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3화: 의리는 없다(1)
자신이 죽이고자 하는 사람은 지천으로 널렸다.
쿠아치의 최대적은 미국이고, 그 다음이 이스라엘이다.
그리고 지금은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테러를 실행하고 있는 중이다.
“이 사람이야?”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오민철과 스캇이 나타났다.
“당신.”
스캇을 발견한 쿠아치는 그제야 놀란다.
스캇은 웃는다.
“우린 구면이죠?”
오래전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측과 반군측 사이에 협상의 자리가 마련된 적이 있었다.
그때 중계자로 미국을 대표해 스캇이 참석했는데 반군측 인물들 속에 쿠아치가 섞여 있었다.
IS의 거물이다보니 무게를 좀 더 싣기 위해 반국측이 의도적으로 포함시킨 것이다.
“사막의 흑새.”
돌연 쿠아치가 소스라쳤다.
이제서야 권총수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조금 전 라이터 불에 비친 낯익은 측면 얼굴은 틀림없는 사막의 흑새였다.
권총수가 물었다.
“곧 날이 밝아 올텐데 서둘러 우리 사이의 감정을 정리하죠. 백서건설로부터 날 죽여 달라는 청부 받은 건 사실입니까?”
사막의 흑새를 죽이지 못했다는 연락은 받았다.
그리고 사우디에 그가 나타났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콩고민주공화국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특히 공항쪽 입국 관련 업무를 보는 공무원중 상당수가 반군과 IS와 연계되어 있어 중요 인물의 입국을 귀띔해 주는데 권총수에 대한 건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때 일단의 군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권총수는 다가오는 그들이 프랑스 제1해병공수여단 소속의 군인들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가장 앞서 스테판 대위가 있고 그 뒤로 다섯 명의 군인들이 더 있었다.
부상당한 프랑스 군인으로부터 이글팀 열여섯 명이 들어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지휘관인 스테판 대위를 포함한 여섯 명 뿐이다.
열 명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권총수의 청각은 부상자와 사망자를 옮기는 다른 군인들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11대대 이글팀 대위 스테판이오.”
스테판 대위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권총수를 향해 거수 경례를 했다.
권총수는 입가에 담배를 물고 희미하게 웃으며 스테판 대위를 바라본다.
“영광입니다. 외인부대를 제대했다고 들었습니다?”
“외인부대도 프랑스군이니 굳이 남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오민철이 반갑다는 듯 말했다.
“감사합니다.”
결과를 가정할 것 까지는 없지만 권총수가 아니었다면 오늘 밤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적은 자신들이 기습할 것을 알고 요소요소에 매복해 있었다.
제아무리 강한 군대도 매복에 걸리면 대책 없다.
프랑스 최정예 특수부대가 쿠아치를 잡기 위해 회교사원을 기습했지만 많은 인명피해만 내고 실패했다는 뉴스가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면 그야말로 프랑스 입장에서는 암흑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테러사건과 크고작은 전쟁에서 완벽한 임무 수행능력을 보여준 프랑스 정예병들이 IS에게 역습을 받았다는 건 현 마크롱 정부의 존립까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쿠아치 당신은 내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않았소.”
권총수의 물음에 쿠아치는 침묵했다.
“총소리를 듣고 반군들이 지원에 나설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는가 보군요. 오긴 올 것입니다. 달려 올 것이 확실하지만 중요한 건 당신은 죽는다는 것이오. 그것도 가볍게 총으로
빠앙 쏴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고통속에 살게 만들어드리죠. 그것이 뭔지 경험해 보고 싶으면 계속 대답을 하지 말고 시간을 끌어도 됩니다.”
‘사막의 흑새의 고문에서 입을 열지 않는 사람은 없다’
IS세계에서 회자되는 사막의 흑새에 대한 공포적인 소문이다.
“캡틴!”
그때 스테판 대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권총수는 고개를 돌리며 쓰고 있던 야시경을 벗었다.
그건 중요한 말을 전달하기 위해 예의를 차리는 동작이다.
권총수는 스테판 대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듣기만 하세요. 대위’
권총수가 먼저 입을 열었는데 갑자기 귓속으로 전음이 들리자 스테판 대위는 깜짝 놀랐다.
그가 왜 놀라는지를 아는 사람은 오민철과 스캇 뿐이었다.
‘그 소리가 틀림없을 것이다. 내 귓속에만 들리게 말하는 목소리’
스캇은 한 번 경험을 했다.
현대과학으로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경험이었다.
권총수는 전음을 이었다.
‘당연히 쿠아치는 넘겨 드릴 것입니다. 이건 프랑스라는 나라의 자존심과 직결된 문제겠죠’
스테판 대위는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데려 가십시오. 나와 오 이사의 입은 염려 마시고, 스캇 요원의 입도 제가 제대로 잠가 놓겠습니다. 그전에 쿠아치에게 몇가지 물어 볼 것이 있습니다’
‘아아!’
스테판 대위는 감탄하고야 말았다.
쿠아치를 넘겨줄테니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다.
이글 팀이 어떤 공을 세우고 작전을 조작해도 우린 관여 하지 않을테니 걱정말라는 뜻이다.
스테판은 다시 한 번 거수경례를 했다.
척!
이때는 권총수도 거수경례로 상대의 예를 받았다.
“일단 자리부터 옮기죠. 곧 반군이 쫓아 올 것입니다.”
일행은 순식간에 사원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십여 분 후 기관총 PKM을 거치한 지프와 병력을 실은 트럭 두 대가 사원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사방에 죽어 있는 IS대원들의 시체 뿐이었다.
조금씩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콩고강 지류 한쪽에 카이만 헬기 한 대가 내려앉고 있었다.
프랑스 육군이 자랑하는 수송헬기다.
거친 모래바람이 피어나고 헬기가 착륙하자 여기저기 은신하고 있던 이글팀 대원들이 신속하게 탑승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망한 다섯 명의 시신을 들것에 담아 옮겼고 부상자들까지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헬리콥터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헬기에 오르던 스테판 대위가 돌아서서 우거진 갈대밭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그리고 헬기는 서서히 상승하여 동쪽으로 기수를 돌리더니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을 뚫고 사라졌다.
헬기가 사라지고 갈대가 흔들리더니 한 대의 랭글러 지프가 튀어 나왔다.
랭글러 지프는 갈대밭을 헤치고 튀어 나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덜컹거리며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랭글러에 세 명이 타고 있었다.
스캇이 핸들을 잡았고 권총수는 조수석에, 오민철은 뒷좌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러다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전화 오는 것 아냐? 네가 완전히 체면 세워준건데.”
권총수는 빙긋 웃었다.
쿠아치를 이글 팀에게 넘겨 주었다.
제1해병공수연대 이글팀이 이곳 부카부에 몰래 잠입한 건 쿠아치를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쿠아치가 권총수에 잡힌 것으로 마무리 됐다면 원하는 정보를 얻고 백퍼센트 사살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입장은 전혀 틀리다.
테러로 자국민을 죽이고 다치게 한 주범인 까닭에 프랑스 정부는 그를 체포하고 싶어한다.
그를 법정에 세움으로 결코 프랑스는 테러범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고 국가의 명예도 세우는 것이다
“뭐라고 보고를 할까?”
오민철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스테판 대위가 어떻게 보고를 하든 상관없다.
모든 공은 그의 입에서 나온 그대로 발표되고 알려질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킨샤사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한사코 배웅을 나온 스캇까지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권총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보던 권총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외인부대에 근무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지금 찍힌 번호가 프랑스 국제전화라는 걸 알아 차린 것이다.
“알로(여보세요).”
권총수는 일단 불어로 통화를 시작했다.
“보쥬르(안녕하십니까)? 난 마크롱입니다.”
권총수는 깜짝 놀랐다.
“대통령 각하?”
“미안합니다. 신문 기사를 통해, 그리고 부랴부랴 전 외인부대장 미탈랑 장군에게 전화를 하여 캡틴에 대한 정보를 조금 들었습니다.”
이미 보고가 들어간 모양이다.
오래전부터 언론을 통해 권총수에 대한 기사를 봤지만 그다지 관심은 없었다는 걸 솔직하게 털어 놓는다.
그러다 이번 일로 재빨리 권총수가 외인부대 있을 때 당시 사령관인 미텔랑 장군에게 연락하여 신상에 대한 얘길 대충 들었다는 뜻이다.
거짓이나 과장도 없고 있는 그대로 말한다.
정치인은 자기 과시와 띄우기에 바빠 입만 벙긋하면 거짓말을 한다.
“어쩐 일이십니까?”
“긴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먼저 프랑스 국민을 대표하여 캡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번 일이 잘못 되었다면 프랑스의 국격은 급전직하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졌을 텐데 캡틴이
다시 한 번 프랑스 역사에 위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저보다는 프랑스가 좀 더 쿠아치를 필요로 할 것 같아서 양보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에 큰 도움이 되었다니 천만다행입니다.”
“언제 한 번 초대를 해도 될까요?”
“대통령께서 불러주시면 무조건 가야할 일이죠. 오늘 통화 정말 행복했습니다.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몇 마디 더 주고받더니 전화를 끊었다.
“진짜 그 사람 맞아. 친구 엄마와 결혼했다는 프랑스 대통령.”
권총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호흡이 안정되지 않는 걸 보니 굉장히 고마운가봐. 정치인들에게 이런 국제적 사건은 결과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잖아. 만약 전화가 온다면 프랑스 특수전 사령관 아니면
육군참모총장 정도가 최대치라고 여겼는데 대통령이 직접 한 걸 보면 이번 쿠아치 체포작전에 마크롱의 명운이 걸렸었나본데.”
“EU지도자들 중 가장 어리다고 들었는데, 그것 기억 난다. 트럼프와 처음 만나 악수로 기싸움 하던 사진.”
오민철은 마크롱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쏟아 냈다.
한편 스캇은 찻잔을 들어 올리는 권총수를 흘긋거렸다.
백악관 주인과도 차를 마신다.
브라질 대통령과도 식사를 했으며 사우디 대통령은 자신의 형제보다 가까운 사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런데 이제는 프랑스 대통령의 전화까지 받았다.
‘거물이군’
가뜩이나 신출귀몰한 능력을 가져 국제적인 관심과 과학적 연구의 대상인데 이제 정치 권력자들과 막후 소통을 한다.
‘어쩌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인지도 모르겠군’
스캇은 다시 한 번 권총수를 바라보았다.
좀체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난 며칠 같이 보내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얻었다.
머리는 차갑지만 가슴은 뜨거운 사내였다.
***
권혜림은 소스라쳤다.
리야드 현장에 있어야 할 유병구 소장이 국내에 들어온 것이다.
“빨리 전화 해봐요!”
구장철 사장에게 소릴 질렀다.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그럼 집에 가봐요.”
“문이 잠겨 있다고 합니다. 아파트 경비 말로는 어제 가족들 모두를 데리고 나갔다고 합니다.”
“아이들 둘은 학생이잖아요.”
“그렇습니다.”
“당장 학교로 찾아가 아이들을 만나봐요.”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때 쥐고 있던 핸드폰을 바라보던 구장철이 통화를 연결했다.
“어떤가? 뭐, 아이들은 현장학습계획서를 내고 나오지 않았다고?”
구장철은 전화를 내렸다.
지금 들은 그대로라는 듯 권혜림을 보았는데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있다.
“설마?”
권혜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