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8화: 살려주세요(1)
휴게실은 직원들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휴식 공간이다.
근무 시간에는 거의 이용하는 사람이 없지만 가끔 사무실에서 미팅이 여의치 않을 때는 휴게실을 많이 이용한다.
그런데 오늘 따라 휴게실에는 직원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마흔 초반 가량 보이는 여자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녀 앞에는 커피가 놓여 있었는데 관리실 직원 누군가가 대표를 만나러 왔다는 말에 서비스 해준 모양이었다.
딸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정장을 한 권총수가 들어서고 있었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총수는 여자 앞으로 다가가 가볍게 허리를 숙여 목례했다.
“권총수입니다.”
여자도 똑같이 고개를 꾸벅하며 말했다.
“권혜림이라고 합니다.”
“앉으시죠.”
권총수는 자리를 권하며 마주 앉았다.
“저희 회사에 어쩐 일이십니까?”
서옥선은 제일 큰 어머니이고 현미정은 둘째 큰어머니이다.
또한 권악수는 사촌 오빠가 된다.
세 사람의 장례를 치루느라 정신없었다는 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화장을 했는데도 초췌한 표정을 숨기지는 못했다.
“진즉부터 대표님을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나를요?”
“어떤 분인지 궁금했고.”
권총수는 가볍게 웃었다.
“내가 왜 궁금했을까요? 난 그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
흠칫!
웃지만 권총수가 뱉어내는 질문은 날카로웠고 말을 돌리지 않는 직설에 권혜림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금세 표정을 관리했다.
어떤 분인지 궁금했다는 건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권총수가 자기 집 안 사람들을 하나둘 죽이고 있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권총수는 오독배가 가져다 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권혜림의 실물은 처음 본다.
물론 뉴스 화면에서는 몇 번 본적은 있었다.
권총수는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기로 했다.
대기업총수다.
나이도 자신보다 연장자이고 또한 아직 어떤 목적으로 찾아왔는지 모른다.
지레짐작하여 상대를 몰아치거나 불편하게 할 필요는 없다.
“이런 말 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는데...”
권혜림은 망설였다.
권총수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어려운 말을 하겠다는 추임새처럼 보였는데 권총수는 다시 한 번 살짝 커피를 마신다.
어떤 말을 해도 상관없으니 편하게 행동하라는 배려다.
백서그룹 고 권철무 회장과는 직접적인 은원이 없다.
다만 권철태 제거 작업에 아들 권왕수가 설치며 끼어들었다가 희생된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고개조차도 돌리지 않았다.
“나는 괜찮은 거죠?”
권총수는 깜짝 놀랐다.
그 말은 나도 죽일 것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 못한 질문에 권총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입니까?”
“이렇게 왔으니 하고 싶은 말 다하겠어요. 난 죽이지 않을 거죠?”
권총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회장님!”
“솔직히 무서워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요. 내가 잘 아는 사람이 그랬어요. 현대 수사기법이나 과학으로는 권총수를 절대 잡지 못한다고.”
“오해가 깊군요?”
내가 당신들 가족들을 죽인 사람으로 보이느냐는 뜻이다.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나 또한 그들과 대표님은 전혀 관련이 없다고 믿어요.”
살려 달라고 해놓고 관련이 없다고 믿는다니 한마디로 어르고 뺨 때린다.
하지만 권혜림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여길 찾아왔다는 자체가 의심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죽기 싫어요.”
자신감이 붙은 듯 좀 더 사실적으로 나온다.
그녀의 눈이 흔들린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눈 앞에 저승사자를 두고 앉은 사람처럼 어깨까지 떨었다.
“지금 나를 얼마나 모욕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권총수가 정색하자 권혜림이 손사래를 친다.
“모욕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불안해하며 살고 싶지 않아서.”
“회장님은 날 지금 엄청난 살인자로 몰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왜 회장님을 죽인다는 거죠?”
“그냥 내 느낌에.”
권혜림은 진짜로 공포스러워 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권총수를 한 번도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손을 가지런히 무릎 앞에 놓고 약간 고개를 떨군 채 말을 했는데 급기야 눈물까지 흘렸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긴 직원들이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휴게실입니다. 그만 눈물 닦으시고 돌아가십시오. 두 번 다시 이런 식으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권총수는 몸을 돌려 휴게실에서 나가버렸다.
탁!
문이 닫히고 권혜림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오 분여 앉아있던 권혜림은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
문을 열고 나가자 문밖에 오독배가 서 있었다.
“제가 엘리베이터 앞까지 모시겠습니다.”
“고마워요.”
오독배는 권혜림과 두 걸음 정도 떨어져 걸었다.
권혜림은 복도를 걸어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한참을 걸어 엘리베이터에 앞에 도착했다.
탁!
재빨리 오독배가 지하2층 주차장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아래에서 올라왔는데 두 사람은 나란히 서 있었다.
쨍!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린다.
“안녕히 가십시오. 회장님!”
“커피 잘 마셨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탄 권혜림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탁!
문이 닫히고 잠시 서 있던 오독배는 몸을 돌렸다.
한편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 권혜림은 가방에서 작은 손가락 굵기의 물건을 꺼냈는데 얼핏 USB를 닮았다.
한쪽 윗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누르자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앉으시죠.”
권총수의 목소리다.
권혜림은 녹음된 권총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금전 불안해하던 표정은 오간데 없고 두 눈이 살벌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건 몰랐겠지’
그러면서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지하 2층 주차장에 도착하자 자신의 차를 운전하는 제모춘이 재빨리 다가왔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별일은.”
제모춘이 재빨리 뒷문을 열어주자 권혜림이 차에 올랐다.
운전석 문이 닫히고 차가 주차장을 벗어났다.
권혜림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녹음은 잘 된 것 같아요. 그래요. 지금 회사로 가는 중이니 회사에서 봐요.”
전화를 받는 사람은 회사 법무팀장이다.
부우웅!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가 도로에 진입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권총수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눈썹을 약간 찌푸리고 있다.
“흐으음!”
잠시 길게 심호흡을 하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말 그 집안은 구제 불능인가.”
벌컹!
권혜림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듯 오민철이 뛰어 들어왔다.
“갔어?”
재빨리 맞은편 소파에 앉는다.
“뭐래? 설마 너하고 한 판 붙자고 온건 아닐 테고?”
“이상한 집안이야. 그래도 권씨 핏줄 중에는 제일 낫다고 생각했던 권혜림까지 이럴 줄 몰랐는데.”
그러면서 살려달라는 말을 하더라고 했다.
“네가 뭔데 그 여자를 살리고 죽이냐?”
오민철이 눈을 빛냈다.
“바로 그거야.”
권총수가 허리를 폈다.
“내 입에서 나올 말을 노린거야.”
“녹음?”
“그 여자는 내가 반로환동의 경지에 올랐다는 걸 몰라. 그 여자 핸드폰 속에서 고성능 녹음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 아무리 성능이 좋다고 해도 내 귀에는 센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지. 괜히 천리지청술이겠어.”
권총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그건 강호 고수로서의 자부심이었고 결코 누구도 자신의 눈과 귀를 속이지 못한다는 경고였다.
“알았으니 문제될 얘긴 안했겠네?”
“물증이 있어야 하지만 어쨌든 내 입을 통해서 죽였다는 긍정적 대답이 나온다면 문제가 커지지.”
그렇다.
무척 시끄러워진다.
법적 처벌은 받지 않더라도 언론을 통한 비난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과감히 널 찾아와 그런 녹음을 할 시도를 하다니 역시 권씨 집안의 무대뽀 정신인가.”
오민철이 고개를 끄덕인다.
여자 배짱으로는 장난 아닌 것만큼은 사실이지만 권혜림의 잔머리에 넘어갈 권총수가 아니었다.
“결국 시간만 낭비한 헛걸음이군.”
“꼭 그렇지만은 않아. 그 여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번거지. 어쩌면 살려둬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걸 분명히 보여준 것일 수도 있고.”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해되지 않는 집안이야. 아니 가만 있으면 잘 살텐데 이런 식으로 접근하여 굳이 매를 버는 이유가 뭐야. 상대가 눈치를 챈다면 이런 식의 접근이 얼마나 상대를 모욕하고 비참하게
만드는지 몰랐단 말이야.”
“똑똑한 집안인데 어쩔 때 보면.”
권총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권혜림이 널찍한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뒤를 머리가 희끗한 한 명의 사내가 따르고 있었는데 백서그룹 법무팀장 윤구노였다.
핸드백을 던지듯 책상 위에 놓고 윤구노와 소파에 마주 앉았다.
권혜림은 곧장 녹음한 내용을 틀어 주었다.
윤구노는 눈을 빛내며 듣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 심각했던 얼굴 표정과는 다르게 윤구노의 얼굴이 풀어지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10여분 정도 되는 분량의 녹음 내용이 끝나자 권혜림이 물었다.
“어떤가요?”
“한 번만 더 들어보죠.”
권혜림은 처음부터 다시 틀었다.
윤구노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녹음 내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보였다.
탁!
녹음기가 꺼졌다.
“어때요?”
“생각보다 약합니다.”
윤구노는 변호사다.
대화 내용이나 음성 녹음 가지고는 결코 법적 단서가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그가 노린 건 여론이었다.
백서그룹의 광고를 받는 언론사가 한두 곳이 아니다.
만약 권총수가 자신이 죽였다는 걸 암시하는 듯 한 얘기만 있어도 그대로 기사화할 생각이었다.
광고 싫어할 신문사 없다.
앞 다투어 비중있게 다룰 것이다.
어느 칼럼니스트는 이렇게 쓸지도 모른다.
‘녹음된 목소리 하나로 그를 살인자로 몰아세울 수는 없다. 하지만 누가 묻지도 추궁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죽였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그의 말을 우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것도 한 곳이 아닌 수많은 신문과 방송들이 일제히 떠들면 여론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청와대 국민청원이라도 넣을지 모른다.
‘살인자 권총수를 처벌해 달라’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서 말이다.
법적으로 처벌이 되든 되지 않든 한동안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며 아무리 망각을 잘하는 국민성이라고 해도 권총수는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는 매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녹음 내용 어디에도 자신이 죽였다는 의심이나 징후를 느낄만한 대목이 없었다.
이걸 가지고 기사화 했다가는 오히려 권총수에게 역공을 받을 위험이 크다.
“모자란 가요?”
“기사화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용이 너무 일반적입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듯한 표현이나 단어가 있어야 하는데 깨끗합니다.”
“혹시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일부러 말을 조심했을까요?”
윤구노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대신 다시 한 번 녹음기를 돌린다.
두 번이나 들었는데도 표정은 진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