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9화: 살려주세요(2)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고 오로지 녹음기 속의 음성만 사무실에 울린다.
탁!
세 번을 들었다.
“왜 그러시죠?”
권혜림이 눈을 빛내고 물었다.
“글쎄요. 회장님 의도를 알아차렸다고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알아차렸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윤구노가 정면으로 권혜림을 바라보았다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뭔가 눈치를 채지 않는 이상 이렇게 위험한 표현 하나 없는 대화를 나누기란 어렵죠.”
권혜림의 얼굴색이 싹 바뀐다 .
조금 전까지는 약간 흥분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돌덩이처럼 딱딱하다 못해 검게 변해 버렸다.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물론 긁어 부스럼이라고 할 수 만은 없었다.
자신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었던 큰어머니 서옥선이 죽고 둘째 큰어머니는 구속되었다가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가장 결정타는 권악수의 죽음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권씨 집안에서 권악수가 차지하는 위치는 다르다.
그의 성품이 잔인하니 어쩌니 해도 자신도 모르게 권악수가 있어 든든했다.
그런 권악수가 떠났고, 모든 걸 지켜보는 권혜림으로서는 당연히 다음 표적은 나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당하느니 미리 치자는 계획의 일환으로 윤구노와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낸 것이 찾아가는 것이었다.
권총수 입장에서는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으면 찾아왔을까하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이쪽을 안심시키는 얘기를 해 줄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희망적인 얘기가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해볼 만 한 작전이라고 일을 벌였는데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괜한 호랑이 콧털만 건드린 꼴 아닌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윤구노는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권혜림의 표정은 더욱 얼어 붙었다.
혀로 입술을 축이더니 어금니를 문다.
“차라리 지금 찾아가서 무릎을 꿇을까요? 잘못했다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 빌면 어떨까요?”
윤구노의 눈이 좁아졌다.
권혜림을 오랫동안 지켜봐왔다.
지금의 표정과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가끔은 상대를 떠보는 말을 잘 하는 권혜림이었기에 잠시 침묵하기로 한다.
권씨는 다 죽었다.
권씨중 살아 남은 사람은 이제 권혜림 혼자 뿐이다.
물론 권혜림의 두 큰어머니는 권씨가 아니지만 권총수에게 저항하다가 당한 것이다.
“윤 팀장님!”
권혜림은 빛나는 시선으로 윤구노를 바라보았다.
“어떡해요?”
간단한 여자가 아니다.
권씨 피가 흐른다.
오죽하면 재계에서 그녀를 카멜레온이라고 할까.
표정과 말투를 보고서 그녀를 판단했다가는 제대로 뒤통수 맞는다는 뜻이다.
나를 숨기는데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지닌 여자다.
어쨌든 얼굴만큼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 갈 것처럼 흑빛으로 변해 있다.
진짜 당황하고 두려운 사람은 윤구노 자신이었다.
이번 작전을 입안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 전부터 권혜림의 지시를 받아 권총수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지만 백서그룹 쪽을 향한 어떤 손길이나 공격의 칼날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둘 떠나가는 친인척을 보는 권혜림의 심사가 마냥 편할 리는 없었다.
이런 식이라면 나에게도 올지 모른다.
아니 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권혜림의 판단이었고 자신에게 대책을 지시한 것이다.
그래서 사흘 밤낮을 고민하고 세운 계획인데 너무 간단하게 깨져버린 듯 보인다.
벌떡!
권혜림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더니 비서에게 냉수 한 컵을 시켰다.
잠시 후 여비서가 머그컵에 냉수를 가득 따라 가져왔고 단숨에 비워 버린다.
“한 말씀 하세요. 지금 갈까요. 사과하러?”
그녀의 눈이 빛났다.
완전히 겁먹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윤구노는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
“가보시죠.”
순간 권혜림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혀 예상 못 한 대답인 듯 했다.
그래도 체면이 있지 어딜 가느냐.
권총수를 공격하기 위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 찾아간 증거가 있느냐.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을지는 모르지만 녹음 내용 지워버리면 없었던 일 된다고 말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찾아가라?”
그녀는 팔짱을 끼었다.
장웅철의 1심 선고가 내려지는 날이다.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권총수와 오민철이 보였다.
장웅철은 권씨집안의 책사였다.
모든 계획은 그의 머리에서 나왔으며 특히 권악수를 보좌하면서 그의 칼은 더욱 더러워졌다.
스스로 자신을 시궁창으로 표현할 정도였다.
그런데 막판에 권총수가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칼을 들이대는 바람에 장웅철은 돌아섰다.
그래도 어찌했던 장웅철이 끝까지 모든 걸 혼자 책임지고 교도소에 들어갔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
“기립!”
판사가 들어섰다.
“착석!”
법정은 숨을 죽였고 판사가 사건 요지에 대해 잠깐의 설명을 한 뒤 곧 이어 검사의 공소장 낭독이 있었다.
재판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20여분이 흘렀고 마침내 판사의 입에서 장웅철에 대한 형량이 떨어졌다.
장웅철이 위반한 범죄 사실을 하나하나 열거하더니 판사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단호히 말했다.
“피고 장웅철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한다.”
장웅철의 아내 진혜미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는데 상대는 권총수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면서 오늘 4년 정도 떨어질 것이고 항소하여 반드시 집행유예를 받아 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진짜 그대로 된 것이다.
죄수복을 입은 장웅철은 교도관들에 의해 걸어나갔는데 고개를 돌려 권총수를 바라보았다.
가벼운 목례를 했다.
자신의 변론은 블랙잭 고문 변호사인 이충문을 필두로 하는 감앤장 로펌이 맡고 있다.
국내 최고의 로펌이며 변호인단도 전력이 화려했다.
“감사합니다.”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누군가 인사를 했다.
권총수가 걸음을 세웠는데 장웅철의 아내 진혜미였다.
“너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한때는 적이었지만 내 편으로 돌아선 이상 분명하게 도와줘야 한다.
진혜미는 계속 고맙다면서 고개를 숙였고 권총수는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며 위로했다.
누군가 예상보다 형량이 가볍다고 했다.
고개를 돌렸는데 언론사 취재 기자들이 나오면서 자기들끼리 얘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자식들!”
오민철이 들리지 않게 기자들을 노려보았다.
장웅철의 1심 4년 선고는 속보로 나갔다.
윤구노는 잘 아는 지인으로부터 장웅철의 4년 선고에 대한 전화를 받고서 다시 한 번 권총수의 힘을 확인했다.
하루 종일 불안하다.
참다 못해 약국에 가서 우황청심환을 사서 먹었지만 뛰는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점심도 먹는둥마는둥 했는데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어디 편찮으세요?”
사무실 법무팀 후배 변호사가 슬쩍 묻는다.
“아냐. 소화가 좀 안되는데.”
“점심 생각 없다고 안 드셨잖습니까?”
“아...아침 먹은 것이 좀 그래.”
“팀장님 나이 정도 되면 조금만 아파도 병원 자주 가봐야 합니다.”
염려가 되어 하는 소리일 것이다.
그런데 마치 악담처럼 들리는 건 불안 때문일까.
지나가는 후배 변호사를 슬쩍 쏘아 본 뒤 책상위에 놓인 담배를 주워들었다.
그나마 담배를 피울 때는 다소 가슴이 진정된다.
담배야 말로 진정한 위로자였다.
지이잉!
담배를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주머니속 핸드폰이 울렸다.
본능적으로 누구 전환가를 보기 위해 액정으로 시선이 간다.
꿈틀!
이마를 찡그렸는데 낯선 번호다.
지인들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이 찍히는데 처음 본다.
몇 번의 벨이 울리자 잘못 걸려온 전화라고 생각하고 끊었다.
그리고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는데 다시 벨이 울렸다.
흠칫!
이번에도 같은 번호다.
010으로 시작되므로 스펨은 아니다.
특히 잘못 걸어온 전화가 연속으로 울릴 리는 거의 없다.
그다지 기분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끊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옥상에 흡연공간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이잉!
세 번째로 전화가 걸려왔고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엘리베이터 타기를 포기하고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누구십니까?”
약간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다.
“처음 보는 번호여서 부담이 됐나봅니다.”
윤구노는 이마를 찡그렸다.
상대의 목소리가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좀 뵈었으면 해서 말입니다. 나 권총수라고 합니다.”
휘청!
하마터면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살아오면서 이토록 전화 한 통에 놀라보기는 처음이었다.
S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것도 재학중에 합격하여 주위의 부러움을 샀고 검사로 임명되어 승승장구했다.
옷을 벗을 때 자신의 위치는 검사장이었다.
전관예우라고 변호사 개업한지 3년 만에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백서그룹 법무팀장으로 편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조폭들이 칼을 목에 들이대고 협박하기도 했고 미국 법무 연수를 갔을 때는 국내 조폭들의 청부를 받은 미국 갱단으로부터 공격을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다.
“일찍 전화를 드리려고 했는데 바쁜 일이 있어 조금 늦었습니다. 오늘 저녁 소주 한 잔 어떻습니까? 제가 잘 아는 참치집이 있는데, 바쁘시면 다음으로 미뤄도 괜찮습니다.”
바쁘면 거절해도 된다고 하지 않고 다음으로 미뤄도 좋다고 했다.
그건 반드시 만나겠다는 뜻이었다.
“오늘은...”
“그럼 내일은?”
윤구노는 자신이 이미 권총수의 미끼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내일도 어렵다고 하면 계속 말꼬리 물고 늘어지면서 기어이 나오라고 할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끌려가는 꼴을 보이느니 당당하게 응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몇 시에 뵐까요?”
윤구노는 몇 마디 더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
쨍!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권혜림이 내렸다.
“윤 팀장님!”
“아, 예!”
“뭐하세요? 어디 가는 건가요?”
“담배 한 개 피우려고.”
“오 분만 시간 내주세요.”
“그러시죠.”
돌아서서 사무실로 들어가려 하자 권혜림이 말했다.
“사무실까지 갈 것 없고 여기서 말할게요.”
권혜림은 엘리베이터에서 조금 떨어진 복도 창가에 섰다.
멀리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며칠 고민 했는데 결정했어요.”
고개를 돌려 무슨 결정을 했느냐는 시선으로 보는 윤구노에게 선언한다.
“싸우기로.”
“누구와 싸운단 말입니까?”
“나 권철무의 딸이에요. 우리 오빠도 그놈 손에 죽은 것이 분명해요.”
권악수를 말하는 것인데, 윤구노가 보기에 권악수는 가만히 있었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누군데 하며 함부로 까불다 죽은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회장님 지금 권총수에게 덤비겠다고 했습니까?”
“네. 할거에요. 무섭다고 피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요.”
자신만만하게 내뱉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내려가 버린다.
혼자 남은 윤구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닫힌 엘리베이터를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피식 웃음이 터진다.
처음부터 어떤 형태로든 권혜림도 이 싸움에 끼어들 생각을 갖고 있었음이 확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