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4화: 대멸종(2)
서옥선은 파일을 잠시 살피더니 고개를 들었다.
“마음이 통했지만 주주총회라는 것이 법적 증거물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여기에 주주 여러분들의 사인을 좀 부탁합니다.”
“그야 어려울 것 없죠.”
가장 큰 소리로 대답한 사람은 건영캐피탈 대표 추상철이었다.
이어 다른 사람들까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옥선이 내민 종이에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사사삭!
모두가 자신의 이름을 쓰고 사인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서옥선의 표정은 딱딱해 있었다.
여기 있는 주주들 사인이 끝나면 모레 주주총회는 열리나 마나였다.
무려 52퍼센트로 과반을 넘게 획득하여 자신이 경영권을 쥐고 모든 인사권까지 다스린다.
사사삭!
마지막 사내가 사인을 끝내고 직접 서옥선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제대로 확인하시죠. 누군가 사인을 잘못했을지도 모르니까?”
객실에서 호탕한 웃음이 흘러나왔고 서옥선의 눈은 사인이 된 위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확인을 하고 난 서옥선은 주주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마음 잊지 않겠어요. 반드시 천왕그룹을 회복시켜 모두의 가슴에 기쁨을 주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경영을 맡길 만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으신지요?”
주주 한 명이 묻는다.
서옥선은 눈을 좁혔다.
“있죠. 지금 발표하기에는 그렇고 두고보면 만족해 하실 겁니다.”
“그러니까 더욱 궁금해 집니다.”
“우린 사모님만 믿습니다.”
주주총회 위임장 말고도 몇 건의 사안이 더 있었고 토론은 이어졌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뒷좌석에 앉은 서옥선은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이 비가 그치면 더워질 거야’
주주들과의 만남은 뜻대로 잘 끝냈으나 가슴 한 곳이 불편한 건 왜인가.
사악!
싸아악!
와이퍼는 열심히 앞 유리에 떨어지는 빗물을 닦아냈다.
부우웅!
신호가 바뀌고 차는 다시 출발했다.
“웬 놈의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거야.”
새로 입사한 운전사 겸 비서 김용국은 쏟아지는 비를 보며 중얼 거렸다.
촤아아!
차는 속도를 높였고 도로의 차량은 한산했다.
속도계가 80을 넘었을 때 전방의 신호가 노란불로 바뀐다.
김용국은 또 다시 신호에 막히자 짜증스런 얼굴을 하면서도 브레이크를 서서히 밟았다.
그리고 정지선에 차를 세운뒤 습관적으로 왼쪽 룸미러를 보더니 소스라친다.
“저런 미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엄청난 굉음이 들리며 서옥선이 타고 있던 벤츠가 튕겨 나가 버렸다.
퍼퍽!
튕겨나간 벤츠는 가드레일까지 치면서 아래 개천으로 추락했다.
빗길에 뒤 따라 오던 덤프트럭이 미끄러지며 벤츠를 쳐 버린 것이다.
덤프는 화물칸 가득 공사장 폐기물을 싣고 있었는데 벤츠를 추돌하고도 30여미터를 더 미끄러져 교차로를 지나 멈춰 섰다.
잠시 정적이 흐르면서 덤프가 비상등을 켰다.
그리고 3분이 지나고 운전석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내렸다.
그는 재빨리 핸드폰으로 119에 신고를 하면서 가드레일을 뚫고 개천으로 처박힌 벤츠를 찾아 달려갔다.
벤츠가 보인다.
내리는 비로 개천의 물이 늘어나 벤츠의 지붕만 드러나고 있었다.
스윽!
돌연 사내는 왼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다른 전화기 한 개를 꺼냈다.
조금전 119신고를 했던 전화기가 오른손에 쥐어져 있었다.
휘익!
사내는 왼손에 들린 핸드폰을 급류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오른손에 들린 핸드폰은 비가 맞지 않게 퉁겨나간 가드레일 조각 아래 살며시 놓고 개천으로 몸을 날렸다.
풍덩!
과감하게 급류 속으로 뛰어든 기사는 물살에 휩쓸리면서 벤츠 지붕위로 올라섰다.
지붕을 밟고 선 사내는 차량상태를 살핀 뒤 재빨리 내려갔는데 비교적 수압이 낮은 왼쪽 뒷문이다.
뒷문을 온 힘을 다해 당긴다.
왼손은 차의 지붕을 짚고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당기지만 문은 꼼짝하지 않았다.
물은 더욱 불어났고 사내까지 휩쓸고 지나갈 듯 소용돌이 쳤다.
운전기사가 문을 열기 위해 발버둥 칠 때 몇몇 운전자들이 개천둑에 나타났다.
“위험합니다. 위험해요.”
가해차량의 운전자라는 걸 십분 인정한다 해도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고 벤츠가 들썩인다.
그건 곧 떠밀려 내려갈 징조였다.
“그냥 돌아와요. 아저씨 안됩니다.”
개천가에 서 있던 사람들이 소리쳐 말했다.
그때 119 구급차와 경찰차가 도착했다.
개천가로 달려온 구급대원들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당신 뭐하는 겁니까? 나오세요.”
그리고 재빨리 구급대원 한 명이 허리에 밧줄을 걸고 뛰어 들었다.
다른 대원은 밧줄을 잡고 언제든지 잡아 당길 준비를 했는데 가지고 간 쇠망치로 문을 두들겨 깨뜨렸고 차 안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10여초 후 구급대원이 서옥선을 데리고 물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밧줄을 잡고 있던 대원들이 힘차게 잡아 당기면서 밖으로 끌려 나왔는데 서옥선은 어떤 반응도 없었다.
여자 구급 요원이 맥을 살피고 경동맥을 만지더니 고개를 저었다.
죽었다는 신호였다.
촤아악!
그 사이 이번에는 운전석 문이 깨지며 운전기사 김용국이 끌려 나왔다.
뭍으로 나온 김용국 역시 맥을 살폈지만 반응이 없다는 사인을 했고 곧장 두 구의 시신은 119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 사이 경찰은 덤프 기사를 차에 태우고 근처 파출소를 향해 이동했다.
비는 계속 퍼부었다.
모두가 떠난 개천가에 검정색 벤츠 한 대가 서 있었다.
차 안에는 권총수와 오민철이 앉아 있었다.
유리를 살짝 내리고 담배를 피우는 권총수를 보며 오민철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어떻게 시나리오가 똑같냐?”
권총수를 향해 묻는다.
아주 오래전 권총수를 낳은 한 여자도 지금과 비슷한 수법으로 권철태에 의해 죽었다.
그때는 눈이 왔다는 것만 다를 뿐 같은 방식으로 덤프트럭이 뒤에서 밀었다.
“빗길에 미끄러졌다는 건 항상 가해자에게 일정한 관용으로 작용하지.”
권총수가 혼잣말을 흘렸다.
“둘 모두 죽었어도 많아야 3년이겠지?”
권총수 손에는 조금전 사내가 급류로 던졌던 핸드폰이 쥐어져 있었다.
사내의 움직임을 보고 있다 급류에 빠지기 직전 허공섭물의 방법으로 끌어 당긴 것이다.
“그만 갑시다.”
부웅!
차가 시동이 걸리고 벤츠는 사건 현장을 떠났다.
권악수는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금 막 경찰에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서옥선이 교통 사고를 당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잠깐 신분 확인을 부탁한다는 내용이다.
쭈욱!
언더락스 잔에 채워진 양주를 단숨에 비운다.
탁!
잔을 내리고 담배를 피워 문 권악수는 상체를 쇼파에 붙이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그렇게 갈거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늙으면 가만히 방구석에 앉아 텔레비전이나 쳐 보고 놀일이지 왜 나서냐고’
후우우!
연기를 길게 내 뿜을 때 누군가 인터폰을 누른다.
인터폰을 보더니 일어나 눌러 대문을 열어주고 다시 쇼파에 앉았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운전기사 양형모였다.
“차 대기해요.”
“예!”
양형모는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현관을 나섰다.
현관을 나가 왼쪽으로 돌아가면 지하주차장으로 통하는 문이 나온다.
권악수도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 입기 시작했다.
지하 주차장 문이 열리고 벤츠 한 대가 나타났다.
양형모가 운전대를 잡은 권악수의 마이바흐다. 차는 골목을 나가 왕복 2차선 도로에 진입했다.
촤아아!
번쩍!
천둥번개가 치며 잠깐 온세상이 환해졌다가 다시 어두워 졌다.
뻐어어!
차 가까이 벼락을 맞은 소리가 들린다.
내리막길을 가던 마이마흐가 휘청하더니 길 아래 언덕으로 굴러 버렸다.
쿠쿠쿵!
언덕은 제법 높다.
차는 언덕을 굴러 커다란 바위에 걸려 멈췄다.
“으으으!”
둘 모두 죽지는 않았다.
에어백이 터졌고 운전사 양형모는 고통스런 얼굴로 뒤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가 소스라쳤다.
목이 돌아가지 않는다.
목뼈가 부러진 것이다.
“회...회장님!”
그 와중에도 권악수를 찾았다.
“회장님!”
“으으! 개자식아 어떻게 운전을 했기에 으으으아아아!”
“죄...죄송합니다.”
양형모는 핸드폰을 찾았다.
119에 신고를 하려는 것이다.
전화기가 없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 혹시 바닥으로 떨어졌나 싶어 오른발로 더듬 거렸다.
항상 컵을 놓은 홀더에 꽃아 놓는데 오른손을 더듬거려 않아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권악수는 충돌순간 에어백이 터지면서 혀를 깨무는 바람에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욱!”
차문을 열려고 오른손을 뻗다 말고 신음을 흘렸다.
어깨뼈가 문제가 생긴 듯 끊어지는 듯 한 통증이 밀려왔다.
몸을 돌려 오른발로 문을 밀었다.
하지만 내부 손잡이를 당기지 않으니 문은 꼼짝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왼손을 뻗었는데 아프긴 해도 오른팔처럼 통증이 심하지는 않았다.
딸칵!
문이 열렸다.
하지만 차가 비슷하게 기울어져 있어 완전히 열리지는 않았고 잘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벼엉신,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이를 부드득 갈며 겨우 기어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쉬파알! 어디 있는거야?”
권악수 역시 구조요청을 하려고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조금 전 분명히 의자에 떨어져 있는 걸 주워들고 나온 것 같은데 없어졌다.
땅바닥을 짚느라 혹시 주위에 놔뒀나 싶어 찾아봐도 핸드폰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고개를 들던 권악수는 소스라쳤다.
“으허헉!”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속에 한 사내가 우뚝 서 있었는데 그의 손에 자신의 핸드폰이 쥐어져 있었다.
“너...넌 권총수.”
권총수가 빗속에 서 있었다.
한참 그렇게 내려다 보더니 천천히 쭈그리고 앉는다.
스윽!
두 사람의 눈 높이가 비슷해졌다.
권총수는 자켓에 청바지를 입고 야구모자를 눌러 쓰고 있었는데 상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입으로 한 개비 물더니 권악수에게 내민다.
권악수는 멈칫하며 잠시 주저하더니 왼손을 내밀어 받았다.
딸칵!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권총수는 단번에 불을 켰고 권악수에게 붙여준다.
이어 자신도 불을 붙이고 길게 연기를 뿜었다.
연기는 쏟아지는 폭우에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그날은 눈이 왔다던데.”
권총수는 흘긋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날’
권악수는 무슨 말인가 눈을 빛냈다.
비가 권총수의 얼굴에 내려찍듯 박혔다.
파파파팍!
“원래 부전자전이라는 말은 그런데 쓰는게 아닌데 갑자기 그 말 밖에는 생각 나는 것이 없군.”
그날은 비가 아닌 눈이 왔다는 건 무슨 뜻이며 부전자전이라는 건 또 뭔가.
그러다 한순간 권악수의 눈이 커졌다.
정확할지 모르지만 한 가지가 떠오른 것이다.
아버지 권철태의 지시를 받고 설지라는 여자를 죽일 때의 얘기를 장웅철을 통해 들은 적이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밤 늦게 돌아오는 설지의 승용차를 어둠속에서 트럭이 뒤를 받아 버린 것이다.
죽음을 앞둔 권철태는 자신에게 당시 사건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오늘 밤 자신도 덤프를 이용해 서옥선의 차량을 들이 받았고 그렇게 교통사고를 위장해 죽였다.
부전자전이란 죽이는 수법이 아버지나 아들 모두가 똑같다는 뜻이었다.
파르르!
빗속에 젖은 권악수의 눈썹이 떨린다.
‘어떻게!’
이번 만큼은 완전범죄라고 자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