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9화: 살육의 시작(3)
만에 하나 부인한다거나 모른다는 헛소리를 하면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들이대겠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는 입장이라고 하지만 해도 너무 한다.
“시간을 드리죠. 10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해 지금부터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존경하는 최승재 지검장님!”
비아냥거리듯 환한 미소를 지은 유철수가 방을 나갔다.
방을 나간 유철수는 곧장 화장실로 걸어갔다.
남자 화장실로 들어선 유철수는 잠김이라고 쓰인 손잡이 부분을 가볍게 돌렸다.
그러자 잠김이 열림으로 바뀌면서 문이 열렸는데 안에 유철수 검사가 좌변기에 앉아 있었다.
눈을 뜨고 앉아 있지만 수혈이 제압되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단지 청각을 열어놨기 때문에 누군가 노크를 하면 본능적으로 두드리면서 사람이 있다는 걸 알린다.
스으으!
사내의 얼굴이 반죽이 되듯 흐트러지더니 권총수의 것으로 바뀐다.
최승재를 취조하는데 30분이 채 안 걸렸다.
유철수의 왼쪽 머리에 손바닥을 얹어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자신과 최승재 사이에 있었던 모든 내용이 그대로 기억되는 것이다.
권총수는 조용히 문을 닫아걸어 잠가주고 나왔다.
오후부터 모든 매체들이 최승재 지검장의 뇌물과 현미정 영장 발부 방해 기사를 톱으로 실었다.
아직 정확한 검찰 발표는 없었지만 취재 기자들 사이에서는 본인은 부인하고 있으나 증거가 너무 완벽해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권악수는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장소는 어군이다.
맞은편에는 그와 친하게 지내는 여당 국회의원 이원성이 앉아 있었는데 둘은 그다지 말이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권악수가 물었다.
이원성은 대답을 않는다.
젓가락으로 참치 한 조각을 집더니 그냥 입속에 넣고 우물 거렸다.
쩝쩝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권악수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의원님?”
왜 대답이 없느냐는 시선이었다.
“으음! 아직은 대책이 없소.”
“대책이 없다니 무슨 말입니까?”
“수사 책임자인 유철수라는 친구가 도무지 말이 먹히지 않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기 위해 그 친구 선후배와 법조계 지인들을 움직여 보지만 워낙 강직하여.”
“세상에 강직하지 않는 놈이 어딨습니까? 만약 계속 고집을 피우면 지방으로 발령내고 한직으로 뺑뺑이 돌린다는 언질을 주면 지가 무슨 배짱으로 버티겠어요.”
“헛헛!”
이원성이 가볍게 웃었다.
“권회장은 아직 뭘 모르시네.”
“내가 뭘 몰라요?”
“버티는 놈들 있어요. 아주 간혹이지만 우리와 피가 다른 제정신이 아닌 친구들이 있습니다.”
“유철수라는 친구가 그런 부류란 말입니까?”
권악수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짓는다.
“우리와 피가 다르다. 돈이나 권력 앞에 흔들리지 않는다? 의원님은 그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아하 권회장 왜 이러세요?”
“죽은 우리 아버지가 그랬소. 짐승이라면 모를까 인간은 절대 돈과 권력 앞에 온전하지 못하다고 말입니다.”
“거의 없지만 아주 드물게 있죠. 가뭄에 콩나듯 말입니다. 유철수가 바로 그런 검사인 모양입니다.”
그때 노크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나타난 이는 장웅철이었다.
“도대체 어딜 갔기에 연락도 안되고 이렇게 늦은거요?”
권악수가 인상을 썼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장 변(辯) 오랜 만입니다.”
이원성이 지그시 웃는다.
“요즘 뭔가 그렇게 바쁩니까?”
권악수가 짜증스런 얼굴로 물었다.
“별 것 아닙니다. 큰 아이 혼사문제로.”
“아 큰 딸 결혼식이 있다고 했죠. 언젭니까?”
이번에는 이원성의원이 물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6월초입니다.”
“큰 딸이 피아니스트라고 했죠.”
“예!”
“호오! 피아니스트, 누굽니까? 내가 클래식을 좋아하다 보니 그 바닥에 대해서는 조금 아는 편인데.”
“내놓을 만큼은 아닙니다.”
“말해봐요. 장 변 답지않게 오늘따라 왜 이렇게 겸손하시오.”
“장상주라고.”
“장상주, 언젠가 쇼팽 콩쿠르에서 2등한 여자가 장 변 딸이란 말입니까?”
“운이 좋았습니다.”
“야 이것 다시 봐야겠는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따님이라니 아 정말 부럽습니다. 아니 그러면 공연표도 좀 돌리고 그러지.”
장철웅은 살짝 웃고 말았다.
“회장님!”
장웅철이 정색했다.
“저 내일 검찰에 출두합니다.”
“장 팀장이 무슨 일로?”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모자라서 회장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골프가방에 10억을 담아 최승재에게 넘긴 동영상을 검찰이 갖고있는 듯 보인다고 했다.
“검찰이 무슨 수로 영상을 갖고 있단 말입니까? 아무도 모르게 진행한 일 아니오?”
“글쎄 말입니다. 저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출두 명령서가 왔습니다. 시끄럽게 하느니 조용히 가서 조사를 받고 오겠습니다.”
순식간에 방안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특히 권악수는 당황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장웅철은 권악수가 던진 질문의 의미를 알고 있다.
즉 나에게도 피해가 오느냐는 뜻이다.
장웅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피해가 당연히 간다는 의미였다.
“장팀장!”
“검찰이 내가 주동자라고 보겠습니까? 보나마나 심부름꾼이라고 볼 겁니다.”
“이런 개같은!”
파악!
빈 소주병을 탁자에 내리쳤다.
소주병이 깨졌고 손잡이까지 나가면서 권악수 손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당신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무슨 그따위 말이 있어?”
“회장님!”
장웅철의 눈이 고요하게 가라 앉았다.
“더 이상은 하늘이 용서를 하지 않을 모양입니다. 내가 봐도 너무하긴 했죠.”
“무슨 개소리야?”
권악수의 눈이 커졌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저의 능력은 여기까지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를 원망하고 미워하십시오.”
장웅철이 무릎을 꿇더니 큰절을 했다.
지켜보던 이원성의 눈이 빛난다.
배신이 흔한 세상이다.
오히려 배신을 무척 당당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지천이다.
그런 자들의 배신의 변(辨)을 보면 한결 같다.
정의를 위해서, 고통스럽지만 대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그들이 말하는 정의와 대의는 자신의 욕망과 출세길 말고는 없다.
쿠데타를 일으킨 어느 장군의 부하는 직속상관이 받아야 할 모든 죄를 자신이 뒤집어 쓰고 교도소에 들어가는 걸 머뭇거리지 않았다.
오죽했면 쿠데타라는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유린한 군인인데도 대중이 칭찬을 했을까.
그만큼 저 살기 바쁜 세상이다.
어제의 친구도 필요할 때는 오늘의 적으로 돌리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버린 세상에서 장웅철의 주인을 향한 절은 이원성에게 많은 것을 시사했다.
사는 것이 무엇인가.
출세가 무엇이고 권력은 왜 필요한가.
삶보다 죽음이 길고 영원한 것인데 왜 인간은 짧디짧은 인생을 그토록 모질게 살아갈까.
사람들을 보면 꼭 천년을 살 것처럼 행동한다.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졌다.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또한 국회의원이라는 자리에 앉아 자신이 저지른 과거를 돌아보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아아아!’
이원성의 입에서 비명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건강하십시오.”
장웅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나갔다.
“이런 패죽일 놈이.”
권악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소주병 하나를 움켜쥐고 따라갔다.
“권회장 안돼요.”
이원성이 소리쳤지만 늦었다.
문을 여는 장웅철의 뒤통수에 소주병이 떨어졌다.
뻐억!
하는 소리가 들리며 소주병이 깨지면서 피가 튀었다.
장웅철은 휘청하며 오른손으로 벽을 집었다.
푸욱!
권악수는 그것으로도 모자란 듯 이번에는 깨진 소주병으로 목덜미를 찍었다.
송곳처럼 날이 선 깨진 병이 장웅철의 목덜미에 틀어 박혔다.
“후우욱!”
“왜 이러는 거요?”
이원성은 재빨리 권악수를 잡아 당겼다.
권악수의 얼굴과 와이셔츠는 장웅철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쿠쿵!
장웅철은 벽을 따라 미끄러지듯 방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봐. 종업원.”
이원성이 소리쳤다.
소란에 지배인이 달려왔다.
“119 불러요. 119”
피가 낭자한 방바닥을 보며 지배인이 기겁했다.
지배인은 재빨리 자신의 핸드폰으로 119를 불렀고 이성원은 쓰러진 장웅철을 살폈다.
주르륵!
피가 한 두 군데서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에서 흐르고 병에 찔린 목덜미에서 흘러나와 순식간에 방바닥을 벌겋게 적셔 버렸다.
“지혈제 있소? 지혈할 줄 아는 사람 있으면 환자 좀 봐주시오.”
이원성이 지배인을 향해 소리쳤다.
“김부장 두 번째 서랍에 가루로 된 지혈제 있어. 빨리 가져와.”
바깥쪽을 향해 소릴 질렀고 방안으로 들어온 지배인은 일단 손수건으로 머리를 눌렀다.
그러나 목덜미 피가 보이자 재빨리 탁자 위에 있는 물수건 하나를 더 가져다가 양손으로 눌렀다.
그때 직원이 가루로 된 지혈제를 가져왔다.
지배인은 상처 난 부위에 가루약을 뿌렸다.
“마른 수건 두 장 가져와요.”
밖을 향해 소리쳤고 여직원이 헐떡거리며 마른 수건 두 장을 내놓는다.
지배인은 지혈제를 가져온 직원과 같이 머리와 목덜미 상처를 힘껏 누르고 있었다.
권악수는 소주를 맥주잔에 따라 마셨다.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 두 눈에 핏기를 담고 씩씩 거렸다.
“너만 살겠다고.”
들고 있던 맥주잔을 던졌다.
그런데 던진 잔이 지배인과 직원을 피해 모로 누워있는 장웅철의 등을 때리며 또 깨진다.
“권회장 제발 진정해요. 이건 아니잖소.”
이원성이 말리면서 입을 열었다.
“술상 치우세요.”
그러자 직원 세 명이 들어와 재빨리 상위에 있는 그릇들을 밖으로 치워 버렸다.
“잠시 자리 좀 비킵시다. 구급대원들 오면 지난번 최 지검장 사건 재판되지 말란 법도 없는데, 더구나 지금 권회장은 사면을 받은 상태인데 뉴스에라도 이 일이 나오게 되면
도로아미타불입니다.”
이원성이 억지로 권악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때 앵앵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119가 대원들이 어군으로 들이 닥쳤다.
구급대원들은 장웅철의 상태를 보더니 재빨리 머리카락을 가위로 잘랐고 소독을 한 뒤 붕대를 덧댔다.
목 또한 소독약을 뿌리더니 붕대를 덮은 뒤 재빨리 이동침대에 옮겨 실었다.
“신고하신 분!”
구급대원 한 명이 신고자를 찾는다.
지배인이 피 묻은 손을 씻고 다가왔다.
“내가 했습니다.”
“어떤 사고죠?”
사건의 성격에 따라 경찰에 연락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묻는다.
“글쎄!”
노련한 지배인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손님들끼리 다툼이 일어나지만 119를 부른 건 지난 최승재 지검장이 불렀다가 중간에서 돌아갔을 때 빼면 오늘이 처음이다.
당시 상황이 벌어지고 재빨리 사장 마석춘에게 보고를 했다.
일반 손님도 아닌 국회의원과 대기업 총수가 있는 방에서 벌어진 폭력사태이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마석춘은 잠시 기다리는 듯 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이곳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더니 알았다면서 전화를 끊고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있는 그대로 말해요’
그런데 오늘도 조금전 사장 마석춘의 사인이 전달됐다.
이번에도 전과 똑같다는 사인이었다.
지배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권악수와 이원성이 잠시 눈을 피하기 위해 돌아간 뒤뜰 쪽을 보며 말했다.
“싸움입니다.”
“싸움!”
“소주병에 맞았죠.”
지배인은 있는 그대로 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