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615화 (615/651)

제615화: 의리는 없다(3)

이곳 저곳 문전걸식하듯 타인의 손에 청부를 할 것이면 한두 번에서 그쳐야 한다.

즉 실패가 이어지면 물러서는 것도 때로는 지혜인 것이다.

되지 않는 일에 고집을 피우고 오기만 내세워 봤자 종국에는 거센 피바람에 휩쓸릴 뿐이다.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에 대해 투명한 유리 들여다 보듯 속속들이 알아야 하는데 권혜림은 단편적인 것만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고 있다.

‘멍청한 여자’

차는 강릉시라고 쓰여진 이정표를 지나갔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호텔이 있었다.

랜드로버가 지하주차장에 멈추고 권총수와 오민철이 내렸다.

두 사람은 곧장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1층으로 올라간 뒤 커피숍을 향해 걸어갔다.

커피숍은 한산했다.

권총수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니 오후 3시 40분이다.

“저기 있군.”

오민철이 한쪽을 향해 걸어갔다.

창가에 정장을 한 건장한 사내가 앉아 있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인사는 무슨.”

오민철이 히죽 웃는다.

김술찬이다.

그는 드물게 공정 통제사 출신이다.

공정 통제사(CCT:Combat Control Team), 한마디로 요약하면 관제사인데 공항에서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이동식 관제사다.

날씨 상태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아군 수송기가 목표 위치에 정확히 도착할 수 있도록 고도와 방위각 등을 관제(管制)해주는 임무다.

문제는 우리지역이 아닌 적지에서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아군의 병력과 물자를 분명하게 투하하고 이동할 수 있도록 안전한 수송지점을 확보하는 일을 한다.

적지에 들어가야 하는 만큼 그들의 훈련은 어느 특수부대보다 강도가 높다.

오민철이 양손에 커피잔을 들고 다가온다.

김술찬이 일어나 받으려 하자 오민철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두 개의 잔을 놓고 앉았고 권총수는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몇 명입니까?”

권총수가 커피잔을 내린다.

“다섯 명입니다. 하지만 백 프로 확신하는 숫자는 아닙니다.”

“평범한 일가족인데 다섯 명이면 적은 숫자는 아니지.”

오민철이 혀로 입술에 묻은 커피를 핥는다.

김술찬은 권총수의 지시를 받고 유병구 가족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밤 유병구 가족이 묵고 있는 805호를 중심으로 804호와 807호의 객실에 투숙객이 있었다.

호텔방에 사람이 묵는게 특별한 건 절대 아니다.

김술찬이 묵고 있는 방은 806호였다

그런데 방을 나오다 804호 손님과 807호 손님이 복도에서 서로 아는 체 하는 걸 목격했다.

뿐만 아니라 약속이나 한 듯 805호를 슬쩍 살피듯 보았는데 불량한 시선들이었다.

직감적으로 상황이 발생했다는 걸 알고 재빨리 다섯 사내의 사진을 찍어 회사로 보냈고 관리실 분석팀에서 다섯 명 중 한 사내의 신원을 특정해 냈다.

‘나도출’

그의 직책은 대한무궁화청년연합회 홍보실장이었다.

그리고 그 명함 뒤에 숨겨진 또 하나의 모습,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그의 실체였다.

‘부산 최고의 폭력조직 칠성회 넘버 2였다’

부산에서 대학까지 나왔으며 고등학교때까지 아마추어 복서로 활동했다.

전국체전 미들급에서 고교 최강에 오르기도 했으며 한때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활동했다.

“지금 유병구 가족들은 어디 있죠?”

권총수가 물었다.

“객실에 있습니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되잖아요?”

오민철이 눈썹을 모았다.

김술찬은 빙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바깥에서 누군가 들어가면 여기 스톱워치가 울립니다.”

그러면서 손에 초시계 비슷한 물건을 갖고 있다.

손바닥 크기에 납작했는데 군시절 공정통제사로서 배운 기술중 하나라고 했다.

객실 문이 밖에서 열리면 신호가 오도록 도어 안에 건전지가 들어간 작은 칩을 넣어 놨다는 것이다.

일종의 부비트랩 비슷한 건데 직선으로 300미터에서 500미터까지 신호가 전달된다고 했다.

오민철이 빙긋 웃는다.

김술찬이 설치한 송수신기를 자신도 만들 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자가 무전기처럼 도어 속에 끼워진 밧데리가 출력을 일으키는데 문이 열리면 전선이 밧데리 양쪽 모두에 닿는다.

그때 손에 있는 컨트롤러에 신호가 들어오는 것이다.

대화나 어떤 것도 불가능하고 오직 신호만 전달된다.

이어 김술찬은 지난 며칠 동안 유병구 가족들이 밤에 외출을 많이 했고 믿을 수 없게도 두 명의 낯선 사내가 객실을 출입했다.

“누구였습니까?”

김술찬은 가볍게 웃었다.

“과외 선생님이었습니다.”

“맙소사!”

오민철이 놀란다.

“이 절박한 위험 속에서도 자식들 공부는 멈출 수 없다는 것 아닌가?”

“갑자기 서울도 아닌 강릉에서 아이들 과외 선생을 불렀다는 건 이곳에 오기 전에 모든 걸 알아봤다는 뜻이군. 또한 일주일 이상 머무를 가능성도 있고.”

“가족 여행이라기 보다는 만약을 대비한 도피라고 봐야겠지?”

“권혜림을 잘 안다는 뜻이야. 즉 자신을 증거인멸 차원에서 공격할 위험성이 크다는 걸 느꼈을 거란 얘기지.”

그래서 일단 자식들과 같이 움직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결국 자신도 나름 대비를 한다는 뜻인데? 국내 도피는 시간의 한계가 있잖아?”

오민철의 말에 권총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한데”

권총수가 일어났다.

주위가 점점 어두워 오고 있었다.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서 해가 짧아졌다.

7시가 조금 못 되었지만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어딜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유병구씨 일가족이 외출하면 신호가 잡힙니다.”

유병구의 차량에 추적 장치를 붙여놨다는 것이다.

“저녁 안 먹을 겁니까?”

하루종일 굶었다.

공항에서 곧바로 사무실에 들러 중요한 결재 서류 몇 가지를 처리하고 이곳을 출발한 것이다.

세 사람은 커피숍을 나가 호텔 식당으로 들어섰다.

흰색의 아우디 한 대가 한적한 바닷가 횟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주위는 어두웠고 평일의 횟집 주차장에는 석 대의 차량밖에 보이지 않았다.

차가 멈추고 네 명이 내렸는데 주인인 듯 한 사내가 재빨리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바닷가 쪽으로 조용한 자리 있습니까?”

넥타이까지 맨 진청색 정장을 걸친 유병구가 말했다.

“가족실이 있습니다.”

주인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건물을 돌아 바다쪽으로 갔다.

“여깁니다.”

미닫이 유리문이 있는 실내는 조용했으며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유병구는 아이들과 아내에게 먹고 싶은 생선회를 주문하라고 말했다.

세 사람은 각자 먹고 싶어하는 생선이 달랐다.

유병구는 빙긋 웃으면서 세 가지 모두를 달라고 했다.

주인이 문을 열고 나가자 큰 아들이자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인 유태촌이 물었다.

“아빠 서울 언제 돌아가는 것입니까? 우리도 이제 어린애가 아닙니다. 하실 말씀 있는 것 같은데 하십시오. 어떤 말씀을 하셔도 우린 아빠 편입니다.”

그러자 고등학교 1학년인 둘째 유태주가 동조했다.

“형 말이 맞아요. 우린 아빠 아들이잖아요. 설혹 아빠가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짓을 했다고 해도 우리 마음은 변하지 않을거에요.”

두 아들을 바라보는 유병구의 눈빛이 파장을 일으킨다.

누군가 지금 시대의 아이들은 철이 늦다고 했다.

십 대를 지나 이십 대 중 후반이 되어도 어린애 같다는 것이다.

물론 부모들이 지나치게 치마폭에 감싸 키운 탓이지만 오늘 보는 두 아들은 다르다.

듬직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유병구는 오래 숨길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갑자기 다니는 학교에 체험 현장학습이라는 핑계를 대며 자신들을 데리고 여행을 가는 아버지를 정상의 눈으로 볼 리는 없다.

며칠 침묵한 것도 많아 참아준 것이다.

이제 우리도 어린아이가 아니니 같이 진실과 거짓을 갖고 있다면 같이 나누고 공유하자는 뜻이었다.

물론 아내는 알고 있다.

원래는 혼자 조용히 머리도 식히면서 마음의 정리를 하려고 했으나 권혜림의 성격상 결코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았다.

곡선이 없이 직선으로 치고 들어오는 그녀의 성향을 보아 자신이 보이지 않으면 가족들부터 칼을 들이댈 것이 불문가지였기에 권총수가 콩고에서 돌아올 때까지 온 가족이 같이 움직여야

했다.

물론 유병구는 권총수가 김찬술을 시켜 자신의 가족을 지키고 있다는 걸 모른다.

‘지키고 있다는 말을 하지 마세요’

유병구의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

지키고 보호하기보다는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오해할 가능성이 크다.

감시자로 판단해버리면 판이 바뀔 수도 있다.

다시 권혜림에게 붙어 버린다거나 아니면 극단적인 선택으로 자신을 던질 수도 있기에 모르게 암중 보호를 요구했다.

그때 창문 밖에 음식을 담아 끌고 다니는 카트가 나타났고 주인이 세 개의 접시에 생선회를 차례대로 내려 탁자 위에 올렸다.

가족들이 앉아 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벤츠 차량 두 대가 천천히 횟집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2차선 국도에 거의 붙다시피 한 횟집이기 때문에 주차장이라기보다는 넓은 마당이었다.

차가 멈추고 앞뒤 차량에서 다섯 명의 사내가 내렸다.

스르릉!

각자 내린 차량의 트렁크가 사내들이 허리를 숙여 뭔가를 꺼냈다.

세 사내는 야구 방망이를 들었고 한 사내는 번쩍이는 회칼을 손에 쥐고 있다.

“잘 들어.”

서른 중후반 가까이 되어보이는 사내는 바로 부산 최대의 폭력조직 칠성회 넘버 투인 나도출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다. 아마 오늘 우릴 두고 하는 소리 같다.”

나도출은 눈을 빛냈다.

“바닷가 쪽으로 출입문까지 따로 있어 일처리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반항하지 않으면 그냥 데리고 나온다. 하지만 소릴 지르거나 하면 그때 연장을 쓴다. 가장 빠른 시간에 끌고 나와

트렁크에 싣고 떠나야 한다. 실수 없도록 해.”

“예!”

사내들이 재빨리 바닷가 쪽으로 달려가더니 사라졌다.

딸칵!

나도출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도출은 무거운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었다.

‘잔인한 여자다’

처음에 내려진 오더는 유병구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가 가족과 같이 있다는 말에 모조리 없애 버리라는 것이었다.

한 명을 죽이는데도 많은 계산과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또한 일이 잘못되어 법망에 걸렸을 때 변호사를 누굴 선임하고 형량을 낮추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놓아야 할지까지 주판을 두드린 뒤 행동에 들어간다.

권씨들은 뱀의 피를 갖고 있다는 말이 나도는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고민 없이 일가족을 몰살하라는 말을 아무나 뱉을 수 있지는 않다.

예상대로 두 아들이 저항을 하려고 했다.

유병구는 강력하게 두 아들을 제지했다.

상대가 안 된다.

오히려 얻어맞고 다치기만 할 뿐이었다.

“태촌 태주, 아빠 말 들어.”

유병구는 순순히 사내들의 뜻에 따라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모르지만 자신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다.

끌려가면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알면서도 끌려가는 건 아직 게임이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게 아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대충 훑어봐도 삶에 있어 반전은 숱하게 일어난다.

가족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다.

살아 날 운명이라면 뭔가 일어날 것이다.

물론 그 뭔가가 무엇인지는 자신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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