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8화: 살육의 시작(2)
모자를 함께 처넣고 싶은 것이다.
권총수는 살짝 웃는다.
“내가 너무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장웅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한 커피를 가지고 돌아왔다.
뜨거울 텐데도 식은 커피 마시듯 한 모금 삼킨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꼭 교도소여야만 하느냐는 뜻이다.
“조금 전 누구보다도 날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얘기 했잖습니까?”
장웅철의 눈이 좁혀졌다.
어쩌면 자신의 손으로 두 사람을 죽여 버릴 수도 있다는 의미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에 그친 것도 물러서고 또 물러선 통 큰 양보라는 의미이다.
“사흘 드리죠.”
권총수로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왔다.
장웅철은 걸어가는 권총수를 잡지 않고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커피숍은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고 장웅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창문으로 해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 오후 서너 시쯤 되어 보이지만 굳이 시간 확인을 위해 핸드폰을 들여다 보지는 않았다.
‘길이 없다’
권총수도 더 이상 인간적인 감정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상당히 참아줬고 봐준 건 사실이다.
다만 권악수에게 그런 점을 보고하지 않은 건 보나마나 무슨 개소리냐고 화를 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도움을 받고서도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는 권악수와 현미정이다.
‘길이 있다면’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길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비록 고통의 시간이 되겠지만 그 길이 어쩌면 가장 편하고 안전할지도 모른다.
법조인이므로 자신에게 주어질 죄목과 형량도 대충 짐작한다.
5년 전후는 받을 것이다.
‘5년’
짧지 않은 세월인데 전혀 두렵다거나 긴장되지 않는 건 왜일까.
‘내가 너무 힘들게 살아가고 있나보군’
힘들면 웬만한 일은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
교도소 생활이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안락하고 평화로운 휴가가 될지 모를 것 같았다.
정모석 차장검사가 경찰에 자수를 했다.
그걸 시작으로 세상은 뒤집어 지기 시작했다.
양파 껍질이 벗겨지듯 하루밤이 지나면 또 한 꺼풀씩 검찰이 지은 범죄가 드러나고 있었다.
현미정에 대한 체포영장을 막기 위한 그들이 짜고 친 역할에 시민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경찰은 다시 현미정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동안의 과정이 신문에 보도가 된 탓인지 검찰이 받아들였고 마침내 현미정이 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검찰청사 앞에 나타났다.
떼거리로 몰려 있던 기자들의 카메라가 터졌고 담당 변호사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경찰의 살인 교사혐의를 인정하십니까?”
“권총수씨를 왜 죽이려고 했죠?”
쏟아지는 질문에 묵묵부답이다.
청원경찰들의 보호까지 받으며 현미정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밤 11시가 조금 넘어 현미정의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는 속보가 인터넷 뉴스에 떴다.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경찰이 현직 차장검사를 제대로 수사할 수가 있겠냐며 여론은 불신의 시선을 보냈다.
아마 영장을 청구해도 검찰이 되돌려 보낼 것이라는 의견들이 많았다.
그러나 사건을 지휘하는 대검 강력2부에서 영장을 청구했다.
정모석은 실질심사에 참가하지 않았고 저녁 아홉 시도 되지 않아 구속영장이 떨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최승재였다.
수사망이 좁혀오고 있다.
모든 걸 정모석에게 덮어씌우고 자신은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수사의 칼끝이 무디지 않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듯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후배들이 단호하게 접근해오고 있었다.
결국 견디다 못해 여의도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평소에는 그토록 전화도 자주하던 사람들이 받지 않는다.
일부 의원들은 자신의 번호를 차단해 버렸다.
정치판의 생리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잔인성에서는 검찰 뺨친다.
‘만인평등회’
초반 검찰수사가 미진하자 만인평등회라는 시민단체에서 자신의 뇌물수수와 살인교사 혐의로 고소장을 제출한 것이다.
그렇게 되자 검찰에서도 미적거릴 수가 없었고 현미정이 구속된 이후 여론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었다.
봐주는 거냐?!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끌다 여론이 잠잠해지면 슬그머니 덮겠지하는 비판과 비난이 인터넷을 달궜다.
그러던 차에 사법연수원에 참석한 검찰총장이 법은 어떤 사람 앞에서도 주저하거나 나약해져서는 안된다는 인사말을 했다.
검찰총장의 발언을 놓고 해석이 분분했다.
제대로 수사를 하라는 뜻이다.
아니다 그냥 일상적으로 연수원 졸업생들에게 하는 말일 뿐이다. 검찰총장이 그런 정도의 얘기는 할 수 있는 것이지 그걸 확대해석하면 어떡하느냐는 내부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수사가
멈칫멈칫했다.
그런데 사흘 전부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칼 끝이 예리해졌다.
돌변한 수사팀의 움직임을 보아 빼도 박도 못할 어떤 증거를 찾았거나 아니면 누군가 자신의 범죄 혐의를 증명할 증거를 제보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검찰 고위층에서도 자신을 외면했을 수도 있었다.
지이잉!
“여보세요?”
자신을 도와줄 전화이길 간절히 바라는 목소리다.
“유철수 부장검사입니다.”
자신을 수사하는 강력2부 부장검사였다.
이름은 알고 있지만 그다지 교류가 있지는 않았고 자신은 S대 출신인데 반해 유철수는 지방대를 졸업했다.
“준비 좀 해주시죠?”
조사 받을 준비를 하라는 얘기다.
“그런가.”
“30분 정도 있다가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통화는 끝났다.
조용히 핸드폰을 내린 최승재는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난날이 흑백 필름처럼 스쳐 지났다.
꿈은 야무졌다.
그리고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마을에서 버스 타는 곳까지 걸어가는데 십리길이다.
도로에 나갔다고 하여 시내버스 다니듯 버스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두 시간에 한 번 다니는 버스다.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으나 꿈이 있었기에 전혀 힘들지 않았다.
검사가 되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세상의 모든 악을 청소하겠다는 다짐은 최소한 사법연수원 시절까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변해 있음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중독이 되어 되돌릴 수는 없었다.
검사라는 자리는 엄청난 권력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잡아 들이고 교도소에 보낼 수 있는 마법사와 같은 위치였다.
왜 검사들을 향해 영감님이라고 하는지 알게 됐고, 난다긴다하는 재벌 총수들도 검사 앞에서는 작아졌다.
정치인은 더욱 오므라들었다.
어느 날부터 자신의 주머니가 여기저기서 봐달라고 내미는 돈 봉투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차량 트렁크에 박스로 실렸다.
꿈을 이루고 나서인가 어려서 그토록 선망했던 검사라는 자리가 너무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가 있었고 그 첫 단계로 여의도에 입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관문을 앞에 두고 제동이 걸렸다.
후우!
담배연기가 꽉 닫힌 사무실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권총수’
이 모든 절망에는 바로 권총수란 사내가 있었다.
뿌드득!
이를 갈았다.
권총수를 없애지 않으면 자신의 꿈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당장 구속은 되지 않을 것이다.
조사를 하고 구속영장 청구까지 상당한 시간이 있다.
그 안에 반전의 카드를 만들어야 한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온 유철수 부장검사일 것이다.
드르르!
문이 열리고 예상대로 유철수 강력2부장과 바로 아래 천일석 검사가 들어섰다.
두 사람은 우두커니 서 있었고 최승재는 얼마남지 않은 담배를 힘껏 빨아 들였다.
부욱!
꽁초를 비벼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자신이 직접 앞장섰고 뒤를 두 사람이 따랐다.
데려오더니 팽개치듯 혼자 내버려 둔지가 20분이 지났다.
방치하는 이유를 아는데도 마음이 초조해 진다.
일반 피의자들은 의도적으로 조사 받기까지 상당시간을 혼자 기다리게 내버려 둔다.
긴장과 두려움을 이끌어내어 좀 더 편한 조사를 진행하기 위한 것이다.
심리전이다.
딸칵!
문이 열리고 유철수가 들어섰다.
취조실에 혼자 앉아 있던 최승재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치 볼 것 없네. 마음껏 묻고 또 묻게. 난 있는 그대로 대답할 테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거짓으로 대답하면 안됩니다.”
멈칫!
최승재는 눈을 좁혔다.
“실망시키시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지검장이라는 명예를 잘 보존하시려면 성실하게 인정하고 말해야 합니다. 권악수에게 돈 받은 것 있죠?”
최승재는 침을 삼켰다.
자신도 검사다.
그래서 질문 내용을 보면 이 사건에 어떤 각오로 매달리는지 알 수 있는데 유철수의 눈에서 불꽃이 튄다.
그건 적당히 넘어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의지였다.
“돈 받은 적 있으시죠?”
“없네.”
“없어요?”
“내가 왜 그 사람에게 돈을 받는단 말인가?”
피식!
유철수가 웃었다.
그건 누가봐도 어이가 없다는 실소였고 비아냥이기도 했다.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는 느낌이다.
최승재는 허리를 폈다.
이건 아니다.
유철수는 지금 자신을 일반인 다루듯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검사처럼 선후배 위계질서가 엄격한 곳도 없다.
민간인 옷을 입었을 뿐 군대나 마찬가지이다.
선배가 박으라면 박는다.
“받으셨죠?”
유철수 검사가 가까이 다가와 책상을 짚고 내려다 본다.
“받았잖아요. 골프가방에 가득.”
홱!
최승재가 노려본다.
“자네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것 아닌가?”
“자네?”
유철수 검사는 빙긋 웃는다.
“지금 취조하는 검사에게 자네라고 했습니까?”
재밌다는 듯 한참 웃더니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오픈했다.
이어 뭔가를 찾는 듯 계속 화면을 돌리고 내리기를 반복하더니 한곳에서 멈춘다.
“잘 보세요.”
핸드폰속 동영상을 볼 수 있도록 똑바로 놔주었다.
영상을 보던 최승재의 눈이 커진다.
장웅철이 자신의 차량 트렁크에 골프가방을 넣고 있기 때문이었다.
“골프채 대신 현금 십억이 들어있죠.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쥐고 뭔가 찾는 것 같더니 또 하나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번 영상은 얼굴이 모자이크된 정장의 사내였다.
“평소 존경하던 분이고 여러차례 도움도 주고 해서 귀띔을 해 드렸죠. 곧 우리회사에서 개발 중이던 자동차용 밧데리 ‘퀸’이 완성될 것이므로 가진 돈 있으면 주식에 좀 넣어 두라고
말이죠.”
“얼마 들어왔죠?”
“10억 입금됐더군요?”
“지금은 얼마됐습니까? 110억 됐죠?”
탁!
유철수 검사가 핸드폰을 가져가 동영상을 끈다.
“어떻습니까? 감상한 기분이.”
야유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평소 소통이 없는 검사라고 하지만 직급상 자신의 부하이다.
“모자이크를 했지만 누군지는 알 것입니다. 장 팀장한테 받은 십억이 주식회사 퍼펙트 주식 매입 자금으로 넘어갔고?”
“유 검사?”
뭔가 이상한 모양이다.
부하직원을 떠나 동료검사, 상관에게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는 없다.
공공연한 일이지만 검사의 비리는 적당한 선에서 넘어간다.
웬만해서는 덮거나 가장 형량이 낮은 수준의 범죄로 짜 맞춘다.
“진짜 이런 식으로 할 건가?”
“어떤 식으로 해드릴까요?”
“이 사람 진짜!”
“불편하십니까? 현미정 영장 방해 사건과 이번 뇌물 건까지 엮이면 십 년은 충분할 겁니다. 더 많은 증거가 있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정리하죠.”
그건 경고였다.
부들부들!
최승재의 얼굴 근육이 분노로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