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8화: 검은 대륙(1)
아까올라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던 권총수가 돌연 표정을 풀며 웃어 버렸다.
“이보세요 아까올라 선생, 대한민국은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테러범이 마음대로 들어와 일을 저지르고 유유히 빠져나갈 만큼 어수룩하게 치안유지를 하는 나라가 아니란 말입니다. 북한이란
이상한 체제의 국가와 오랫동안 충돌하고 머리싸움을 하다보니 당신들이 미국 들어가기가 어렵듯 우리나라도 개나소나 마구 들어와 일 저지르고 내뺄 수 있는 엉성한 곳 아니라는
얘깁니다.”
아까올라의 말은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얘기 한 토막을 빼놓고 있다는 것을 권총수는 간파한 것이다.
권총수의 오른손이 올라간다.
다시 분근착골을 시전하려는 것이다
“백서건설!”
오른손을 들어 올리려던 권총수가 멈칫했다.
“뭐라고 했소?”
아까올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권총수의 일거수일투족이 체크되고 있을 그 시점에 이곳 백서건설 현장 소장 유병구로부터 제안이 들어왔다.
IS와 선이 닿고 있는 현지 노동자 소개로 들어온 내용은 권총수 제거 청부였다.
수많은 폭력 조직들이 권총수를 노렸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정치와 종교적 신념으로 뭉친 테러조직 뿐이라는 것이 백서건설 측 입장이라는 것이다.
테러조직은 범죄집단과 틀려서 총포류, 그중 폭탄을 이용한 공격에 능숙하고, 결정적인 건 붙잡혀도 배후를 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천만 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일이 시작된 것이다.
“또 권씨라는 건데.”
지프 운전자의 주머니를 샅샅이 뒤지고 온 오민철이 이마를 찡그렸다.
“설명은 복잡했지만 내용을 들여다 보면 의외로 아주 단순하군. 이곳 백서건설 현장에 IS세포로 활동하는 사우디 노동자가 있는데 소장 유병구가 그놈을 통해 당신들과 만났다는 것
아니오?”
“맞소.”
오민철이 노려본다.
죽을 뻔했다.
죽을 뻔 했다기 보다는 죽었다.
단지 운이 너무 좋아 살아난 것이다.
“그럼 오늘 일의 결과도 유병구라는 놈한테 전달해야 할 것 아닌가?”
“그렇소.”
“만나기로 했겠네?”
아까올라는 얼른 대답을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 쉬었는데 모든 걸 포기한 표정이다.
“예!”
“어디요? 만나기로 한 장소?”
오민철이 다그쳤다.
서울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서기관 가레스의 표정이 무겁다.
빌은 자신의 직속 부하이다.
조금전 소속은 다르지만 중동지역 책임자인 맥보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직속 상사가 일단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면서 빌의 범죄에 대해 말했다.
“후우우!”
눈 앞이 캄캄하다.
빌은 지금 지방에서 올라오고 있다.
급한 용무를 보고 오는 길인데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가레스는 한참을 생각했다.
일단 맥보란은 입을 다물어 주기로 했다.
그건 모든 걸 자신에게 맡긴다는 의미였다.
가레스는 밖으로 나와 담배를 물고 서성거렸지만 마땅한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서기관님!”
고개를 돌렸다.
한 명의 백인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는데 빌이다.
지방에서 지금 막 올라온 듯 했다.
“일찍 왔군.”
“웬일인지 한남대교 근처가 전혀 막히지 않는데요. 그쪽 사람들과 만난 얘기는 아주 잘 됐습니다.”
“수고 많았어.”
가레스 앞을 지나가려던 빌이 멈칫하며 돌아섰다.
평소의 가레스와 다른 표정이라는 것을 읽은 것이다.
그냥 지나갈까 하다 CIA요원은 사적인 일(거의가 연인 또는 가족문제)로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서 묻기로 했다.
“서기관님 얼굴에 평소와 많이 다릅니다?”
“그런가?”
가레스는 감정없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푸욱!
한쪽에 만들어진 재떨이에 담배를 끈 가레스가 입을 열었다.
“자네와 나 사이에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되지. 빌, 작년엔가 올 봄엔가 휴가중에 마카오에 들렸던가?”
빌이 멈칫했다.
“거기서 테리얀 이라는 사람을 만났나?”
“서기관님!”
빌의 눈이 커졌다.
“자네의 마카오에서의 활동을 알고 계시는 분께서 이렇게 말하더군. 다행스럽게도 미합중국의 안위와 연결된 국가비밀은 일체 누설하지 않았으므로 조용히 일신상의 이유로 그만둔다는
사직서만 받으면 될 것 같다고 말이야.”
빌의 안색이 굳어진다.
“반역죄로 들어가면 가장 낮아도 십 년이지.”
두 말 더하기 싫으니 옷 벗으라는 뜻이었다.
저벅저벅!
가레스는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십여 걸음 걷던 가레스가 돌아섰다.
“아! 캡틴 권대표님께서 모든 걸 말해주었다네. 그리고 한 마디 꼭 전해라고 했네. 자신을 죽이는데 관여한 사람을 살려준 예는 자네가 처음이라더군.”
그건 사직서를 내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빌은 얼어붙었다.
만약 사직서를 내지 않는다면 권총수가 죽일 수도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아아!
빌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해가 떨어지고 리야드 시내 곳곳의 가로등이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백서건설 현장 소장 유병구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허름한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리야드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 다에라쑤끄 옆에 있어서 그런지 커피숍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런 자리가 좋다.
시끄럽고 사람 많은 곳이 은밀한 만남을 갖는데 좋다는 건 자신이 연구 개발해 낸 생각이 아니다.
오늘 만나려고 한 사람이 중요한 일은 은밀하고 사치스러운 곳보다 약간은 지저분한 사람많은 곳이 가장 안전하다고 가르쳐 주었다.
유병구를 일단 커피 한 잔을 시켜서 직접 들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는 노점에서 한참 경매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나의 물건을 갖고 여러 사람이 사려고 할 땐 경매가 붙는다.
커피를 마시며 창밖과 실내를 번갈아 둘러보았다.
약속시간이 가까워 오는데도 장본인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오분 전에 나타나 딱 정시간이 되면 자리에서 일어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한 시간에 맞춰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면 2,30분 후딱 지나가고 그때서야 일어난다.
그런데 그의 방식은 틀리다.
오 분 전, 아니면 십 분 전에 나타났다가 정시간이 되면 볼일을 보고 일어나 버린다.
볼일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와 전달하기 때문에 결코 1분을 넘기지 않는다.
이 또한 쫓기고 감시받는 자들의 특성이라는 걸 알았다.
3분 전이다.
지금쯤 도착해야 한다.
2분은 순식간에 지난다.
파팟!
유병구는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일어서려는데 한 사내가 어깨를 눌렀다.
“앉아요.”
맞은편에 한 사내가 앉았다.
“조금 늦었습니다.”
유병구의 눈이 커졌다.
만난 적은 없지만 사진을 통해 여러 번 봤기 때문에 누군지 알고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 뉴스 화면을 통해서도 봤고 세계적인 용병이며 상상을 초월하는 전설을 끌어안고 다니는 사내라고 들었다.
“아까올라는 나오지 못합니다. 소장님 시간 없으니 간단히 몇 마디만 묻고 가겠습니다. 배후 꼭대기에는 권혜림입니까?”
유병구는 대답 대신 마른 침을 삼킨다.
무척 긴장이 되는 모양인지 커피를 단번에 비워 버린다.
“대답 잘하세요. 괜히 충성한다고 혼자 독박쓰면 소장님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모두 황천길에서 만날 테니까.”
부르르!
유병구는 완전히 떨었다.
살짝 떠는 것이 아니라 고압 전류에 감전된 사람처럼 온 몸을 드러나게 움직인 것이다.
가족을 몰살하겠다는 말이 그나마 남아있던 그의 이성을 완전히 헤집어 버렸다.
“고등학교 1학년 그리고 3학년 두 남자아이가 있더군요. 아내는 중학교 선생님이고, 시범으로 두 아이 중 한 명을 교통사고로 보내볼까요. 아니면 아내부터?”
유병구는 입을 열었다.
열어야 했다.
그런데 너무 떤 나머지 제대로 발음이 되지 않는다.
“마...말하면....모든 것이.”
“비록 법을 전공하지 않았어도 대략 그림이 그려질텐데요. 배후는 권혜림이고 행동에 나선 이는 아까올라 일당입니다. 중간에 심부름한 소장님은 아무리 형을 세게 받는다고 해도 절대
4년 이상 넘지 않습니다. 원하면 내가 로펌까지 추천해드리죠.”
그러니까 두려워 말고 털어 놓아라.
“예 맞습니다. 배후 꼭대기는 회장님입니다.”
권총수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석 달 전 서울에 있는 백서건설 사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이런저런 현장 얘기를 주고 받던 중 불쑥 그가 말을 꺼냈다.
“현지 노동자중에 정치적 색채가 강한 친구가 있는지 좀 알아볼 수 있어요? IS 이런 집단과 뭐 연락이 가능하다던가?”
유병구는 IS란 말에 깜짝 놀랐다.
백서건설 사장 구장철은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허허하며 웃더니 잠시 후 정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나와 유 소장만 아는 일입니다.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회장님께서 관심이 많아요. 당장 IS와 선이 닿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세요.”
멀쩡한 회장을 자기 마음대로 끌어들일 리 없다.
회장이 시킨 일이니 걱정 말고 알아보라는 뜻이다.
예상대로 노동자중에 IS는 없었지만 한 다리만 건너면 접촉 가능하다는 친구가 있었다.
그의 소개로 IS관계자와 만난 것이다.
IS는 마다하지 않았다.
사막의 흑새와 IS는 불구대천지수이다.
어차피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는 판에 돈까지 준다는데 쌍수를 들어 오케이 할 일이었다.
비록 한국이 가보지 않은 낯선 나라이긴 하지만 이쪽에서 적극 도와준다면 승산이 있었다.
스윽!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잘 판단하리라 믿고 전 이만.”
권총수가 걸어나가자 갑자기 부른다.
“저기!”
돌아선 권총수를 향해 말했다.
“연락처를.”
“그렇죠. 내 연락처가 필요할 테죠.”
권총수는 문자로 자신의 연락처를 찍어 보내주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보이며 커피숍을 나갔다.
‘내 번호를 알고 있다니’
절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오늘날 휴대폰은 그 사람의 일기장이며 수첩이다.
개인의 가장 비밀스런 공간인 것이다.
그런 공간의 열쇠를 풀 수 있는 번호를 알고 있다는 건 자기 하나 정도는 언제든지 마음먹는 대로 죽이고 살릴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자신이 아무리 가로막아 봤자 얼마든지 다가오고 빠져나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커피잔을 들어 올렸지만 비었다.
생애 최대 위기다.
선택해야 한다.
권혜림이냐 아니면 권총수냐.
어쩌면 오늘 밤이야 말로 지금까지 살아온 지난 48년의 시간보다 더 길어질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병구는 천천히 커피숍을 나섰다.
커피숍 바깥 길가 한곳에 랜드로버 한 대가 주차해 있었다.
차 안에는 권총수와 오민철이 앉아 커피숍을 나서는 유병구를 바라본다.
“죽일새끼!”
오민철이 이를 갈았다.
권총수가 진정시키지 않았다면 유병구는 성한 몸으로 커피숍을 걸어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권총수는 흥분하는 오민철을 진정시켰다.
진짜 배후는 따로 있다. 유병구는 허수아비와 마찬가지다. 진정해라.
유병구를 보고 화낼 필요는 없다.
“아무리 회장년이 시켰다고 해도 응할 일이 있고 거부할 것이 있지.”
죽을 뻔했다.
철저히 운이 좋아 살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