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6화: 전쟁 기술자(1)
쭈욱 소리나게 커피를 마시고 묻는다.
“내가 어디까지 말했던가?”
“아라나 경위의 아내를 나쁜 놈이 차로 박아 버렸다고 했죠.”
“맞아. 현장에서 사망했지. 분노한 아라나 경위는 범인과의 전쟁을 선포했네. 그날 이후 아라나 경위는 길을 가다가도 조금만 나쁜 놈들을 보면 방아쇠를 당겨 버렸어.”
“경찰이라고 해도 함부로 죽이면 안 되잖아요?”
오민철이 눈을 크게 떴다.
“안되지 당연히, 그는 징계를 몇 차례 먹었고 그럴 때마다 범인에 대한 그의 분노는 더욱 깊어갔네. 그를 만나면 아마 적극적으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자네에게 전달할걸세.”
즉 아라나 경위 자신이 갖고 있는 코만도 조직에 대한 아주 작은 정보 하나라도 알려 줄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소개하여 만났다.
그런 아라나 경위가 지금 좀 보자고 전화를 걸어 온 것이다.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었다.
밤 10시가 넘었지만 아파트 앞은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포드 익스플로러 한 대가 다가오더니 잠시 멈췄다.
“크리스탈이라는 바가 있다는데.”
두 사람은 창밖의 간판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상가가 밀집 되어 있는 아파트 앞 도로를 지나 1킬로쯤 계속 갔을 때 사람들이 조금 한산해졌다.
“저기다!”
오민철이 한곳을 가리켰다.
작은 간판 하나가 조그맣게 보였다.
사람들이 다니는 아파트 앞에서 한 참 떨어져 있는 단층짜리 조그만 바(BAR)였는데 크리스탈이라는 이름이 입구 문에 낙서 갈기듯 쓰여 있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문을 밀고 들어갔다.
의자도 몇 개 되지 않은 조그만 바는 딱 한 명의 손님을 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 손님은 바에 걸터앉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고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권총수는 천천히 다가가 사내 옆에 앉았다.
이미 뒷모습에서 아라나 경위라는 걸 알아 차렸다.
“술을 많이 마셨군요.”
까샤샤로 불리는 술병이 한 개가 비었고 두 번째 병은 절반쯤 남아 있었다.
50도짜리 독한 브라질판 버번이다.
아라나의 얼굴은 무척 무거워 보였는데 잔을 비우더니 권총수 앞으로 내밀었다.
한 잔하라는 뜻인데 권총수는 거절하지 않았다.
“코만도의 공장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더군?”
탁!
아라나는 잔을 채워주고 술병을 놓는다.
권총수는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늘 아내가 죽은 날이지.”
멈칫!
권총수와 오민철은 깜짝 놀랐다.
자르델 경감을 통해 아라나의 아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내가 좋아하는 생선과 쥬스를 시장 바구니에 담아 주차장으로 걸어가는데 시동을 걸어 놓고 잠복하고 있던 놈이 그대로 쳐 버린 거지.”
우드득!
이를 가는 소리에 오민철은 깜짝 놀랐다.
이 가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마치 지축이 울린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만큼 크다.
“아내는 무려 50미터를 날아가 떨어졌지. 그리고 일어나지 못했어. 내가 좋아하던 생선과 쥬스가 길바닥에 나뒹굴었고 아무도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어.”
브라질에서는 구급차를 함부로 부르는 것도 자칫 갱단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아내의 묘비 앞에서 반드시 놈을 잡아 죽이겠다고 맹세했지만 실패했다.
어디로 숨었는지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쫓았으나 여전히 흔적을 잡지 못하고 이제 정년을 앞에 두고 있다.
퇴직 전에 잡아야 한다.
“그놈이 누군지 아십니까?”
권총수가 돌아보았다.
“펠리팡이란 놈인데.”
펠리팡이라는 말에 오민철이 재빨리 주머니를 뒤지더니 접혀진 종이를 꺼내 펼쳤다.
거기에는 더글라스를 통해 얻은 코만도 조직도가 그려져 있고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있었다.
“있어?”
권총수가 물었다.
한참을 훑던 오민철이 눈을 빛냈다.
“펠리팡! 여깄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라나가 종이를 낚아챘다.
하마터면 찢어질 뻔 했는데 오민철의 종이를 한참 보더니 펠리팡이란 이름을 노려본다.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
“여긴 B2는 무슨 뜻인가?”
일단 자신이 찾고 있는 인물로 판단한 듯 그 밑에 쓰인 글자에 대해 질문했다.
“영문B는 아름답다는 뷰티풀(beautiful)의 앞글자를 따 온 것이죠.”
오민철이 말했다.
“허면 2는?”
“넘버 2라는 뜻입니다. 현재 코만도 조직의 실세중 한 명인 둥가라는 인물이 규모가 큰 클럽을 운영하고 있더군요. 아름다운 동산이라는 이름.”
“그리고 또 한 명의 펠리팡이 있는데 그놈은 토레스란 자의 부하였습니다.”
아라나 경위의 눈이 커졌다.
“토레스?”
“매춘조직을 총괄하는 친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놈은 시의원인데 매춘을?”
리우의 시의원이라는 말에 권총수도 깜짝 놀랐다.
이름은 적혀있어 알고 있으나 얼굴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권총수와 오민철은 알지 못한다.
그때 아라나 경위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프랑쿠, 리우 시의원 사진 좀 보내주게. 지금 당장. 고맙네.”
전화를 끊은 아라나는 후배 경찰이라고 했다.
시의원중 몇이 갱조직과 관계하고 있다는 소문은 있지만 아직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딸칵!
아라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내가 왜 캡틴을 부른지 아는가?”
뿌연 담배연기가 천장을 타고 옆으로 퍼져 나간다.
“둥가라고 들어봤을걸세. 프레드의 친위대장 말이야.”
“알죠.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지금 혈안이 되어 캡틴을 찾고 있는데 내가 좋은 정보 하나 제공해줄까 하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물론 더글라스에서부터 세르지뉴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의 입에서 둥가라는 이름이 한 번씩은 나왔었다.
그건 그만큼 잔인하고 악명이 높다는 뜻이다.
권총수는 눈을 빛냈다.
“조금전 내 정보원에 의하면 지금 코만도에서는 사막의 흑새를 죽이라는 프레드의 명령이 떨어졌다고 하더군. 이미 캡틴의 얼굴 사진까지 입수해 돌린 모양이야.”
살인 명령은 신경쓸 것 없다.
하지만 사진을 돌렸다는 건 신경을 써야한다.
필시 막대한 상금까지 걸었을 것이다.
즉 상금을 노리고 달려들 마구잡이 총잡이들이야 말로 제대로 된 히트맨 보다 훨씬 무섭다.
더욱 이곳이 브라질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예상못한 변수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천진난만한 미소로 다가와 방아쇠를 당겨 버리는 어린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의 환한 얼굴은 내공에도 잘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잡혀도 적의나 살기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방심을 한다.
“둥가라는 놈은 지금 어딨소? 술집 한다면서?”
“아르꾸라에 있지. 어딘지 아나?”
“조금.”
길가 노천 카페들이 먹자골목처럼 몰려 있는 곳으로 하루종일 북적이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거리다.
단순히 차만 파는 곳이 아닌 음식과 술까지 모두 길가에서 먹는 것이 이곳의 특징이다.
정확한 이름은 아르꾸 지 떼찌스(Arco do Teles)였다.
“그곳에 가면 자르딘 에르모소(jardín hermoso:아름다운 동산)라는 클럽이 있을걸세. 그곳이 놈의 아지트라네.”
“아지트라면 그 구역 보스라도 된단 말입니까?”
오민철이 묻는다.
“주인, 사장이지.”
사장이라는 말에 권총수의 눈이 빛난다.
“사유재산일세. 고위 간부들은 자신의 사업체를 거느리도록 허락하고 있는 곳이 코만도일세.”
코만도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어느정도 조직을 위해 충성을 하며 그때부터는 작은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것이다.
가게를 운영하고 코만도 조직을 등에 업고 있으니 무서울 것이 없다.
어쨌든 사냥감의 둥지를 알아냈다는 건 언제든 잡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때 아라나의 핸드폰이 진동을 하더니 멈췄고 핸드폰을 바라본다.
이어 재빨리 메시지를 꺼내 살피는 아라나가 권총수 앞에 불쑥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이자로군? 네가 말하는 토레스.”
권총수는 사진을 보고 있었다.
자신도 아직 토레스는 알지 못한다.
그때 재빨리 오민철이 캐인에게 문자를 보내 역시 토레스의 사진을 구해 시의원과 동일인이지 보내달라고 했다.
케인에게 사진이 오는대로 토레스가 동일인물로 밝혀지면 아라나의 아내를 죽인 범인은 두 곳에 있다.
한 명은 둥가가 운영하는 클럽이고 다른 한 명은 토레스 부하다.
거주지를 정확히 특정했으므로 제거하는데 제일 중요한 고비를 넘겼다.
현직 경찰이기 때문에 접근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토록 집요한 추적에도 걸리지 않는 걸 보면 아마 성형수술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민철의 말에 아라나도 동의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사창가와 클럽 에르모스를 뒤지면 진짜든 가짜든 펠리팡은 만나 보겠군요.”
부드득!
다시 한 번 아라나는 울림 크게 이를 갈았다.
“이놈, 거의 왔구나. 이제 곧 내가 찾아가마.”
쭈욱!
아라나는 잔을 단번에 비웠다.
오랜만에 운기조식에 빠졌다.
피곤한 몸과 혼탁하던 정신이 일순간에 청정(淸靜)에 빠진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지고(沒我), 세상에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空虛) 무념무상이다.
스으으!
몸이 떠오른다.
반노환동에 오르면 나타나는 신체 징후다.
‘가볍다’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그 생각뿐이다.
몸이 너무 가볍고 마음이 고요하다.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라고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오로지 가슴 가득 설레이는 야릇한 기운뿐인데,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우화등선이 시작되기 전의 징조 중 한 가지가 때가되면 온 몸이 깃털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삶에 대한 어떤 욕심이나 불평도 없고 완벽한 고요(靜)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 약간의 표정이 나타난다면 지금 같은 잔잔한 설레임이랄까.
입가에 자비스런 미소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요?’
얼마 전 오랜만에 나타난 사부 천금신승에게 물었다.
‘세상이 평화롭다. 까닭 없는 기쁨이 넘치지. 미움도 욕망도 시샘도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내 자신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또?’
‘허허허, 뭘 그렇게 알려고 하느냐. 때가 되면 너 스스로가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감정이 일어나기 시작한다면 곧 등선의 초입에 이르렀다는 걸 알 수 있다’
권총수는 조용히 눈을 떴다.
호텔방이다.
갑자기 눈을 뜬 건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살기’
살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갑자기 생겨 난 것이 아니라 멀리서 점차 다가오는 것을 보면 자신을 노리는 누군가가 지금 호텔을 향해 접근하고 있는 것이었다.
‘형!’
옆방에 투숙하고 있는 오민철을 전음으로 불렀다.
‘잠깐 건너와. 어서.’
그리고 곧장 객실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오민철이 들어왔는데 지금 막 일어난 듯 부스스한 얼굴이다.
“왜 그러는데?”
“준비해. 놈들이 오고 있는 것 같아.”
“어떻게 우리가 이곳에 있는지 알았지?”
오민철이 이마를 찡그렸다.
“아무튼 준비해.”
“알았어!”
오민철이 돌아가고 권총수는 서랍에 넣어둔 권총을 꺼냈다.
권총을 옆구리에 쑤셔 넣은 뒤 샤워실로 들어갔다.
욕조안에 검정색으로 된 직사각형의 공구박스가 보였는데 손잡이를 잡고 밖으로 꺼냈다.
철컥!
잠금장치를 풀고 뚜껑을 열자 안에 다섯 개의 수류탄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