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7화: 모두가 사람 아니다(2)
당황한 표정이다.
이제와 수십 년이 지난 일을 꺼낸 이유가 뭘까.
“범죄를 저지른 자를 죽여야지 그 범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을 죽인다는 건 억지 아닙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난 죽을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미친놈아.”
의도를 모를 땐 깔아뭉개는 것이 최선이다.
“거머리만도 못한 놈.”
권총수는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살아오면서 아직까지 개새끼라는 소린 들었어도 거머리만도 못한 놈이라는 말은 처음입니다. 어쨌든 좋습니다 거머리만도 못한 놈이 한마디 하죠.”
권총수 얼굴 전체로 웃음이 번져갔다.
그건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졌을 때 퍼져나가는 물결과 비슷했다.
“으흡!”
얼굴 전체에 웃음이 퍼지는 순간 현미정은 번개처럼 주먹을 피하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웃는다.
얼음덩어리가 웃고 있는 듯 온 몸이 서늘해졌고 뭔가 때릴 듯 밀려오는 느낌이 든다.
물론 본인은 그것이 살기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이 놈이 지금’
웃는 얼굴이 이토록 소름끼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웃고 있다.
기록하던 교도관은 권총수의 웃는 얼굴을 보며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웃음 오랜만에 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미정의 눈은 다르다.
마치 저승사자가 앞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온 몸이 쭈뼛거리며 일어 설 때 귓속에 속삭이듯 들려온 목소리 하나가 있었다.
‘이슬람에서는 당신 같은 사람을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악의 덩어리가 뼈속 깊이 박혔다고 말입니다. 사람이라면 한 번쯤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권총수 입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귀속으로 전달되는 목소리 주인은 권총수였다.
‘강호의 법은 오늘 날 방식과는 많은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피는 반드시 피로 갚고,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고 했죠. 다행히 난 군자가 되지 못해 거의 30년을
기다렸습니다’
“너 지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귓소리로 전달되는 목소리에 악을 쓰듯 말했다.
두려움을 떨쳐 내려는 행동이다.
전화기를 잡고 통화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입으로 말을 하지도 않는데 목소리는 들려온다. 온 몸을 공포가 휘감는다.
“안녕히 계십시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섰다.
현미정은 사라지는 권총수를 가만 보더니 그대로 보내줄 수는 없다는 듯 꽥 소릴 질렀다.
“야 이 개자식아, 네놈을 절대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기어이 살려달라고 빌도록 만들어 주겠다. 개잡놈아!”
권총수가 문 앞에서 돌아섰다.
현미정은 교도관의 손에 이끌려 막 돌아서려는 참이다.
히죽!
권총수가 웃는다.
웃음이 얼굴전체로 퍼지면서 권총수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밤 저녁을 먹고 난 현미정은 수감된 방으로 돌아왔다.
방안에는 두 명의 동료 죄수가 먼저 와 있었다.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사모님!”
“정말 드러워 못 먹겠네. 병원도 자기가 준비해온 밥을 먹을 수 있는데 교도소는 왜 안 되는거야. 썅!”
“죄짓고 들어온 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네.”
“뭐라고 이년이.”
쉰 가량의 뚱뚱한 여자 죄수를 향해 현미정이 몸을 날렸다.
“염병!”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 가볍게 피하면서 한 손으로 현미정의 머리채를 잡고 늘어졌다.
“이런 싸가지 없는 년이 사모님 사모님하고 불러줬더니 아직 빵깐 군기를 뭘로 보고.”
휘익!
그대로 엎어 쳐버린다.
꽈당!
현미정은 그대로 패대기를 당하며 나동그라졌다.
팍팍!
뚱뚱한 여자가 양 소매를 걷어 올렸다.
“잘 걸렸다. 오늘 진정한 빵깐의 법이 어떤건지 보여주마.”
여자는 쓰러진 현미정을 발로 차려다 멈칫했다.
현미정이 꼼짝하지 않았다.
“이년 왜 이래.”
퍽!
발로 건드리듯 차며 말했다.
“일어나봐. 이년아 일어나라니까?”
하지만 현미정은 꼼짝하지 않았다.
“어!”
다른 동료죄수가 재빨리 현미정을 살폈다.
“사모님, 사모님!”
그러면서 양 뺨을 톡톡 때렸다.
그러나 여전히 꼼짝을 않고 그제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 재빨리 가슴에 손을 대어 본다.
왼쪽 젖가슴이 삐져나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대던 여자가 놀란다.
“심장이 안 뛰는 것 같은데요 언니.”
“지랄하네. 잘 대봐 이년아.”
“안 뛰어요.”
“비켜 봐.”
뚱뚱한 여자 죄수가 현미정의 가슴에 손을 철퍼덕하며 댔다.
한참을 대더니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퍼억!
이번에는 오른쪽 가슴에 솥뚜껑만한 손을 올렸다.
“심장은 왼쪽이야 언니.”
“시끄러 이년아!”
“씨발 왜 안 뛰어.”
다시 왼쪽 가슴에 손을 대고 여전히 뛰지 않는 듯 안색이 가볍게 변하더니 여자는 오른손을 잡고 맥을 짚는다.
“언니 뭐해요?”
“이년아 보면 몰라. 맥 짚잖아.”
“맥이 손목에 있지 거긴 팔둑이잖아.”
“팔뚝이나 손목이나.”
양손을 번갈아 대보더니 여자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시팔 좆됐다. 야 간수 불러.”
파파팡!
여자가 재빨리 철문을 두드리며 창살 틈으로 외쳤다.
“간수님, 간수님!”
그때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모자를 쓴 간수가 나타나 툭 물었다.
“왜 그래?”
“사모님이 숨을 안 쉬어요.”
“정말이야.”
“정말이에요. 죽은 것 같아요.”
“죽긴 뭐가 죽었다고 그래 이년아.”
뚱뚱한 여자가 버럭 소릴 지르고 덜컹하는 소리가 들리며 간수가 들어섰다.
“오말숙씨 어떻게 된겁니까?”
“나도 몰라요. 성질나서 패대기 한 번 쳤더니 말이 없잖아요.”
재빨리 몸 상태를 확인한 간수가 무전기로 구급요원들을 호출했다.
그리고 양손을 포개어 심폐소생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퍽!
퍼퍼퍼퍽!
포갠 양손바닥으로 현미정의 가슴을 압박하며 번호를 센다.
“열여섯, 열일곱!”
분당 백회의 속도로 해야 한다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숫자를 세는 것 같았다.
드르르르!
이동 침대를 밀며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다섯 명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두 명은 교도관이고 세 명은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들이었는데 심폐소생술을 펼치는 교도관을 향해 말했다.
“잠깐 비켜보세요.”
“심장 반응이 없습니다.”
의사 가운을 걸친 사람이 재빨리 전원을 켜고 가슴에 패드를 부착하면서 제세동기를 작동했다.
그러면서 이동침대에 싣고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구급 요원들이 떠나고 방에는 교도관 세 명과 여자 둘만 남았다.
“오말숙씨 어떻게 된 겁니까?”
“아이 재수 없어. 하도 싸가지 없이 굴기에 엎어치기 한 판 했더니 조용하잖아요.”
선임으로 보이는 어깨에 잎사귀 세 개가 붙은 교도관의 눈이 이번에는 젊은 여자 죄수를 향했다.
말단 교도 바로 위에 있는 교사계급이다.
“정말입니다. 말숙이 언니가 대접해줬더니 보이는 게 없냐면서 살짝, 아주 부드럽게 패대기 한 번 쳤는데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어요.”
“알았어요. 일단 별도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 두 사람은 운동, 작업에서도 제외된다. 식사 또한 이곳에서 대기한다.”
쾅!
문이 닫히고 교도관들이 사라졌다.
조말숙은 벌렁 누우며 투덜거렸다.
“재수 옴 붙없네.”
그녀는 전혀 걱정되거나 불안하지 않는 듯 투덜거렸다.
현미정이 죽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교도소측은 아직 부검 결과가 나오지 않아 원인을 분명히 말할 수 없다면서 사망 사실만큼은 인정했다.
사망한 전 천왕그룹 회장 권철악의 부인 서옥선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어 아들 권악수 역시 차량전복에 의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이번에는 친모 현미정까지 교도소에서 숨이 끊어졌다.
누군가는 저승사자가 권씨 집안을 싹 쓸어갔다고 말했다.
과거에 죽은 권씨 집안 사람들까지 거론되면서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부를 일궜던 가문이 멸족을 당했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역시 많은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살인이냐 사고냐는 논란에서부터 시작해 누군가의 복수라는 설이 소문의 맨 윗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한 사내의 이름이 대중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권총수’
권총수에 대한 이야기를 무게 있게 실은 곳은 국제일보였다.
국제일보가 내 보낸 기사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권총수가 사망한 전 대통령 K의 핏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른 신문들도 권총수에 대한 기사를 집중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신문 기사들도 대부분 국제일보에서 터뜨린 기사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전 대통령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성 기사가 대부분이었고 그 이상은 파고들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조태일보 경우는 권총수와 권철태의 사진을 나란히 싣고 관상가의 말을 인용했다.
골격과 이목구미가 권철태 전 대통령과 흡사하며 가족 관계일 가능성이 80퍼센트 이상이라는 것이었다.
언론 보도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권총수쪽에서 첫 반응이 나왔다.
그런데 어떤 해명을 기대했지만 근거 없는 보도나 추측성 기사에 대해 법적책임을 묻겠다는 경고였다.
그것도 국내 제일의 로펌 감앤장을 통해 나온 멘트였기 때문인지 다음 날부터 모든 언론에서 권총수의 이름이 쏙 들어가 버렸다.
“감앤장 파워가 세긴 세구나.”
출근한 오민철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섰다.
먼저 와 있던 권총수에게 한 잔을 건네고 씨익 웃는다.
권총수는 아무런 표정 없이 커피를 마셨다.
“일부 시민단체에서 널 살인혐의로 고발했다는데?”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참겸’이라는 단체였다.
참는 것이 겸손이라는 의미의 이 단체는 갈수록 흉포화 분노화 되어 가고 있는 우리 사회를 정제시킬 목적으로 결성되었다고 했다.
‘고발장을 보니 신문에서 난 기사를 그대로 재탕했더군요’
회사 고문 변호사인 감앤장 소속 이충문 변호사가 전해준 얘기였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오민철은 지금 참겸 뒤에 배후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직원 몇 명을 보내 살피고 있었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리고 관리실 직원 오독배가 들어섰다.
“누가 찾아왔습니다. 대표님!”
“누가?”
오민철이 묻는다.
“어디서 오셨냐니까 대답은 않고 대표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여자 분입니다. 여기 명함.”
오독배가 명함한 장을 내밀었다.
명함을 받아 본 권총수 이마가 찌푸려졌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명함을 본 오민철이 놀란다.
“권혜림.”
백서그룹 회장이다.
아버지와 오빠 권왕수가 죽으면서 자연스럽게 승계하여 회사의 대표가 되었는데 모두가 깜짝 놀라고 있었다.
아버지 때보다 훨씬 회사 규모를 키웠고 과감한 투자와 공격적인 경영으로 사세가 급성장하여 지금은 재계 서열 5위까지 올라왔다.
“이 여자가 왔단 말이야?”
오민철이 묻는다.
오독배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있어요?”
권총수가 물었다.
“휴게실에 있습니다. 모셔 올까요?”
“혼자 왔단 말입니까?”
“예!”
권총수의 눈빛이 잠시 가라 앉는다.
백서그룹이라는 거대기업의 총수가 아직 10시가 넘지 않은 이른 시간에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아왔을까.
“내가 휴게실로 가지.”
권총수는 벗어 놓은 윗도리를 걸치고 오독배를 따라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