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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590화 (590/651)

제590화: 남자(1)

도박판에서 돈을 잃는 건 상대 실력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모자란 탓이다.

권철악은 대한민국 재계1위 기업의 총수였고, 권철태는 전직 대통령이었다.

백서그룹 또한 재벌이면서 막강한 힘을 지녔다.

대한민국 대표 로열 패밀리라는 말을 들었던 권씨가문이 한 사내에 의해 풍비박산이 났다.

그건 권씨가문의 능력으로는 권총수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즉 경기는 종료된 것이다.

그런데 권혜림의 말은 지금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겠다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갑자기 담배 피울 맛도 떨어진다.

윤구노는 천천히 돌아섰다.

죽이겠다는 뜻이 아닌 여론을 이용해 심판하고 매장 시키겠다는 말에 짠 계획이었다.

골치가 아프다.

벤츠 한 대가 어군 주차장으로 들어온다.

“키 놔두고 내리세요.”

주차 직원들이 다가왔고 문이 열리자 윤구노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어군이 처음은 아니다.

서초동 밥을 먹고 사는 사람치고 한두 번 와보지 않은 사람 없을 것이다.

키를 건네주고 천천히 입구로 다가오는데 한 사내가 깍듯하게 허리를 굽힌다.

“아니 사장님!”

사내는 바로 어군의 사장 마석춘이었다.

웬만해서는 밖에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 직원들이 안내를 하고 가끔 고위 공직자들이나 여의도 사람들이 오면 얼굴을 잠시 비치는데 자신을 보고 인사를 했다.

“날 기다린거요?”

“귀한 분 오신다는 얘기에.”

“귀한 분?”

“권 대표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잘 모셔야 한다고.”

“권대표? 권총수?”

“들어가시죠.”

마석춘이 미소를 지으며 앞장을 섰다.

갑작스런 환대에 윤구노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좋았다가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며 얼굴이 싸늘해졌다.

어느 영화에서 봤던 한 장면이다.

그토록 엄격하고 사납던 교도관이 며칠 전부터 굉장한 친절을 베푼다.

그러자 주인공 죄수는 놀라기도 하며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삼일이 지나고 난 아침 일찍 조용히 교도소 문이 열리며 그 교도관이 나타나 교도소장 호출이라고 불러낸다.

가는 길은 교도소장이 있는 사무실이 아니라 사형장이었고 그렇게 전기의자에 앉아 떠났다.

“어서 오십시오.”

마석춘이 열어주는 문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권총수가 웃음을 지으며 일어났다.

“사진으로는 몇 번 뵀습니다.”

권총수가 손을 내밀었다.

“사진?”

“전번 백서건설 노동자 투신사고 때 카메라 앞에 섰잖습니까?”

“아, 예.”

척!

두 사람은 굳게 악수를 하고 마주 앉았다.

동시에 문이 열리고 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탁자가 가득 넘친다.

“올해 마지막 오오마산입니다.”

마석춘이 문밖에서 미소를 짓고 문을 닫아 준다.

“마지막 오오마 산이라는데 드셔 보시죠.”

권총수가 참치를 권했다.

“참치는 먹지만 맛까지는 아직 모릅니다.”

오오마산 어쩌고 한다는 건 참치에 대해 아는 지식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도 맛과 향에서 오오마산이 단연 최고라는 말은 들었으나 구별할 수준은 아니다.

윤구노는 재빨리 한 걸음 뒤로 빼기로 했다.

이 자리는 권총수 주도로 흘러가야 한다.

자신은 분위기를 맞추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권총수가 참치에 대해 말하면 크게 호응하고 대답하는 것이 좋다.

“겸손하십니다.”

“무슨 말씀.”

“한 잔 들죠.”

권총수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윤구노는 재빨리 잔을 들어 부딪쳤다.

“대표님 건강을 위해 건배 하겠습니다.”

“난 팀장님의 무사 안녕을 바라는 마음으로 건배 하겠습니다.”

쨍!

권총수는 곧바로 잔을 부딪치고 마셨다.

하지만 윤구노는 멈칫하며 권총수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 전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난 팀장님의 무사 안녕을 바라는 마음으로 건배 하겠습니다’

무사안녕.

자신은 지금 무사안녕하지 못하다.

권총수에게 굉장한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며칠 전 있었던 권혜림의 방문이 자기 머리에서 나온 시나리오라는 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무사 안녕을 바란다는 의미는 정확히 뭘까.

여기까지는 넘어가지만 한 번 만 더 그따위 장난질을 하면 그때 죽여버리겠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냥 생각없이 뱉어낸 말일까.

당대 제일의 명문가라는 권씨 집안을 거의 초토화 시켜버린 인물이 자신을 불러다 놓고 아무 의미 없는 말을 할 리는 절대 없다.

“감사합니다.”

재빨리 술을 마시며 가볍게 목례하듯 고개를 숙였다.

무사안녕을 위해 절대 이번과 같은 일은 벌이지 않겠다는 맹세였다.

“십 년을 사귀어도 마음에 썩 들지 않은 사람이 있고, 하루만 봤을 뿐인데 뜨겁게 와닿는 벗이 있다더니 윤팀장을 두고 하는 얘기 같습니다.”

권총수가 한손으로 윤구노에게 소주를 따른다.

또르르!

잔이 채워지자 재빨리 병을 잡고 권총수 잔을 두 손으로 채웠다.

“팀장님!”

권총수가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멈칫!

눈을 맞추려던 윤구노는 가늘게 눈을 떨며 슬며시 피했다.

마주 바라볼 수가 없을 만큼 맑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눈을 티 없고 맑은 눈이라고 하지만 결코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권총수의 눈만큼은 못할 것이다.

심산유곡을 흐르는 물줄기라고 해도 결코 이보다 맑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너무 맑아 마치 풍덩 그 속으로 빠질 것 같은 착각이 드는 눈빛.

‘도대체 이건 뭐지’

사람의 눈이 아니다.

해도 너무 맑다.

내공이 어느 경지를 넘어(登峰造極) 다시 원래로 돌아오는(六息歸元) 경지에 이르러 몸과 마음이 완전히 새롭게 재탄생하는(反老還童)경지가 되면, 눈빛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안공지살(眼功之殺)이라고도 하고 목경살(目鏡殺)로도 불리는데 눈이 맑아질수록 뿜어나오는 살기가 강해진다.

지금은 살해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고 경고 차원에서 약간의 내공만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무공에 대해 알지 못하는 윤구노는 마치 호랑이 앞에 토끼처럼 옴짝달싹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람의 눈이 아니다. 온 몸이 얼음 속에 갇힌 듯 시려온다’

진짜 추위는 바람이 불지 않고 기온이 내려갈 때다.

바람이 불면 등을 돌려 어느정도 추위를 막을 수 있지만 기온이 떨어져 버리면 어떤 동작도 통하지 않는다.

온 몸이 산산이 부서질 것처럼 춥고 떨린다.

“즐겁게 마시죠!”

권총수가 잔을 들어 비운다.

하지만 윤구노는 식은땀을 흘리며 안색이 누렇게 변해 버렸다.

대리기사를 불렀다.

“저기 차 좀 세우시오.”

뒷좌석에 앉은 윤구노는 오른쪽 길가에 호롱불처럼 곧 꺼질 것 같은 작은 간판을 가리켰다.

“무진기행이라고 쓰인 곳 말입니까?”

“그렇소.”

차가 길가에 멈추자 윤구노는 일단 오만 원짜리 두 장을 주며 말했다.

“한 잔 더할 생간인데 기다려 줄 수 있겠소?”

10만원에 이미 기사는 흡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천천히 드십시오.”

“이해해줘서 고맙군.”

차에서 내린 윤구노는 골목 입구에 있는 무진기행이란 술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들르면서 주인과도 안면이 상당히 있다.

삐걱!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좁은 카페 안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했고 한 사내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일행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좁은 실내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따라했다.

-거뜬히 총을 메고 나서는 아침, 눈 들어 눈을 들어 앞을 보면은-

윤구노의 눈이 번쩍 뜨인다.

낯익은 노래다.

‘군가다’

자신은 법무관으로 군생활을 했었다.

그때 아침마다 수색대대원들이 구보를 했는데 가장 많이 불렀고 그래서 귀에 익었다.

--물도 맑고 산도 고운 이강산위에 서광을 비추고자 행군이라네--

순간 우울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벗겨지며 윤구노는 같이 따라 불렀다.

-동이 트는 새벽 꿈에 고향을 본 후 외투 입고 투구 쓰면 마음이 새로워--

노래가 끝났기 때문에 모두가 조용했다.

그러다 보니 윤구노 혼자 노래를 부르는 꼴이 되었는데 기타를 치는 청년이 원모타임 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카페안 사람들이 윤구노를 따라 부른다.

갑작스런 윤구노의 등장에 모두가 호응하며 환영했다.

--서광을 비추고자 행군이라네-

일제히 합창이 끝나고 윤구노가 주인 여자에게 말했다.

“사장님, 맥주 한 박스.”

“정말요?”

“날 뭘로 보고, 당장 대령하세요.”

그러자 한 사내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그러자 또다시 사내들이 일제히 합창을 했다.

--바로 당신 사나이 멋진 사나이--

하면서 일제히 윤구노를 가리켰다.

그렇게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으며 윤구노는 다운되었던 감정을 끌어 올리며 최후의 만찬 같았던 악몽의 시간을 잊었다.

다음 날 평소와 달리 느즈막하게 출근을 했다.

11시가 넘어 나타나는 법무팀장을 보며 사무실 변호사들의 눈이 커졌다.

윤구노는 아직 술이 덜 깬 듯 눈이 빨갰다.

“어제 약주 하셨습니까?”

후배 변호사가 얼굴을 보며 씨익 웃는다.

“조금 했지.”

그리고 냉수 한 컵을 정수기에서 따라 마시더니 책상위에 있는 인터폰을 누른다.

“회장님 계신가? 알겠네.”

인터폰을 끊고 사무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권혜림은 회사 주요 간부들과 회의중이었다.

윤구노는 비서실에서 기다렸는데 일부 직원이 흘긋거렸다.

숙취가 남아 그가 들어오자 술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냉수 한 잔 드릴까요. 팀장님.”

남자 직원 한 명이 일어나며 웃는다.

“좋지!”

이럴 땐 흔쾌히 호응하는 것이 좋다.

남자 직원 역시 하늘같은 이사급인 법무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빨리 일회용 컵에 냉수를 가득 채워 가져왔다.

“김민철씨는 항상 밝은 얼굴이어서 좋아요. 잘 마시겠습니다.”

일부에서는 자신을 크레믈린이라고 한다.

러시아 크레믈린은 독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로 대통령궁이다.

아마 잘 웃지 않고 특히 일반 직원들과 잘 어울리지 않아 그런 별명을 붙인 것으로 보이는데 어제 밤 권총수에게서 한 가지를 배웠다.

권위는 억지로 연출한다고 하며 세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따라 만들어지고 형성된다는 걸 권총수를 통해 깨우친 것이다.

부드럽게 말했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으며 목소리도 높이지 않았으나 자신은 그 앞에서 옴짝달싹 못했다.

물론 지레 겁먹은 것도 있었지만 어느샌가 두근거리는 가슴은 사라졌고 대신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위엄을 보았다.

그때 회의가 끝난 듯 간부들이 나오고 있었다.

법무팀장 윤구노는 회의를 마치고 나온 사람들과 악수를 하며 밝게 인사를 했다.

자신과 그들의 하는 일이 워낙 달라 일적으로 주고받을 말이 없었기에 가벼운 인사로 스쳐 지나갔고 윤구노는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침에 찾았더니 출근 전이라고 하더군요.”

권혜림은 짧은 치마를 걸쳤는데 다리까지 꼬고 앉아 커피를 마셨는데 탄탄한 허벅지가 안쪽 깊숙이까지 드러났다.

눈앞의 자세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오늘 따라 시선 둘 곳이 마땅찮았다.

“어제 술 많이 했나보군요?”

권혜림도 술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누구와 마셨죠?”

정말 알고 싶어서 묻는 것이 아니라 그냥 던진 질문이다.

“누구와 마셨을 것 같습니까?”

윤구노는 정색했다.

의미를 두지 않고 물었는데 윤구노가 빤히 보며 물어보자 권혜림이 꼬았던 다리를 풀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글쎄요. 좋은 사람들과 마셨나봐요. 아침까지 이렇게 술 냄새가 나는 걸 보면?”

“권총수씨와 마셨습니다.”

파악!

커피를 들어 올리던 권혜림이 그만 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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