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9화: 현장 복귀(2)
목소리에는 살기가 들어 있었는데 배신자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채불수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철컥!
천오필의 왼팔에 수갑 하나를 채우고 나머지 손까지 잡아당겨 마저 채운다.
“연행해!”
김황식이 천오필을 강제로 일으켜 세워 나갔다.
“우리 남편이 뭘 잘못한 거죠?”
아내가 소리치며 따져 물었다.
“좀 더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살인교사 혐의입니다. 몇 개의 혐의가 더 나올지는 우리도 아직 장담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천오필을 끌고 현관 밖으로 나갔고 아내가 뒤따라 나갔다.
“여보 힘내, 하나님께서 지켜주실거야.”
천오필은 무거운 표정으로 걸어나갔다.
부우웅!
잠시 후 천오필을 태운 승용차가 사라지고 아내는 우두커니 서서 바라본다.
“주여!”
여자는 계속 주님을 찾았다.
장웅철로부터 천오필이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몇 마디 더 들은 현미정은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서 있던 현미정은 현관 창문쪽으로 걸어가 커텐을 걷었다.
남편도 죽고 자식도 죽고 시아주버니도 죽고 시동생도 죽고 조카도 죽고, 죽고 죽고 죽었다.
악몽이 지나가고 어느 날 지인의 자녀 결혼식이 있어 호텔 예식장을 갔었다.
그곳에서 국회의원과 현직 장관 몇을 만났는데 누구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그건 모욕이었고 그 어떤 비극보다 살을 찢는 치욕이었다.
불과 몇 년전까지 남편에게 은혜를 입고 공천을 받아 당선됐으며 장관자리에 임명됐다.
또 몇은 천왕그룹을 찾아가 온갖 아부와 비위를 맞추며 정치자금을 타 쓴 자들이다.
도저히 결혼식장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분통이 터져 참을 수가 없었다.
세상인심 조석으로 변한다지만 하루 아침에 모두가 자신을 외면했다.
그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반드시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고 맹세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자신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창밖을 표독스런 눈으로 바라보던 현미정은 갑자기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백을 매고 밖으로 나갔다.
현미정이 다시 나타난 곳은 교도소였다.
문이 열리더니 권악수가 들어섰다.
권악수는 앉아 있는 모친 현미정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앉거라.”
권악수는 마지못해 맞은편 의자에 앉더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길게 연기를 내 뿜는다.
모자 사이에 껄끄러운 침묵이 이어졌다.
“어머니!”
권악수가 입을 열었다.
“처음 면회왔을 때 두 번 다시 이런 곳 오지 말라면서 내가 했던 말 기억합니까?”
“무슨 말 했는데?”
“면회까지 와서 죄수복 입은 아들이 뱉었던 말을 잊어 먹었단 말입니까? 면회를 두 번 세 번 온 것도 아니고 오늘까지 합해 딱 두 번입니다. 첫 면회에서 했던 말이 정말 생각 안 난다면 내 말을 개 좆으로 들었다는 것 아닙니까?”
현미정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뭐라고 했죠? 말해보세요?”
“모른다. 복잡한 머릿속에서 네가 한 말을 어떻게 기억하니.”
“당신은 항상 이런식이야. 뭐든지 당신 편할대로 생각하고 정리하지.”
“말이 더 거칠어 졌구나.”
“작전본부가 하나로 통일되어야 승산이 있다고 말했죠? 아직도 생각 안 나십니까?”
“안 난다.”
“지금 장난쳐요!”
콰아앙!
권악수가 탁자를 치며 일어났다.
“장변호사가 뭐라고 하던가요?”
“좀 더 지켜 보자 더라.”
“빌어먹을, 깡패 자식들 동원해 없앨 수 있는 놈이었으면 진즉에 해치웠지. 어머니가 이럴 줄 알고 내가 그토록 가만 있으라고 일렀는데, 경거망동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말을 들어야지.”
“어미에게 못할 말이 없구나.”
“우와아아악!”
권악수가 소리를 지르며 의자를 집어 던져 버린다.
순간 문이 열리고 교도관이 들어오더니 크게 놀란다.
“죄송해요. 변상할테니 잠깐 이해해요.”
현미정이 지갑에서 백만원권 수표 한 장을 뽑아 교도관에게 건네준다.
머뭇거리는 교도관을 향해 단호히 말했다.
“받아요. 내가 주는 것이니까 걱정말고 쓰세요.”
“감사합니다.”
교도관은 수표를 받아 재빨리 주머니에 넣고 방을 나갔다.
“꼴도 보기 싫어요. 돌아가세요.”
권악수의 싸늘한 소리에 현미정은 두말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섰다.
문을 열고나가려다 몸을 돌려 험악한 인상으로 서 있는 권악수를 향해 말했다.
“한 가지만 말하자. 네 눈에는 어미가 하는 짓이 서툴게 보이겠지만 나 또한 마찬가지다. 너 하는 짓을 보면 완전 무대뽀다. 너처럼 멍청한 놈은 처음봤다.”
탁!
문을 닫고 사라진다.
권악수의 눈이 커졌는데 분노가 극에 이른 모습이었다.
“이런 미친.”
권악수가 문을 거칠게 열고 쫓아나간다.
하지만 바로 앞에 교도관이 막아섰다.
“면회 끝났습니다.”
“비켜!”
“권악수씨 여기 교도소입니다.”
권악수가 돌아섰다.
교도관이 씨익 웃는다.
“더러운꼴 당하기 싫으면 적당히 하세요. 적당히.”
철컥!
풀어줬던 수갑을 다시 채워진다.
천오필은 왜 권총수를 죽이려 했느냐는 질문에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고 했다.
어떤 원한이냐고 묻자 그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막의 흑새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이 한두 명이냐며 자신도 권총수의 직업과 관련한 감정이라는 걸 부각했다.
“그래서 당신이 용병 일이라도 했다는 것입니까? 총들고 사막의 흑새와 붙었냐고?”
“내가 잘 아는 지인이 사막의 흑새가 속한 용병들에게 죽었습니다.”
“그 지인이 누군데? 한국인입니까?”
“한국인일리 없죠.”
“설마 이슬람쪽에 친구가 있다는 얘긴 아닐테고?”
“왜 없어요. 있습니다. 사람 뭘로 보고, 한두 명인 줄 아십니까?”
“이름대보세요. 친구 이름, 이슬람 친구?”
“압둘...뭐 많아요.”
씨익!
조문철 형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좀 다녀올테니까 마음 정리해서 사실대로 말할 준비해요.”
조문철이 나가자 천오필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 준비한 시나리오는 멕시코 마약 조직과의 연계였다.
그런데 어떻게 추궁을 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이슬람쪽으로 얘기가 흘러가 버린 것이다.
증언을 번복하면 그야말로 거짓말이라는 걸 고백하는 꼴이된다.
‘이런 빌어먹을’
경찰과 마주 앉아 한두 번 조사를 받아본 것도 아닌데 갑자기 엉망이 되어버린 탓에 천오필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어쩔수 없이 이미 뱉어낸 이슬람쪽으로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실수를 하고야 만 것이다.
비행기가 워싱턴 델레스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번쩍!
번개가 쳤고 천둥이 공항을 뒤엎을 듯 울려 퍼진다.
올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 31일인데 눈이 아닌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었다.
“비 많이 오는데!”
오민철이 이동하는 통로의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따로 싣고 온 짐이 없었기에 곧 바로 입국 수속을 밟았다.
심사관의 간단한 질문에 대답을 하고 여권까지 무난하게 통과되면서 두 사람은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입구를 나가자 많은 사람이 몰려 있다.
한국에서 온 비행기인 때문인지 낯익은 한국 교포들이 많이 보인다.
그때 정장을 입은 백인 사내 둘이 다가왔다.
“미스터 권총수씨?”
권총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티네스입니다.”
“카사스.”
권총수는 두 사람과 악수를 했고 오민철도 미소띤 얼굴로 손을 잡았다.
“우선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FBI가 준비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권총수는 인천을 출발하기에 앞서 이미 예약을 해놨기 때문에 괜찮다고 거절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난감한 표정을 했다.
권총수는 괜찮다면서 신경쓰지 말라고 했는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이 친구들 서툴긴’
FBI에서 호텔을 준비했다는 건 자신들에 대한 예우차원으로 나쁠건 없다.
하지만 한 발 더 안으로 들어가 생각해보면 달라진다.
호텔이 자칫 자신들의 관리하고 감시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원래 정보기관이나 경찰 집단의 성격상 우호적인 아군이라도 습관적으로 도청장치를 포함한 여러 감시 장비를 동원한다.
의심 차원이 아닌 만약을 대비해서이다.
물론 그 만약이라는 것이 애매한 표현이긴 하다.
이쪽이 위험에 빠질 만약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좋은 정보를 얻기 위한 감시 차원의 만약인지는 불분명하다.
냉전시절 소련 스파이가 미국으로 넘어오면 특별 안가를 이용해 그를 보호한다.
그 안가에는 소련 스파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고 녹음하며 감시한다.
위장 망명인지 아니면 진실인지를 알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경찰도 그렇다.
사회적으로 큰 사건을 일으킨 피해자를 신변안전 운운해가며 자신들이 보호한다.
경찰이 제공한 숙소나 사무실을 사용했다가 본의 아니게 밑바닥까지 털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죄를 짓지 않는 이상 국가 권력의 배려는 무조건 거절하는 것이 정석인 것이다.
일반 사람들에게나 사용하는 수법을 자신들에게도 쓰자 권총수가 웃었던 것이었다.
자신들의 계획이 어긋났다는 것 때문인가.
두 사람 역시 처음 공항에서 만났을 때와 달리 표정이 딱딱하고 말이 없다.
호텔까지 태워다 주고 두 사람이 돌아갔다.
“실망한 눈친데!”
돌아가는 차량을 보며 오민철이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기분 나빠할 건 없다.
어차피 아군도 적이고, 적도 아군인 곳이 이 바닥인 것이다.
뛰어난 CIA나 FBI 요원은 끝없이 의심한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샤워를 끝낸 권총수는 곧바로 가져온 노트북을 꺼내 FBI에서 보내준 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브라질 최대 마약조직 ‘코만도 베르멜루’부터 살폈다.
이미 멕시코 조직과는 한바탕 충돌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대충 조직도를 보면 규모가 잡힌다.
그런데 코만도는 차라리 군대였다.
조직원의 숫자도 많지만 웬만한 보병부대 뺨치는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중남미의 마약조직은 이미 준군사조직이 된지 오래다.
어줍잖은 경찰 몇으로 조직원을 검거하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장수에 지름길이다.
경찰 몇 명이서 권총들고 마약조직원 은거지를 덮쳤다가는 시체가 되어 나온다.
딩동딩동!
권총수는 문이 열렸다고 말해 주었고 오민철이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들어섰다.
“저녁 먹으러 가자. 비도 그쳤는데.”
오민철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건들거리며 들어왔다.
샤워를 하고 난 뒤여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뭐해?”
“자료 훑잖아.”
“배고프다. 일단 뭣 좀 먹고 와서 하자.”
“잠깐만!”
권총수는 지금까지 코만도 조직에 살해된 마약단속국 요원과 FBI요원들의 명단을 일일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건 매우 중요하다.
한두 사람이 아닌 여럿이 죽었을 때에는 어떤 특징이 나타나는데, 그건 조직을 쫓고 사냥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권총수가 워낙 진지하게 컴퓨터를 바라보자 오민철은 더 이상 조르지 않고 가만 앉아 있었다.
포드 익스플로러 한 대가 워싱턴 FBI본부 지하 주차장을 들어가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데 한 번은 사람이 검색을 했고 두 번째는 기계에 의한 폭발물 탐지가 있었다.
통과해도 좋다는 글씨가 나타나자 포드 익스플로러는 느긋하게 주차장으로 들어섰고 빈자리를 찾아 멈춰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