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8화: 어둠의 자식들(2)
환한 얼굴로 웃었는데 그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다.
“괜찮습니다. 천천히 보죠. 지금 작전 상황은 어떻습니까?”
곤두섰던 캐인의 눈이 약간 가라 앉았으나 여전히 망설인다.
좋은 내용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FBI요원 특유의 편집병(의심증도 그중 하나)을 보인다.
권총수와 오민철을 아직까지는 완전한 동료이며 믿을 수 있는 아군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의 결심이 서지 않았다는 뜻이다.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나 여러 가지 정보는 얼마든지 받아 들여도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배신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권총수는 물론 오민철도 불쾌한 얼굴은 없다.
캐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얼굴이었다.
삐이익!
그때 갑자기 안쪽 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앉아있던 캐인이 벌떡 일어나더니 안방으로 들어갔고 두 사람도 따라갔다.
벽에 걸린 커다란 화면에 빨간 화살표가 깜빡 거린다.
파팟!
화살표를 보고 있던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단순하게 깜빡이지 않고 빨랐다 약간 느려지는 등 속도의 차이가 있었다.
0.5초 정도의 패턴을 보이다 어쩔 땐 2초에서 3초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나서 깜빡인다.
불현듯 권총수 눈앞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다.
‘모스 부호 같군’
한참동안 신호를 바라보던 캐인이 소스라쳤다.
“안돼!”
비명처럼 외쳤다.
“도움을 요청하는 긴급 신호입니다.”
“누가 뭘 도와달라는 거죠?”
“일단 가면서 설명해 드리죠.”
그건 곧 자신을 따라 좀 같이 가자는 뜻이었다.
“Y로 불리는 우리 요원 한 명이 잠입해 있죠.”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이다.
“그런데 지금 정체가 들통 난 것 같다면서 급히 도와달라는 비상 신호를 보낸 것입니다.”
캐인의 얼굴이 굳었다.
또 한 명의 부하를 잃을까 두려운 모양이다.
검정색 포드 익스플로러 한 대가 신호를 무시하고 파벨라 지역으로 들어섰다.
외부 사람들에게는 악명 높은 공포의 지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곳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그냥 자신들의 동네일뿐이다.
아이들이 공을 차고 뛰어 놀고, 박스나 휴지를 주워 모으는 사람들, 우리나라처럼 작은 트럭에 식료품을 싣고 다니며 파는 차량도 눈에 띈다.
“그냥 우리나라 산동네잖아.”
오민철이 너무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 모습에 약간 놀라며 중얼 거렸다.
“저건 뭐야? 경찰 아닙니까?”
조그만 사거리에 경찰차와 무장 경찰 두 명이 M4를 들고 서 있다.
“경찰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파견소도 있고 다른 지역과 전혀 다르지 않죠. 단지 차이라면 그냥 저러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저러고 있다뇨? 마네킹도 아닌데.”
“수배중인 용의자가 나타나거나 하면 붙잡기 위해 추격하고 총을 쏩니다. 문제는 형식적이라는 것이죠. 열심히 뒤쫓다 실패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적당히 따라가고, 총구 또한 용의자를 절대 맞히지 않는 방향으로 겨누죠.”
히죽!
오민철이 미소를 지었는데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만약 멋모르고 경찰의 총에 조직원이 사망했다 하면 여기서 근무 못하죠. 물론 가족 또한 안전하지 않고.”
“별천지로군.”
“맞습니다. 이 지역만큼은 브라질 대통령도 어찌해보지 못합니다. 여기에서는 마약 카르텔이 정부이고 공권력이며 사법부죠. 그들이 일거리도 주고 사람도 채용합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그들을 나쁜 사람들로 보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린 어른이 되면 마약카르텔 조직원이 되겠다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캐인의 말에 권총수는 한숨을 쉬었다.
인간처럼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동물도 드물다.
여기에서 자라났으니 마약조직원으로 흘러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끼익!
가파른 골목길 입구에서 멈췄다.
운전석에 앉은 캐인이 모퉁이에 서 있는 전봇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차를 출발 시켰다.
캐인의 차는 자주 멈췄다가 이동하기를 반복했다.
권총수는 일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민철은 더 이상 궁금해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어 말하려는 데 귓가로 권총수의 전음이 파고 들었다.
‘내버려 둬’
오민철이 돌아보았다.
자신은 이유를 모르겠는데 권총수는 아는 얼굴이었다.
권총수는 전음으로 설명했다.
‘Y를 따라가고 있어.’
“어떻게 알아?”
권총수 귀에 입을 대고 물었다.
‘Y라는 요원이 어떤 표식을 남기고 있어. 그 표식을 따라 가는 거야.’
끽!
처음에는 브레이크도 천천히 여유있게 밟았다.
하지만 갈수록 급정거다.
또한 출발도 거칠다.
그건 Y라는 요원이 점점 위기에 빠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우웅!
멈췄던 포드 익스플로러는 다시 속도를 낸다.
골목 도로는 너덜거렸다.
포장을 했으나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은 듯 자갈길을 달리는 것처럼 덜커덩거렸다.
골목마다 가파른 경사길이고 어지간한 곳은 계단으로 이어졌는데 권총수는 한 가지 특징을 발견했다.
오토바이 차량들이 다닐 수 없는 계단이나 아주 비좁은 골목으로 도망치는 것이 쫓기는 사냥감에게는 긍정적인 길이다.
그런데 계속 캐인이 살피는 표식은 골목이 험하긴 해도 차량 한 대는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곳에 남겼다.
“무슨 의미일까?”
오민철도 뭔가 눈치를 챈 듯 나직하게 물었다.
권총수는 여전히 전음으로 말했다.
‘캐인을 의식한 도주로야. 골목이나 계단, 또는 지붕위를 이용해 도망친다면 조금은 안전할 줄 몰라도 캐인과는 연락이 두절되겠지. 캐인과의 연락 두절은 더 이상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고.’
“연락 두절 보다는 위험하지만 캐인이 쉽게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이군?”
‘형은 캐인과 계속 움직여!’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유리가 내려가고 권총수가 차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캐인은 권총수가 사라진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의 모든 신경은 전방에 쏠려 있었다.
포드 익스플로러에서 내린 권총수는 조용한 골목을 훑어보았다.
바람 소리도 없다.
권총수는 내공을 끌어 올린다.
천리지청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소리가 들린다.
그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리였는데 크게 주의할 필요는 없는 것들이다.
팟!
그중 한 가지 분명한 소리를 잡아냈다.
파앗!
순식간에 골목에서 사라졌는데 불영보였다.
나타났다 싶은 순간 20여장씩 이동해 버리는 불영보는 가히 절정에 이르렀고 공간과 공간을 점령하며 이동하고 있었다.
“11시 방향!”
스스스!
골목에 나이든 노인 몇이 나와 우두커니 서 있다.
하지만 그들은 권총수를 봤지만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 의구심이나 놀라지 않았다.
자신들이 늙었기 때문에 세상이 이상하게 보인다고 믿는다.
탕!
타탕!
총소리가 들렸다.
‘베레타92’
권총이라고 모든 소리가 동일하지 않다.
같은 모델도 미세하게나마 소리가 차이가 난다.
누구도 그런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지만 권총수는 충분히 알 수 있다.
‘300미터’
스으으으!
가파른 골목을 한 줄기 바람처럼 올라갔고 순식간에 300미터 거리를 이동했다.
골목 끝에 이르자 좀 더 넓은 골목이 나타났고 간간히 승용차들이 길가에 주차되어 있었다.
드르르륵!
갑자기 들려오는 자동소총 소리에 놀라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40여 미터 정도의 거리에 흰색 승용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는데 자동소총에 차가 박살나고 있었다.
유리가 깨지고 차량은 벌집처럼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탕탕!
또한 권총소리까지 뒤섞였는데 권총수는 차량 뒤에 도망자가 숨어 있음을 알았다.
타앙!
간헐적으로 도망자 쪽에서도 총소리가 났는데 위협사격이다.
저항하지 않는 사냥감에 대한 사냥꾼의 태도는 잔인할 정도로 일방적이다.
하지만 절대적인 위기 상황이지만 반격을 하며 발악하면 사냥꾼은 함부로 다가서지 못 한다.
거의 이긴 게임이라고 해도 무척 조심스러워 지는데 사람이든 맹수든 그냥 죽지는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셋!’
좁은 골목에 세 명이 숨어 골목 맞은편에 주차되어 있는 승용차를 향해 인정사정없이 갈긴다.
스으으!
권총수의 신형이 떠올랐고 순식간에 서너 개의 집 지붕을 날아가 사내들이 숨어 있는 골목에 내려섰다.
두 명은 오른쪽 벽으로 붙었고 다른 한 명은 길가 가게에서 공격을 퍼부었는데 AK를 소지하고 있다.
푸슉!
슉!
권총수의 글록 19가 속삭였다.
골목 담벼락을 엄폐물 삼아 승용차를 공격하던 두 사내는 등 뒤에서 날아온 총알을 피하지 못했다.
권총수는 골목 끝 담벼락에 붙었다.
AK를 든 사내는 왼쪽에 있는 작은 철공소에 숨어 승용차를 향해 그야말로 난사를 하고 있었다.
스윽!
권총수는 번개처럼 철공소 안으로 들어갔고 몸을 숨기고 방아쇠를 당기는 사내를 발견하고 또다시 발포했다.
푸슉!
“컥!”
하는 소리를 내며 사내는 나동그라졌는데 머리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권총수는 죽은 사내를 잠시 바라보며 천리지청술을 전개했다.
또 다른 공격자들이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상당히 먼 곳에서 살기를 가득 실은 차량 한 대가 오고 있다’
권총수는 재빨리 오민철에게 전음을 보냈다.
‘여기 4-09번지 로고 쓰인 카일라 철공소야. 빨리 와. 다친 것으로 보이는데.’
권총수의 눈은 부서진 승용차를 보고 있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지이잉!
고개를 돌렸는데 자신의 총에 맞아 죽은 사내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필시 지금 살기를 가득 품고 다가오고 사내들로부터 걸려온 전화일 것이다.
권총수는 핸드폰을 꺼내 액정에 찍힌 전화번호를 자신의 핸드폰에 옮겨 저장했다.
권총수는 벨 소리가 끝나자 재빨리 발신 번호로 문자를 적었다.
‘카일라 철공소 앞에 있음, 지금 통화할 여유 없음’
보내기 버튼은 누른다.
문자를 보냈으니 필시 모두 이곳으로 몰려 들것이다.
부우웅!
그때 저 아래서 한 대의 차량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캐인의 포드 익스플로러였다.
캐인은 곧장 박살난 승용차 옆에 차를 세우고 뛰어 내렸다.
“버트, 버트!”
차량과 담벼락 사이에 백인 사내가 웅크리고 있었는데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오민철과 캐인이 곧장 버트라는 사내를 차로 옮겨 싣고 골목을 달리기 시작했다.
권총수는 포드 익스플로러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탄창을 꺼내 총알을 살폈다.
푸욱!
총알을 누르는데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열한 발’
열다섯 발 탄창에 열한 발 남았다면 지금 몰려오는 차량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아직 몇 명인지는 정확한 파악이 어렵지만 최소한 3명에서 4명이다.
‘200미터’
살기는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권총수는 다시 잠영술을 펼쳤다.
권총수의 모습이 사라져 버리고 잠시 후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검정색 승용차가 철공소 앞에 멈추더니 네 명의 사내가 내렸다.
모두가 AK를 들고 있었는데 철공소 입구에 죽어 있는 사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모디야.”
뺨에 코브라를 문신해 넣은 약간 마른 사내가 천천히 다가왔다.
잠시 내려다보더니 쭈그리고 앉는다.
이리저리 살피더니 뒷머리를 보며 중얼 거렸다.
“뒤에서!”
철공소는 넓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