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4화: 의리는 없다(2)
현장에 있어야 할 소장이 아무런 통보나 연락없이 귀국하여 가족과 여행을 떠났다는 건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전교 1,2등을 다투는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서까지 자취를 감춰 버린 이유가 뭘까에 생각이 미치자 한 가지가 떠오른 것이다.
“아니야. 그건 아닐거야.”
권혜림은 강하게 부정하며 구장철을 향해 말했다.
“현장을 비울 수 없으니 일단 임시 소장으로 누구든 앉혀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소장 임명은 구 사장이 알아서 하고 모든 인력을 동원해 유병구 소장을 찾으세요.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구장철이 회장실을 나가자 권혜림의 안색은 딱딱해졌다.
결코 아닐 것이라고 부정을 하면서도 예기치 못한 유병구의 귀국사태가 마음에 걸린다.
긴장의 한숨을 계속 내쉬며 다시 쇼파에 앉아 켜 놓은 노트북의 엔터를 쳤다.
꺼졌던 화면이 포털메인으로 나타나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내용 하나가 있다.
“뭐지.”
탁!
재빨리 클릭하여 화면을 띄웠다.
‘프랑스 특수부대 파리 테러의 주범 쿠아치 체포’
권혜림의 눈이 빛난다.
낯익은 이름이다.
재빨리 기사를 읽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표정이 검게 변해진다.
‘숨어 있던 부카부 회교 사원을 급습하여 숨어 있는 쿠아치를 체포했다. 프랑스 정부는 특수부대 요원 네 명이 작전중 숨졌다고 발표 했으며 조국을 위해 헌신한 위대한 영웅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권혜림은 재빨리 전화를 걸었다.
“나에요. 뉴스 봤어요?”
“아뇨. 우리 것 떴습니까?”
상대는 구장철인데 이번 공사 수주에 대한 기사냐고 묻는것이었다.
“프랑스 특수부대의 기습으로 쿠아치가 잡혔다는 기사에요.”
“네에?”
구장철의 놀라는 목소리가 전화기 밖으로까지 들린다.
“아무튼 빨리 움직이세요.”
전화를 끊은 권혜림은 다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몇 차례 더 읽고 난 권혜림의 표정이 갑자기 환해졌다.
‘잘 된 일이다’
쿠아치 오른팔인 아까올라에 대한 소식이 없긴 하지만 보나마나 프랑스 법정에서 그에게 종신형을 때릴 것이다.
쿠아치가 잡혔다면 오른팔 아까올라 역시 지금쯤 쫓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된다면 비록 권총수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일단 비밀 유지는 굳건하게 이뤄진 셈이다.
“으음!”
권혜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면 남은 것은 이제 이쪽이다.
서울에서 입만 닫아 버리면 비록 실패 했으나 이번 건은 완전하게 묻힌다.
배후에 자신이 있음을 권총수는 절대 모를 것이다.
파팟!
갑자기 눈에서 섬광이 피어났다.
뭔가 떠오른 것이다.
‘유병구가 왜 이런 돌발 행동을 하는 걸까’
아무 사건 사고 없이 입사 이후 쭉 백서맨으로 충분한 능력을 보여주었고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누구보다도 일에 대한 열정은 최고였다.
회사에 연락도 없이 취한 이런 역습 같은 행동은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측면이 크다.
즉 자신에게 손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혹시 블랙잭 박호명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 해보았지만 권혜림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담이 약한 사람이면 결코 그 자리까지 올라갈 수 없다.
구장철의 지시에 신속하게 움직였고 지금까지 무리없이 일처리를 해왔던 사람이다.
권총수 제거에 실패 했다고 아직 끝난 건 아니다.
잠시의 휴전(休戰)이다.
종전(終戰)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권혜림의 눈이 반짝 거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단기전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간단하게 끝나면 좋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길게 가는 승부였다.
휴전은 양쪽 모두 상대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장비 가지고 다시 전쟁을 일으켜 봤자 이길 수 없다.
새로운 것으로 갈아엎어야 한다.
‘기존의 장비(사람)는 버린다’
이기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술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지금까지 사용한 장비가지고는 안된다.
권혜림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구 사장님, 내 얘기 잘 들으세요.”
권혜림은 아무도 없는 회장실인데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전혀 생각 못한 채명천 이사가 웃으며 마중을 나온 것이다.
권총수는 채명천의 밝은 표정에서 자신이 없는 동안 회사 일이 뜻대로 잘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아니나 다를까 채명천이 바쁘다는 듯 서둘러 입을 열었다.
“60명이 들어왔습니다.”
“육십 명?”
오민철의 눈이 커졌다.
3년에서 5년으로 고작 2년 늘렸을 뿐인데 60명을 모집했다면 엄청난 숫자이다.
“지금 연변에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귀국하여 국정원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다른 목적을 갖고 신분을 숨기고 들어온 사람은 절대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강호의 법으로 처리한다고 말하세요. 강호의 법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거든 이렇게 말해주세요. 근육이 가루가 되고 뼈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고문을 받아 죽는 것이라고.”
국정원에서 거의 걸러진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국정원 그물을 빠져 나왔다고 해도 권총수의 눈을 피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상대와 마주 서 보면 이미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99.99퍼센트 간파해 버린다.
일행은 회사차인 검정색 밴을 타고 이동했다.
그런데 공항을 출발한지 20분이 채 안됐을 시간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권총수는 전화기를 보더니 받는다.
“예, 김술찬씨.”
김술찬이라는 말에 채명천 이사가 고개를 돌렸다.
김술찬은 회사 관리부 소속 직원으로 권총수가 사우디에서 한 가지 임무를 주었다.
“음! 알겠습니다. 회사에 들러 몇 가지 일 처리만 끝내고 바로 가죠.”
전화를 끊자 오민철과 채명천이 쳐다본다.
“채이사님, 대한무궁화청년연합회가 뭡니까?”
채명천이 고개를 갸우뚱 한다.
“시민 단체 같은데?”
오민철이 중얼 거리듯 말했다.
그때 채명천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윤 총경, 오랜만이야.”
경찰시절 아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역시 그 바닥이 좋아. 퇴직 후에도 곧장 취직이 가능하니 말이야. 난 겨우 입에 풀칠하지 뭐.”
오민철이 이마를 찡그린다.
채명천의 연봉은 3억이 넘는다.
그런데 입에 풀칠 할 정도라는 말에 인상을 썼고 그걸 본 권총수는 씨익 웃었다.
“윤총경 혹시 대한무궁화청년연합회라는 곳 알고 있나? 뭐야?”
갑자기 채명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 어! 그래. 고맙네. 언제 한잔하자고, 오케이.”
통화를 끝낸 채명천의 표정이 굳어진다.
“시민단체를 표방한 깡패새끼들이라는데.”
“건달들이 시민단체를 결성해도 되는 겁니까?”
오민철이 묻는다.
“결성하지 말란 법은 없지. 지금 통화한 일 년 후배 윤주앙 전 경찰서장의 말을 빌리면 서울과 부산 광주 대구 인천을 무대로 활동하는 굵직한 조직들이 뭉쳐 만들었다는거야.”
“한마디로 우리나라도 범죄 카르텔이라는건가?”
오민철이 권총수 눈치를 살핀다.
권총수는 듣고만 있었다.
“오야붕은 누구랍니까?”
“법적으로 대표하는 회장은 국회의원 오천통이라는군.”
“오천통, 오천통 설마 그 자식?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피감기관으로부터 가족회사가 수천억의 공사를 수주했다는 놈?”
“오천통이면 자주당 의원으로 있다 탈당하여 지금은 무소속 아냐?”
권총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피식!
갑자기 실소를 짓는다.
“우리나라 정치는 꼭 4,50년대 미국 정치를 보는 것 같아. 당시 미국도 마피아와 치열하게 엉켜 돌아갔잖아.”
“2,000년 이후로는 깡패새끼들과 거리를 두는가 했더만 다시 짝짝꿍이야.”
오민철이 비아냥 거렸다.
차는 공항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려 사라졌다.
흰샌 랜드로버 한 대가 영동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권총수는 조수석에 앉아 유리를 조금 내리고 담배를 피운다.
“알고 보면 인간처럼 멍청한 동물은 없는 것 같아.”
핸들을 잡고 운전을 하던 오민철이 말을 이어갔다.
“짐승들 봐봐. 짝짓기 철이 되면 수컷들끼리 싸우잖아. 그러나 한 번 짝짓기 싸움에서 패하면 절대 덤벼들지 않잖아. 자신은 상대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그런데 오로지
인간만 해보겠다고 미친 듯 달려든다고.”
“형 그 말 생각나?”
권총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외인부대시절 중대장 튀랑 대위가 했던 말, 인간은 절대 고등동물이 아니라는 말.”
“맞아. 생각났어. 인간의 눈에 짐승들이 답답해 보인다면 그들 눈에 비치는 인간 또한 바보 멍청일 것이라고, 그러면서 그랬지. 끝없는 자기 성찰 말고는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이
없다고.”
“그러자 비랜드라 형이 물었지.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냐고 말이야. 그러자 튀랑 대위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지. 공존공영하는 것이라고, 멋진 말이었어. 우린 박수를 쳤고.”
그때 권총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채명천 이사가 전화를 걸어 온 것이다.
“예 이사님!”
“조금전 통일부 발표가 나왔습니다. 백서그룹 권혜림 회장의 방북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동안 백서건설에서는 과거 현도건설이 북한의 일방적인 제지로 중단된 금강산개발을 자신들이 맡아 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여러 채널을 가동해 북한과 접촉했고 정부도 지원 사격에 나섰는데 결국 북한쪽에서 오케이 한 모양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왜 그래?”
오민철이 돌아본다.
“방북을 한다고?”
“권혜림이? 언제 재개될지 모른다는 남북경협이 다시 시작되는 건가. 헌데 왜 현도건설이 아닌 백서건설이야? 개발사업권을 현도개발이 우선 갖고 있잖아.”
“북한 맘이지. 약속이고 뭐고 언제든지 바꾸고 엎는 나라이니 국제사회에서 더욱 외면을 당하는 것 아냐.”
권총수 목소리에 약간의 차가움이 느껴진다.
“개인 간의 사업도 아니고 국가가 약속했으면 지켜야지.”
이번 525특수부대 출신자를 모집하기 접촉하면서 북한 정치에 대해 좀 더 깊이 연구했고 관계서류와 책들을 탐독했다.
지구상에 독재국가는 많다.
그러나 국가가 기업과 맺은 약속을 마음대로 파괴하는 나라는 북한 뿐이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지키지 못할 때는 그에 상응하는 금전적 배상 말고는 없다.
정치적으로 필요에 의해 남한 기업을 끌어 들였다가 그걸 미끼로 협박하고 남북관계를 자신들 뜻대로 끌고가려는 음험한 의도만이 그들의 본색이었다.
어쨌든 권혜림이 방북한다는 건 여러 가지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당장 작업 들어가기는 틀린 것 같은데?”
권총수는 오민철을 바라보았다.
이미 오민철은 권혜림이 방북한다는 소식에 표정이 굳어졌다.
권혜림을 자신이 직접 죽이겠다고 벼르고 있는데 그런 소식이 들려오자 불편한 것이다.
“계집년 운도 좋군. 하긴 그래봤자 며칠 더 목숨 연명하는 것 뿐이니 좋아 할 것도 없다.”
살기 깔린 목소리에 권총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자기 아버지를 포함해 두 명의 백부 모두 자신에게 당했다.
친오빠는 물론이고 사촌인 권악수를 포함하여 거의 멸족 수준인 것이다.
자신을 죽일 능력과 힘을 갖춰 공격을 해온다면 충분히 이해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