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5화: 콩쿠르호(1)
실험 자료까지 함께 보냈으니 지나치게 레이더나 위성사진 등 기계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갑자기 코만도 조직의 마약 밀반입양이 줄어든 이유는 운송 방법을 바꿨기 때문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크리스는 놀라는 눈으로 권총수를 바라본다.
사람 한 명 더 추가됐을 뿐인데 판세가 완전히 뒤바뀐다.
권총수가 아니었다면 어느 누구도 지금과 같은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언젠가는 들통나겠지만 상당기간 엄청난 양의 코카인과 아편을 이용해 만든 헤로인까지 방대한 양이 들어왔다면 미국은 순식간에 대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어느 경제학자는 미국이 가진 위험요소를 두 가지로 명시했다.
첫째는 인종차별에 의해 미국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마약에 의한 사회불안이다.
여전히 인종차별은 존재하고 그로 인해 크고 작은 사고들이 끊이지 않는다.
인종차별은 언제 어떤식으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라는 것에 이견은 없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건 마약이다.
무기가 허용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끔찍한 사태를 피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더욱 강력한 방법으로 마약을 단속하지만 바깥에서 들어오는 수법 또한 발달한 단속만큼 성장해 버렸다.
실험은 실험일 뿐이라며 여전히 설마하는 사람들이 FBI는 물론 DEA까지 상당했다.
그렇기에 현장을 잡아야 한다. 직접 보면 사람들의 마음이 달라질 것이다.
권총수와 오민철은 아침 일찍 차를 타고 호텔을 떠났다.
그리고 두 시간 후 작은 비행장에 도착했는데 국방색 비행복을 입은 한 명의 직원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FBI 요원들을 대상으로 비행기술을 가르치는 항공 훈련교관이다.
이곳에서 사용되는 경비행기는 이른바 세스나 182기로 항속거리도 1700여 킬로에 달해 충분히 공해상을 여유 있게 돌고 올 수 있었다.
“미첼입니다.”
권총수와 오민철은 교관 사내와 악수를 나눴다.
“저 비행기 입니까?”
활주로 입구에 있는 비행기를 가리켰다.
“예, 가시죠.”
두 사람은 미첼을 따라 세스나 182기에 탑승했다.
비행기에는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쌍안경을 포함한 레이다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곧바로 조종석에 앉은 미첼은 시동을 걸고 활주로를 달리더니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비행기는 멀리 바다 끝으로 사라졌다.
첫 비행에서는 의심스러운 선박을 찾아내진 못했다.
권총수 뿐만 아니라 해안 경비대와 마약단속국도 해상을 통한 마약 운송을 막기 위한 대대적인 작전에 들어가 있었다.
‘작전 명 블루 텐트 십(Blue tent ship)’
모든 경계 근무자들과 단속요원들은 파란 천막을 갖추거나 씌운 배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경험이 없는 새로운 단속이고 조사였기에 썩 눈에 띄는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조사하는 방식이 눈에 아직 익지 않아 발견하고서도 그냥 넘겼을지도 모른다.
여러 어선으로 위장하여 해상을 관찰하고 감시했고 하늘에서는 권총수와 오민철이 탄 비행기 외에도 다른 항공기를 이용한 저고도 수색이 밤낮 가리지 않고 이뤄졌다.
해상정찰을 한참 진행중일 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권총수는 핸드폰을 보았는데 서울의 채명천 관리이사였다.
“이사님!”
“이쪽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면서 채명천은 지금 윤칠수 살인사건에 대한 소식을 상세히 전해주었다.
권총수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전혀 예상 못한 검찰의 역습이다.
권총수는 몇가지 질문을 했고 채명천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때 쌍안경으로 바다 위를 살피고 있던 오민철이 뭘 발견한 모양이었다.
“저건 뭐지?”
권총수의 눈이 자연스레 돌아갔다.
해수면과 비행기까지는 약 300미터 정도 높이다.
“이사님, 내가 전화 하겠습니다.”
재빨리 전화를 끊은 권총수는 오민철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았다.
“1시 방향!”
권총수의 고개가 돌아가고 두 눈에서 강렬한 신광이 쏟아진다.
파팟!
권총수는 더욱 내공을 끌어 올렸다.
한참을 바라보던 권총수가 조종사에게 말했다.
“그냥 지나가세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종사는 알았다면서 그대로 계속 비행을 했고 배를 스쳐지나 3킬로 정도 날아갔을 때 권총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탁!
휴대하고 있던 글록 19를 다시 한 번 살피고 오민철에게 말했다.
“문 좀 열어.”
“여기서?”
권총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종사 미첼의 눈이 커졌다.
300미터 상공에서 뛰어내리겠다는 것이다.
낙하산도 없다.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 있는 장비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휴대하고 있지 않았다.
덜컹!
비행기 문이 20여센티 정도의 폭으로 열렸다.
스윽!
누가 말리고 조심하라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권총수의 몸이 연기처럼 문틈 사이로 빠져나가버렸다.
“오 마이갓!”
미첼이 기절할 듯 소스라쳤다.
비행기가 좌우로 요동을 했다.
놀라면서 순간적으로 스위치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타탁!
재빨리 스위치 두 개를 올리자 비행기는 다시 안정을 찾았으며 오민철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권총수는 천천히 허공을 내려가고 있었다.
능공허도(凌空虛渡).
계단을 밟는 듯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가는데 매우 부드러웠다.
이윽고 수면에 닿은 권총수는 그대로 차고 올랐다.
해조약파(海鳥躍波), 물새가 파도를 차고 날아 오른것에서 만들어진 신법이다.
보통 신법은 반드시 디딤체가 있어야 한다.
즉 딱딱한 뭔가를 발로 차면서 날아 오르는 것이다.
어검비행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 날아가면 끌어 올린 내공이 소멸됨으로 다시 내려섰다가 재차 뛰어 오르는 것이다.
문제는 내공의 수위가 높을수록 약간의 디딤돌만 있어도 몸이 날아가는데 대표적인 것이 초상비였다.
풀끝을 밟고 날아가는 것이고, 그보다 한 단계 높은 것이 지금 보이는 해조약파였다.
파도의 강약과는 상관 없다.
바다는 어차피 물결이 있기 마련이고 약간 올라오는 그 부분을 발로 짚고 다시 허공을 날아가는 것이다.
오늘따라 바다는 바람도 없고 놀라울 만큼 잔잔했다.
파도라기 보다는 묵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권총수는 그런 흔들림에도 놓치지 않고 차고 오르며 날아갔다.
팟!
파팟!
수면을 스치듯 밟고 나는데 한 번에 20여장씩 소리없이 날아가 버렸다.
바다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권총수는 비행기에서 배를 발견했던 방향으로 날아갔다.
꿈틀!
일 분 정도 날아가던 권총수의 눈썹이 움직인다.
수평선 저 멀리 작은 물체 하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스르르르!
갑자기 권총수의 몸이 사라져 버렸다.
신법을 잠영술로 바꾼 것이다.
바닷물과 구별이 되지 않는 투명한 덩어리 하나가 바다 위를 물결처럼 흘러갔다.
사아아!
분명 움직이고 있지만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첩보 위성이나 무인 항공기에도 찍히지 않는다.
‘산타마리아호’
바닷물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배는 50여톤 정도 되어 보였는데 잠영술속의 권총수는 뱃전으로 어렵지 않게 올라섰다.
갑판은 조용했다. 권총수는 그물을 끌어 올릴 때 사용하는 양망기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군’
선수에서 선미까지 배는 푸른 천막에 덮여 있었다.
배 앞뒤에 커다란 기둥을 설치하여 천막을 씌운 것이다.
‘저것이군’
불영보를 펼쳐 선미로 갔다.
거기에는 푸른 천막을 두껍게 감고 있는 커다란 도르레 하나가 설치되어 있었다.
여분의 천막이 많은 건 낮에 뜨거운 태양에 의해 늘어지고 소금기 젖은 파도에 닿다보면 천막이 늘어지고 찢어질 것이다.
그럴 때를 대비한 충분한 양의 천막을 준비한 것으로 보였다.
배의 측면까지 완전히 파랑색으로 도색을 했기 때문에 더욱더 레이더나 무인 항공기에 관측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
덜컹!
기관실 문 열리는 소리에 재빨리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두 명의 사내가 나타났는데 점퍼 차림이었고 각자 머리에 사냥 모자를 쓰고 있었다.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더니 천막 한쪽에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하늘을 살핀다.
“요즘 따라 왜 이렇게 해상 감시비행기가 자주 나타나는 거야.”
평소보다 잦은 항공기 출현이 불만스러운 듯 사내들은 인상을 썼다.
“그래봤자 제까짓 놈들이 뭘 찾는다고.”
사내들은 재밌다는 듯 킬킬거리며 웃었다.
덜컹!
그때 다시 문이 열리고 대머리에 덩치 좋은 사내가 나타났는데 가죽 점퍼 차림이다.
“아직 멀었나?”
검정색 사냥 모자를 쓴 루시우가 말했다.
“한 시간 정도 달리면 될 것 같습니다.”
히스패닉계 미국인인 세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겹군.”
정확히 한 달 하고 이틀째 항해를 하고 있다.
물론 거의 종착지를 앞두고 있지만 이번 항해는 유난히 피곤했다.
아마 갑자기 늘어난 해안 경비대 단속 항공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찜찜하지 않아?”
이번 항해의 리더인 세자르가 눈을 좁히며 묻는다.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입니다. 뭔가 냄새를 맡은 것 같기도 하고.”
루시우의 불안한 대답에, 손떼가 가득 묻은 흰색의 사냥 모자를 쓴 쿠카쿠가 자신있게 말했다.
“난 그렇게 안봐. 우리가 이렇게 단순 무식한 방법으로 감시망을 피할 것이라고 누가 꿈에라도 생각하겠어?”
“흐흐, 그렇겠지?”
“당분간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고 봐. 물론 언젠가는 드러나겠지만 아직은 안전할거라고, 흐흐흐!”
만족스러운 듯 웃는다.
어둠이 바다를 덮어가는 시간이었다.
어선 콩쿠르호는 조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네 명의 선원이 바닷속에서 그물을 끌어 올리고 있었는데 아귀들이 드문드문 걸려 올라오고 있었다.
그물을 걷어 올린 선원들은 아귀들을 나무로 된 상자에 담아 어창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물을 쳐 놓은 곳을 향해 이동했다.
1킬로 정도 항해하다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는데 맞은편에서 산타마리아호가 다가오고 있었다.
촤아아아!
그대로 지나갈 것 같았던 산타마리아호는 파도를 일으키며 속도를 늦춘다. 배가 속도를 줄이면서 몰고온 거친 파도가 콩쿠르호를 때린다.
이윽고 두 척의 배는 몸을 비비듯 나란히 섰다.
촤라라락!
스위치를 누르자 산타마리아호를 덮었던 푸른 천막이 걷어졌다.
태양은 멀리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고 어둠이 살짝살짝 두 배를 덮기 시작했다.
“서둘러!”
세자르가 재촉했다.
루시우가 어창 속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20킬로짜리 커피 포대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세자르와 쿠카쿠는 루시우가 꺼낸 커피 포대를 콩쿠르호 선원들에게 넘겼다.
산타마리아호에서는 쉬지 않고 커피 포대가 나왔고 사람의 손에서 사람의 손으로 넘겨지면서 콩쿠르호 어창속으로 사라졌다.
작업은 불과 30분 만에 끝났다.
“수고들 하쇼!”
세자르가 콩쿠르호 선장 마일스에게 검지와 중지를 세워 가볍게 거수 경례를 했다.
“또 봅시다!”
부우웅!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콩쿠르호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바다를 한 바퀴 돌 듯 유턴을 하여 서쪽으로 사라졌고 산타마리아호 역시 반대쪽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스르르!
산타마리아호에서 투명한 물방울 같은 그림자 한 덩어리가 콩쿠르호에 올랐다.
그러나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