 있는 사내의 칼을 빼냈다.
“좋은 칼이군!”
이어 쥐고 있던 오른손도 풀어주었다.
“야나기바보초(柳刃包丁).”
끝이 뾰족하다.
버드나무 잎 같아서 야나기(柳)라는 말이 붙었는데 일반적으로 회칼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칼이다.
가장 대중화된 칼이라는 뜻이면서 제대로 된 일식집 주방장이라면 생선회를 뜨는데 반드시 이 칼을 잡는다.
다른 회칼과 달리 길고 얇아 종잇장처럼 얇게 회를 뜰 수가 있다.
“이름을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사내는 부러진 양손목에서 전달되는 통증을 참기 위해 인상을 쓰고 있었다.
“군!”
“군?”
“천군이다.”
“하늘의 임금이라는 뜻, 좋은 이름이군.”
그냥 예명 따위가 아니라 진짜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인 모양이다.
권총수는 자신에게 얻어 맞아 거의 피떡이 되어 있는 나도출에게 다가갔다.
얼굴은 찢어지고 퉁퉁 부었다.
권총수는 천군에게 빼앗은 칼을 살피며 물었다.
“서로 힘든 시간 보내지 말고 일찍 끝내죠. 지시한 사람이 누굽니까?”
그때 나도출이 고개를 들었는데 눈이 빛나고 있었다.
“젠장! 왜 이제 생각났지. 당신이 누군지 알 것 같은데.”
나도출의 얼굴 근육이 푸들거린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약간의 투기도 찾아볼 수 없다.
완전히 포기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 사람, 사막의 흑새라고 했던 그 권총수?”
순간 다른 사내들까지 소스라쳤다.
“안다니 더 자세한 소개를 필요 없을 것 같고, 계속 얘기 합시다. 시킨 사람이 누구요? 난 오래 참는 성미가 아닙니다.”
소문이 있다.
건달세계에 떠도는 소문은 근거가 없지 않다.
경찰이나 아니면 형님 동생하며 잘 알고 지내는 언론사 기자들을 통해 듣고 옮기기 때문에 사실일 가능성이 항상 높다.
증거는 없지만 권씨 가문의 몰락은 눈앞의 사내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 파다하다.
어느 아는 경찰관은 99.99퍼센트라고 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로열패밀리로 불리던 그들이 죽고 사라진 건 권총수와 원한을 맺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들어가면 전 영화배우 오설지라는 여자가 전 대통령 권철태와 사귀며 낳은 아들이 권총수다.
그러나 권철태는 미래를 위해 자칫 혼외자가 자신의 정치적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판단하여 아이와 엄마를 죽인다.
하지만 아이는 끝내 살아났고 오늘날 보복을 당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다면 증거가 있을텐데요?’
‘없다. 먼지 한 톨 없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표적이 그런 권총수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위에서 내려온 지시는 별것 아닌 것처럼 사람 하나 처리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섰는데 자신들이 죽여야 할 유병구 뒤에 권총수가 버티고 있다니 그야말로 날벼락이다.
“상임위 결정이라고 들었소.”
나도출은 망설이지 않았다.
버틸 상대가 있고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하는 것이 신상에 좋은 이가 있다.
신상에 좋은 상대가 바로 권총수였다.
“상임위?”
오민철이 물었다.
“보스들이죠.”
그러면서 나도출은 말했다.
대한무궁화청년연합회는 한 명의 회장, 두 명의 부회장, 그리고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상임위로 되어있다.
상임위원은 연합회에 가입한 각 지역 보스들이었다.
중요 결정은 그들이 모여 내리는데 이번 유병구 암살 지시 역시 상임위에서 내려졌다는 뜻이다.
딸칵!
권총수는 쭈그리고 앉았다 일어서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소장님은 일단 돌아가시죠. 아참 그리고 내가 일부러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모든걸 터놔야 할 듯 싶습니다. 가족을 보호할 우리회사 직원입니다.”
그때 다른 차 한 대의 문이 열리고 김술찬이 내렸다.
“서울로 돌아가십시오. 좀 더 인원을 보강해 드릴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면목 없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미리 경찰에 자수하거나 하면 안 됩니다.”
“잘 알겠습니다.”
유병구 일가가 차를 타고 사라졌고 그 뒤를 김술찬의 차가 따라 붙었다.
경찰에 자수를 해버리면 돈 많고 인맥 좋은 권혜림이 빠져나가는 건 식은 죽 먹기다.
더욱이 아직 권혜림을 정리할 단계가 아니다.
북한과 금강산 개발문제로 곧 평양을 방문한다.
일의 진행상황을 지켜보고 권혜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결정할 생각이다.
집으로 돌아왔다.
권총수는 저녁을 차려 먹고 설거지를 끝낸 뒤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프로축구 K리그 경기가 진행중이다.
축구는 좋아하지만 응원하는 특정 팀이 있는 건 아니다.
가끔씩 중계를 해주면 그냥 재미삼아 보는 것이다.
지이잉!
탁자의 핸드폰이 울려 액정을 보자 나도출이란 이름이 떴다.
강릉 횟집에서의 사건 이후 나도출은 놀라운 고백을 했다.
특전사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블랙잭에 자신을 취직시켜주면 어떻게 해서라도 값을 하겠다는 것이다.
살길을 열어달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