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3화: 역습(2)
때로는 엉성한 것이 똑똑한 것을 누를 때가 있다.
“언젠가 무슨 영화에서 한 번 본 것 같은 기억도 나고.”
“소형 선박이 파란 천막을 덮어 쓰고 항공 감시를 피한다?”
여전히 오민철은 미심쩍은 표정이다.
“씰이 어떤 부대야. 그야말로 그들이 한 번씩 작전을 벌이면 세계가 요동칠 만큼 굵직한 뉴스가 생산되잖아. 그런 팀들이 재미로 그런 수법을 쓰겠어?”
오민철이 이마를 찡그렸다.
“극과 극은 통한다 뭐 그런 현상인가?”
“해안으로 접근할 때는 레이더나 또 다른 감시장치에 걸릴 가능성이 있지만 최소한 육상 감시나 항공 감시가 필요한 공해상에서는 쉽지 않을 수도 있지.”
오민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완전히 수용한다거나 동의하기에는 여러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는 얼굴이었다.
예상대로 얘기를 전해들은 FBI측 역시 놀랐는데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크리스는 그래도 이쪽 체면을 생각하여 적당히 눈치를 봤지만 나머지 간부들은 말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러지 말고 한 번 해보죠.”
권총수가 제안했다.
“직접 우리가 배를 바다에 띄워 보는 거죠. 물론 군과 CIA에게는 절대 말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몰라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으니까.”
“좋습니다. 당장 해보죠.”
크리스는 주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움직이는 것이 권총수를 이 어려운 상황에서 꺼내주는 일로 여긴 듯 했다.
크리스는 인터폰을 누르고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렸다.
“50톤짜리 선박 한 척 준비하게. 그리고 내 말 잘 들어.”
직원에게 또한 배에 필요한 여러 장비들을 설치할 것을 지시했다.
포토맥 강을 따라 이어지는 대서양으로 한 척의 배가 출항했다.
배는 오십 톤짜리 어선이었는데 선상에 보이는 사람들 모두가 FBI요원들이었다.
배를 통제하고 조종하는 선장 역할도 역시 FBI소속인 선박 전문가가 맡았다.
권총수는 배의 선미에 있었다.
그곳에는 양망기 같은 기계가 있었는데 끝에 바닷물과 색이 같은 파랑 천막이 긴 롤러에 감겨져 있었다.
나중 목적지에 도착하면 배를 덮을 천막인 것이다.
잘될까.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체험을 한 바즈 역시 백퍼센트는 아니지만 자주 천막을 씌운 수법으로 작전을 성공한 예가 있다고 말했다.
촤아아!
배는 더욱 속도를 높여 대해로 나아갔다.
* * *
종로경찰서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특히 강력계의 공기는 무거웠고 출근한 형사들 모두 일을 하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거나 자판기 앞에 모여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유난히 사무실 쪽을 본다.
뭔가를 기다리는 모양인데 조문철은 다 마신 커피 잔을 찌그려 휴지통에 버리더니 밖으로 나왔다.
경찰서 마당 한쪽에 있는 흡연장소로 걸어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딸칵!
모래로 된 재떨이에는 많은 꽁초들이 꽂혀 있었다.
언젠가 신문에서 보았는데 경찰들의 흡연율이 일반 직장인들 보다 높다는 조사 결과를 본적이 있다.
끊어야지 하면서도 해결되지 않는 사건에 휘말리면 본능적으로 담배부터 찾는다.
“떨어질까?”
김황식 형사가 다가와 역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조문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안 떨어질 것 같은데.”
왜 그러느냐는 듯 조문철이 돌아본다.
“부자 망해도 삼 년 간다고 하잖아. 비록 천왕그룹이 많이 쪼그라들긴 했지만 그들이 과거에 키워 놓은 장학생들이 의외로 많아. 검찰과 사법부에는 여전히 그들 편을 들어주는 인물들이 적지 않고 특히 일부는 고위 간부가 되어 조직을 움직이는 위치에 있다고.”
그들의 힘을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면서 김황식은 부정적이라고 했다.
그때, 후배 형사인 정세오가 급히 다가왔다.
“묵살 됐다고 합니다.”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란다.
“검찰에서 영장 청구하기에는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면서 좀 더 보완 수사를 지시한 모양입니다.”
“이런 개새끼들 무슨 개소리야. 사건 현장 채집 사진까지 증거로 보냈는데 보완수사는 무슨 보완이냐고.”
김황식이 욕을 뱉었다.
“지검장이 누구라고 했지?”
“최승재!”
“담당검사는 통과한 듯 한데 지검장 결재에서 막힌 모양입니다.”
“최승재 그 사람 총장과 한 줄이지?”
“지금 총장 행동대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마침 채불수 팀장이 건물 현관을 걸어나와 흡연구역으로 걸어오고 있었는데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기분이 무척 불쾌한 듯 담배를 거칠게 빼물더니 라이터를 켰다.
하지만 라이터가 불꽃만 튀고 켜지지 않자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져 버린다.
“우라질! 불 좀 줘.”
김황식이 재빨리 두 손으로 라이터를 켜준다.
담배에 불을 붙인 채불수는 씹어뱉듯 말했다.
“한 번 해보자는 건데.”
목소리에 얼음이 낀 것 같았다.
“좋아, 검찰 지시대로 조사를 좀 더 보강해 재신청 해.”
“만약 또 반려되면요?”
채불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거칠게 빨던 담배가 거의 꽁초가 될 무렵 툭 뱉는다.
“그때는 할 수 없지.”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듯 단호한 얼굴이다.
“검 경수사권 분리에 대한 법안 아직도 국회에 계류 중인가?”
김황식이 혼잣말 하듯 묻자 조문철이 대답했다.
“아직 상임위도 통과하지 못하고 있어.”
“개자식들 밥 처먹고 뭐하는 짓들이야.”
조문철이 버럭 소릴 질렀다.
열흘 후 경찰에서는 다시 한 번 현미정에 대한 체포영장을 검찰에 청구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미비하다는 이유를 들어 검찰선에서 반려되고 말았다.
그날 퇴근을 한 채불수는 단골로 다니던 을지로 돼지 껍질 집을 찾았다.
술집에 들어서자 돼지 껍질 구워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직도 연탄을 이용해 굽는 돼지 껍질은 술꾼들에게는 최고의 안주이자 과거로의 여행이었다.
지금은 비록 비곗살로 취급 받으며 성인병을 부르는 주범중 하나가 되었지만 연탄불에 바짝 구워 기름을 짜낸 꼬들꼬들한 껍질은 소주 안주로는 단연 일품이었다.
“여깁니다!”
미리 와 있던 대한신문 사회부 기자 윤칠수가 손을 들었다.
“그렇잖아도 한 잔 막 들려던 참이었는데 받으시죠.”
윤칠수는 이미 철판에 돼지 껍질을 굽고 있었다.
또르르!
서로가 잔을 채워주고 건배를 했다.
쨍!
단숨에 잔을 비운 두 사람은 가위로 잘라 놓은 돼지 껍질을 입속에 넣고 씹는다.
탁!
채불수가 USB 한 개를 내 놓는다.
“뭡니까?”
“저녁에 그것 보고 기사 쓰면 내일 아침 한바탕 시끄러워 질거야. 모가지 아까우면 돌려주고.”
“모가지 잘릴 것 무서우면 기레기 노릇 그만 해야죠. 그런데 뭣이 들었습니까?”
“현미정!”
뚝!
술잔에 술을 채우던 윤칠수가 깜짝 놀라며 동작을 멈췄다.
“그동안 수사 중이라는 얘기만 계속 흘리던데 결판이 난 겁니까?”
“서초동에서 나가리 됐어.”
“검찰이 영장 청구를 막았단 말입니까?”
“당신만 모가지 건 것 아냐. 나도 걸었어.”
채불수가 술을 마시며 말했다.
“채 팀장님!”
“지금까지 어떤 경찰이 이렇게 치밀하고 상세한 수사 내용을 언론에 흘린 적 있나?”
윤칠수는 단번에 잔을 비우더니 다시 채운다.
“그렇다면, 나보다 팀장님이 더 위험하잖습니까?”
“겁나면 돌려주고.”
“무협소설 많이 읽으셨죠. 거기에 보면 동귀어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무슨 뜻인지 알죠?”
“너 죽고 나죽자.”
쨍!
두 사람은 결의를 다지듯 술잔을 부딪치고 다시 비웠다.
조용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차량 한 대가 들어섰다.
차는 천천히 통로를 지나며 빈 곳을 찾고 있었다.
이윽고 빈 공간이 나타나자 비상라이트를 켜고 후진으로 들어가 멈췄다.
운전석 문과 조수석이 동시에 열렸다.
조수석에서 내린 윤칠수 기자는 대리 운전을 해온 사내에게 2만원을 주며 수고했다면서 보냈다.
대리운전사가 왔던 통로를 걸어 주차장 입구로 사라지고 윤칠수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사각 기둥을 지나려는 순간 퍽 하며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쿠웅!
윤칠수는 통나무처럼 꼿꼿하게 바닥으로 넘어졌다.
잠시 후 기둥 뒤에서 두 명의 사내가 나타났다.
한 명은 야구모자를 눌러쓴 서른 초반 가량 되어 보였고 다른 한 사내는 마스크를 하고 뿔테 안경을 끼고 있어 정확한 나이 추정이 쉽지 않았다.
두 사내는 윤칠수 기자의 가방과 주머니를 뒤졌는데 서두른다거나 누군가 볼까봐 경계하는 빛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특히 두 사내는 면장갑을 끼었다.
윤칠수의 소지품에 자신들의 지문이 남는 걸 막겠다는 뜻인데 이런 일에 경험이 많은 듯 뒤지고 살피는데 무척 차분했다.
“이건가?”
야구모자 사내가 USB 하나를 찾아내더니 품속에서 테블릿 PC를 꺼냈다.
이어 다른 주머니에서 꺼낸 젠더와 연결하여 끼운다.
그리고 화면 속에 영상 한 개가 떠올랐는데 현미정과 천오필이다.
그 날 밤 정북동 길가 공원에서 둘이 권총수의 제거에 대해 얘길 나누던 모습이었다.
“좋아!”
두 사람은 흡족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짜식! 이 친구 능력 인정받는 모양이던데.”
뿔테 안경에 마스크를 한 사내가 쓰러진 윤칠수를 손가락질 하며 웃었는데 전혀 모르는 얼굴은 아닌 모양이다.
머리가 지끈 거린다.
소주로 끝냈으면 되는데 입가심으로 맥주를 섞은 것이 결정타였다.
오늘 월례회의가 있는 날이어서 평소보다 30분 일찍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채불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일어났다.
거실로 나온 채불수는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병째 입에 대고 마셨다.
절반 정도 남아있는 물을 완전히 바닥내고 트림을 하며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딸칵!
그때 밖으로부터 문이 열리고 아내 진청혜가 슈퍼를 다녀온 듯 묵직한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섰다.
“어디 갔다와? 벌써 일어났어?”
“오자마자 오늘 월례회의라 일찍 가야한다는 사람이 누구였는데.”
“내가?”
“술 좀 작작 마셔라. 당신 죽는 건 괜찮은데 안 죽고 병원에 자리 잡을까 걱정돼. 난 형사 뒷바라지는 해도 병수발은 못해.”
“아 미안해. 어제 대한신문 윤기자를 만나서 어찌나 퍼마셨든지.”
“윤기자?”
진청혜가 이마를 찡그렸다.
턱!
주방 싱크대 앞에 물건이 든 봉지를 내린 진청혜가 돌아보았다.
“대한신문이라고 했지. 윤칠수?”
“당신이 어떻게 그 사람을 알아?”
“진짜?”
“왜 그러는데?”
진청혜가 재빨리 거실로 걸어가더니 리모컨을 찾아 텔레비전을 켰다.
채널을 마구 돌리더니 뉴스가 진행되는 곳에 맞춰 놓는다.
“조금 전 슈퍼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윤칠수 맞지? 그 사람 죽었다고 나오는 것 같던데, 어 저기 나오네.”
대한신문 사회부 윤칠수 기자가 자신의 아파트 주차장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숨져 있는 것을 순찰을 돌던 경비원이 발견하고 신고했다는 앵커의 멘트가 나왔다.
이어 리포트 기자가 카메라에 나왔는데 사건이 벌어진 아파트 지하 주차장이라고 소개했다.
지금 경찰들이 사건장소를 철저히 통제하며 현장을 감식하고 있다면서 우선 어젯밤 대리운전을 했던 남자를 쫓고 있다고 했다.
“저 사람이 어제 그 사람이야?”
“이런 엠병할!”
식탁 의자에서 일어난 채불수는 거의 넋이 빠진 모습으로 주춤거리며 소파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