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5화: 암살공작(2)
혼자라는 말에 여자는 노골적으로 긴장한다.
권총수는 자리에 앉더니 옆에 꽃아 놓은 메뉴판을 펼쳐 들었다.
위에서부터 쭈욱 훑더니 메뉴판을 접었다.
“조니 워커 주세요.”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여자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자기 가게에서 가장 고가의 술이다.
경기가 좋지 않아 대부분이 맥주를 찾고 아주 드물게 윈저 정도를 찾는 사람이 있지만 조니워커는 드물다.
“다른 것 필요 없고 술과 스트레이트 잔 하나만 주시오.”
여자는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번쩍이는 자색 쟁반에 조니워커와 잔을 가져와 놓았다.
“초코렛이라도 몇 개 드릴까요?”
안주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절대 뭘 먹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가의 양주를 먹는 사람들이 안주에 부담을 가질리는 없고 대개의 지금과 같은 경우 불편한 심사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괜찮습니다.”
딱!
권총수는 마개를 따서 곧장 잔을 채우더니 단숨에 비웠다.
또르르!
다시 잔을 채운다.
두 번째 잔을 비우고 세 번째 잔을 채우려는데 탁자 위에 올려 놓은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채불수라는 이름이 떴다.
이 깊은 새벽에 무슨 전화일까 싶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팀장님!”
“결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전화를 해볼까 망설이다 술 한 잔 마신 기분에 용기를 냈습니다.”
그러고 보니 혀가 약간 말린 느낌이다.
“오늘, 12시가 지났으니 어제군요. 공항사건 말입니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뉴스에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람은 A씨라는 익명으로 보도됐다.
“어딥니까? 그래요. 잘됐군요. 이곳으로 오세요.”
권총수는 핸드폰을 내렸다.
“제가 한 잔 드려도 되겠어요.”
지켜보고 있던 주인 여자가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여자는 두 손으로 술을 따랐다.
“서현주라고 합니다.”
권총수는 잔을 비우고 서현주 앞으로 내려 놓았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네 좋아요.”
서현주는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친구 분 오시나 보죠?”
얼마 되지 않았다.
혼자 온 남자가 윈저 한 병을 시켜 놓고 마시다 성폭행범으로 돌변하여 큰일을 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세상의 남자들은 술집 여자는 아주 쉽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후로 손님 없을 때 혼자오는 손님은 웬지 불편하게 보는 습성이 생겼다.
권총수가 들어섰을 때 바라보았던 시선도 그때 사건의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전 통화 내용을 듣고 안심한 것이다.
“아는 경찰이죠.”
경찰이라는 말에 서현주 표정이 더욱 환해졌다.
그러더니 곧바로 잔을 비우고 권총수에게 내민다.
20여분 정도 흘렀다.
조니워커 반병이 사라졌고 취기가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할 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권총수가 고개를 돌렸다.
채불수가 서 있다.
“팀장님!”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채불수와 가볍게 악수를 했다.
채불수는 직원들과 한 잔 했다면서 권총수가 따라준 술을 받았다.
그때 미안했던지 서현주가 쟁반에 과일 몇 가지를 깎아 내왔다.
“감사합니다.”
채불수는 서현주를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서현주는 살짝 웃으며 밖으로 나갔고 두 사람은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
채불수가 주로 질문을 던졌다.
전화상으로도 내색을 보였지만 공항 사건에 대해 뭔가 파고들고 싶은 모양이다.
권총수는 대강 설명을 끝내고 왜 그렇게 관심을 갖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채불수가 말했다.
“사건이 우리쪽으로 넘어 올 것 같습니다. 원래는 공항경찰단서 맡아야 하지만 우리가 대표님과 관계된 사건을 오랫동안 수사한 경험도 있고 하다보니 상부에서 용의자를 쫓는데 우리가 더
빠를 것으로 판단한 모양입니다.”
권총수가 채불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채불수가 멈칫했다.
“그것이 전부입니까?”
즉 그 말을 전달하기 위해 이 시간에 여기까지 택시를 타고 왔느냐는 것이었다.
“대표님!”
마신 술이 수사관 특유의 냉정한 감정을 흔들어 버린 것일까.
채불수는 당황했다.
권총수는 술이 떨어지자 한 병을 더 시켰다.
서현주가 술병을 놓고 돌아갔고 권총수는 마개를 따고 술을 채운다.
“우리 팀장님이 날 염려할 리는 없고.”
즉 아까 전화상으로 공항사건을 입에 담으면서 정말 별일 없느냐고 물었다.
그건 정말로 신변이 염려되거나 다쳤을까 우려하여 묻는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아직 정리되지 않은 용건이 있다는 걸 권총수는 알아차렸다.
물론 그 용건은 권악수 사망사건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비록 제가 술로 인해 감정의 컨트롤을 못했다고는 해도 역시 대표님은 속일 수 없군요.”
채불수는 어색한 표정을 했다.
그리고 손으로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씹으며 말했다.
“그 날 말입니다. 권악수 회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채불수는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대표님 집 앞에 설치된 CCTV를 살펴 봤는데 한 가지 이해 할 수 없는 것을 찾았습니다.”
“말해 보세요.”
“아침까지 대표님 차가 들어가지 않았더군요.”
“내가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려는 것이군?”
“택시도 찍히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주무셨습니까? 어엇!”
질문을 하다 말고 채불수가 깜짝 놀라 외쳤다.
분명히 맞은편에 앉아 있던 권총수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잠깐 사과 한 조각 집어들기 위해 시선을 내리긴 했으나 1초도 채 안될 것이다.
더욱 놀랄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화장실 문이 안쪽에서 열리더니 권총수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누가 보더라도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걸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권총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맞은편에 앉았다.
“드시죠!”
술잔을 들어 올려 단번에 비웠다.
하지만 채불수는 마시지 않았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거의 넋이 빠진 사람처럼 멍한 시선을 던졌다.
눈을 은근슬쩍 비비고 다시 봐도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권총수였다.
“여기 얼음 좀 주시죠 온더락스 잔도 함께.”
“네!”
서현주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채불수는 침을 삼킨다.
권총수가 화장실에서 걸어나온 건 단순한 행동이 아니었다.
당신 눈을 피해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사라질 수 있는 나다.
조금전 당신이 CCTV 운운하며 했던 말은 나에게는 아주 쓸데없는 얘기들이다.
‘당신 내가 화장실 가는 것 봤냐’
채불수는 어금니를 물었다.
화장실 가는 걸 보지 못했다.
자가용이나 택시가 아닌 다른 수단으로도 얼마든지 CCTV를 피해 퇴근하고 출근할 수 있다는 걸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씨익!
채불수는 끝내 웃고 말았다.
웃지 않을 수가 없다.
미주알고주알 변명도 할 필요 없고, 자초지종을 설명해 가며 권악수 죽음과 무관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 없다.
지금의 행동으로 자신의 의심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채불수를 향해 묻는다.
채불수는 잔을 비우며 말했다.
“이럴 때 할 말 없다고 하죠. 그렇다고 의심을 지운건 아닙니다. 대표님한테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니까.”
채불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했습니다. 혹여 불쾌하셨다면 저의 직업이 형사라는 걸 생각하여 이해 바랍니다.”
“언제든지 의심되면 오세요.”
채불수가 사라졌다.
서현주의 눈이 달라진다.
대충 보아하니 권총수가 누군가를 죽였고 지금 나간 형사는 증거는 없지만 범인으로 지목한 모양이다.
조용하던 가슴이 떨리고 겁이 더럭 난다.
권총수는 마치 서현주의 마음을 알기나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카드를 내민다.
오민철은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권총수는 병원과 상의하여 오민철을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이송했다.
“살려만 내시오.”
권총수는 담당의사를 향해 말했다.
이미 오민철이 누구고 권총수가 어떤 사람인지 병원 원무과를 통해 전달이 된 듯 담당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 할테니 걱정 마십시오.”
“치료비는 병원 몫이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지불하는 감사금은 교수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 맞죠?”
그건 오민철을 살려내면 개인적인 보상을 하겠다는 약속이다.
의사는 목례를 하며 다시 한 번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의사와 헤어진 권총수는 일층으로 내려왔다.
워낙 대형 사건이었고 더욱이 공항에서 벌어진 폭발 사고인 탓에 병원 앞에는 취재진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낯익은 사내들이 보였다.
바로 이번 사건을 넘겨 받은 채불수 강력2팀원들이었다.
모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이미 어제 채불수로부터 상황을 전달받았기 때문에 권총수는 질문에 망설이거나 눈치보지 않고 대답했다.
북한 특수부대 출신 11명을 데리고 들어온 길이었다는 말에 모두가 놀란다.
정말이냐는 시선이다.
“국정원에 알아보면 될 것 아닙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화가 진동했다.
권총수는 핸드폰을 꺼냈는데 대북파트5국장 정현웅이다.
“1차 조사는 마쳤습니다. 모두 525부대 출신 맞습니다. 또한 정치적 색채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며칠 몇 가지 더 심문을 한 뒤 국적허가서를 발행할 예정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권이 나올 것이고 곧바로 직원으로 채용이 가능할 것입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정현웅이 전화를 끊었다.
“그쪽 사람입니다. 별일 없다는 전화군요.”
채불수를 향해 말해 주었다.
“우린 두 가지 방향으로 사건을 추적할 생각입니다. 하나는 그들 11명에 대한 훼방차원의 사건으로 남한에 있는 고정간첩의 짓이라는 가능성과 다른 하나는 대표님과 원한이 깊은 쪽으로
봅니다.”
당연한 얘기였다.
“바깥(해외)쪽은 일단 놔두고 국내부터 추적해볼 생각입니다.”
“국내라고 하면?”
채불수는 약간 모호한 표정을 했다.
권총수를 노리던 권악수는 이미 죽었다.
서옥선도 죽었고 현미정도 싸늘한 시신이 된지 오래다.
“글쎄요. 솔직히 권씨 집안 말고도 적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냐 하는 약간의 비웃음으로 보인다.
하지만 권총수는 덤덤한 얼굴이다.
“그럴거요. 국방부쪽에서도 나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고, 다른 일반 보안업체들도 좋은 자원을 내가 모두 싹쓸이하니 불편하겠죠. 어떤 사람은 날 죽이고 싶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장원리를 따라 능력 부족의 자신을 탓할 것이고.”
딸칵!
권총수는 앞쪽 벤치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채팀장님!”
권총수는 상체를 벤치 등받이에 붙이며 맞은편에 서 있는 채불수는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는 채 팀장님의 그 열정, 반드시 범인을 체포하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높이 평가하고 감동합니다. 하지만 신념이 지나치면 몰락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권총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누군가는 지은 죄가 없는데 경찰 수사를 뭘 걱정하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용병들은 틀리죠. 자꾸 귀찮게 할 땐 방아쇠를 당깁니다. 없애 버리는거죠.”
“이제는 협박이 노골적이군요. 그것도 현직 경찰관에게 말입니다.”
“내가 앞서 말했잖습니까. 서로 좋은 감정일 때 헤어지자. 굳이 그렇게 나와 불편해지고 싶어 하십니까?”
툭!
권총수는 피우던 담배를 앞으로 퉁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