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527화 (527/651)

제527화: 대책회의(2)

듣고 있던 현미정의 표정이 다소 풀렸다.

“별 것 아니잖아요.”

천오필이 멈칫했다.

오늘 사건의 최종 배후자다.

잘못하면 살인교사 같은 죄로 들어갈 수도 있는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그때 소파 끝에 앉아 있던 양조택이 툭 뱉었다.

“경찰에서 왜 권총수를 죽이려고 했냐고 하면 탈레반이나 이슬람 테러조직의 청부를 받았다고 둘러대면 될 것 아닙니까?”

천오필이 이마를 찡그리자 양조택이 다시 묻는다.

“왜요? 경찰이 무슨 수로 그들을 만나 확인해보겠어요? 어차피 권총수는 그들과 불구대천지수이고 살인을 청부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데.”

“말 같은 소릴 하시죠.”

“뭐라구요?”

양조택이 눈을 부라렸다.

“경찰이 그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 재판부에서 인정하겠냐구요. 걱정마세요. 이번일은 우리가 모두 뒤집어 쓸테니까. 보너스나 두둑하게 주십시오.”

“성공을 해야 보너스를 주는 거지.”

양조택이 다시 끼어 들었다.

“어이, 주인과 애기하는데 어디서 개새끼가 끼어들어.”

참다못한 천오필이 양조택을 노려본다.

천오필의 눈빛이 매섭다.

살벌한 눈빛에 눌렸는지 양조택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천오필의 머릿속은 이미 여러 가지 대책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여러 대책이 있지만 공통적인 내용 하나가 모두 들어가는데 그건 바로 현미정이었다.

배후에 그녀가 있는 건 불변이다.

즉 언제든지 자기 입에서 현미정이라는 이름을 토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보너스를 달라고 한 말은 엄밀하게 말해 현미정을 협박하는 것이었다.

이왕지사 일은 벌어졌고 우리가 뒤집어 쓸테니 돈이나 넉넉하게 달라는 뜻이었다.

그런 계산을 읽지 못한 양조택이 끼어들자 천오필이 가만있을 리가 없다.

현미정 역시도 천오필의 돌변한 말투에서 자신의 손에 있던 칼자루가 천오필에게 넘어갔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일은 어차피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면전에서 천오필이 이만큼 대담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좋아요. 얼마를 원하죠?”

“관장님!”

양조택은 관장님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양과장은 가만있어요. 말해봐요. 받고 싶은 보너스가 얼마인지?”

천오필은 망설이지 않고 이미 계산해 두기라도 한 듯 바로 말했다.

“10억만 더 주시죠?”

“미친!”

양조택이 깜짝 놀란다.

“좋아요. 드리죠. 대신 전번처럼 현금으로 전달하지는 못해요. 사장님 계좌로 입금해 드리죠.”

천오필의 눈이 잠깐 흔들린다.

현미정 또한 칼자루를 빼앗겼다고 하여 쉽게 당하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같이 죽자는 뜻이다.

경찰이 계좌를 압수 수색한다면 빼도 박지도 못할 증거로 남을 것이다.

“좋습니다!”

천오필은 빙긋 웃었다.

한때는 영부인으로 불리던 여자다.

수많은 경쟁자들의 견제와 음모 속에서도 기어이 남편을 대통령 자리까지 올려놓은 여걸이라는 기사를 본적이 있었다.

자신도 남은 건 배짱뿐이지만 눈 앞의 전 영부인도 그런 모양이었다.

그녀는 오로지 권총수만 죽일 수 있다면 뭐든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건 우리가 뒤집어 쓸테니 염려 마십시오. 배후 조종자를 끌어들이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도 만약을 대비해 준비해 놓은 카드가 있죠.”

“그 카드라는 것이 뭔가요?”

천오필은 웃었다.

“멕시코 마약조직도 있고, 미국의 갱단도 있고 그를 없애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지구촌 곳곳에 있더군요.”

조직은 조직끼리 통한다는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그쪽 조직에서 청부가 들어온 것으로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만들어 놨다는 뜻이다.

천오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 쉬십시오.”

그리고 양조택을 향해 가볍게 웃더니 현관 문을 열고 사라졌다.

“관장님 괜찮을까요? 저 놈은 깡패중에서도 잔인하기로 소문난 마도로스파 두목입니다.”

“나도 잔인한 사람이에요.”

현미정이 웃으며 일어났다.

“깡패가 아무리 날뛰어 봤자 깡패밖에 더 되겠어?”

현미정은 자신감 가득 찬 시선이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실패를 했다면 도대체 어떤 방법을 써야 하지.”

죽는 한이 있어도 권총수는 죽여야 한다.

“꼭 이래야 합니까?”

“자네 몰라서 그딴 소리 하는 거야. 우리 집안이 망가졌어.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양조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권총수의 모습이 대문 밖에 드러났다.

사라지는 벤츠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겨갔다.

‘지금 죽이면 안 된다’

원래는 오늘 밤 천오필을 제거해 버릴 참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천오필은 현미정의 청부살인에 대한 결정적인 증언을 해줄 수 있는 증인이다.

증인이 죽어 버리면 설혹 그날 공원에서 찍은 동영상과 오늘 밤 경찰들이 직접 체증한 자료들이 흔들릴 수 있다.

현미정측 변호인단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호화롭다.

거기에 그녀의 범죄를 증명할 수 있는 동영상 속에 들어 있는 천오필이 죽어버리면 재판이 너무 일방적으로 흘러갈 수가 있었다.

자칫 무죄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둘 모두를 법정에 세우려면 천오필을 살려둬야 했다.

권총수는 신법으로 병원까지 갈까 하다 택시를 불렀다.

20여분 후에 모범택시가 도착했고 병원근처에 내린 뒤 왔던 나왔던 방법 그대로 신법을 펼쳐 병실 창문을 열고 들어갔다.

권총수는 방안을 살핀 뒤 복도로 나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옥상으로 올라간 권총수는 마련된 흡연구역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가을이 깊어간다.

바람이 쌀쌀했다.

장웅철은 아침에 일어나기도 전에 전화를 받고 소스라쳤다.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놀랍게도 자신과 연수원 동기였던 이철희로 과거 서울지검 공안부장까지 지냈던 사람이다.

지금은 화이트 로펌 대표로 있다.

“지금 뭐라고 했는가? 영부인께서 살인청부에 걸려들었다니.”

“내 의뢰인중 한 사람이 있네. 천오필씨라고, 사람들은 그를 나쁘게 평가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렇지 않고?”

“뭐하는 사람인가?”

“사업가지. 그런데 자꾸 경찰이 귀찮게 하는 모양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 합법이란 선을 넘나들다 보니 말이야.”

장웅철은 즉시 조폭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철희가 천오필의 고문 변호사라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

“오늘 시간 있는가?”

“없는 시간도 만들어 내야 할 일 아닌가. 저녁에 보세. 얼굴 본지도 오래됐고.”

그때 2층에서 장웅철의 아내 진혜미가 잠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둘째 아들 결혼 준비하느라 요즘 바쁘다.

“무슨 전환데 표정이 그래요?”

“그토록 말렸는데.”

“성북동에서 또 무슨 일 저질렀어요?”

“이미 판세는 기울어졌다고 입이 닳도록 말했는데 정말 그분도 지독하군.”

“지독하기만 하면 다행이죠. 그 여자에게 선물 흉내내며 바친 뇌물만도 몇 억이 될 거에요.”

진혜미 표정이 싸늘해진다.

부엌으로 들어가 커피 물을 올리며 진혜미의 차가운 목소리는 이어졌다.

“생일 때마다 봉투 바쳤지. 외국 나가면 즐거운 쇼핑 다녀오라면서 달러로 주었지. 언젠가는 김완기 화백 우주를 갖고 싶다고 해서 우리 무궁화회원 30명이 일 인당 3억씩 걷었어요. 모자란 돈은 또 우리 명의로 대출까지 받았고.”

“그만해.”

“왜 그만해요. 난 아직도 불쾌하고 더럽고 화나는데.”

진혜미는 두 잔의 커피를 가져와 소파 탁자에 놓고 맞은편에 앉는다.

“모르긴 해도 그 여자가 그런 식으로 거둬들인 돈이 적지 않을걸요. 재벌들도 그 여자 생일날 되면 아예 보따리로 돈을 싸가지고 갔다더군요. 재산이 장난 아닐거에요. 회사 무너져도 먹고 사는데 아무 문제없을 거야.”

장웅철은 침묵하며 커피를 마셨다.

“돈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정치하면서 개발 정보 얻어내 사 놓은 땅과 건물이 어디 한두 개야. 그 여자라고 인생이 평탄하기만 하겠어. 언젠가 한 번은 고비가 올 줄 알았는데.”

진혜미는 속이 시원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그렇고, 권회장은 어때요? 나오긴 나온대요?”

“두고 봐야지.”

“싸가지 없는 새끼, 생각할수록.”

진혜미의 욕설에 장웅철은 옛일이 떠올랐다.

언젠가 부부동반 측근들 식사자리가 있었다.

한번 부르면 천만 원 단위가 넘어가는 국내 제일의 실내악 5중주단 코스모스까지 초대한 귀한 자리였다.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권악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를 하나 피우기 위해 잠시 자리를 이탈하려는 것이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진혜미는 재빨리 권악수를 따라갔다.

“회장님!”

“어, 장팀장님 사모님 아니십니까?”

장웅철은 권철악 때부터 법무팀장으로 일해 왔기 때문에 권악수는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할 말 있으십니까?”

“네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하십시오. 장 팀장님이야 말로 아버지때부터 쭈욱 천왕그룹을 지켜온 창업공신이나 다를바 없는 분입니다.”

“작년에 계열사 사장으로 보내주신다고 하셨다던데?”

“누가?”

“회장님께서 하셨다고.”

“내가? 미쳤나. 내가 그런 헛소리를 왜 합니까? 장팀장 그 사람 집에 가서 무슨 헛소리를 했기에.”

그러면서 지나가 버렸다.

진혜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적당히 술도 올랐다.

그래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는 식으로 말했다면 충분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미쳤냐’, ‘그런 헛소리를 왜 하냐’, ‘장 팀장이 집에 가서 무슨 뺑끼(거짓말)를 쳤기에 그런 소릴 하느냐’고 사정없이 뭉개버릴 때 눈앞이 노랬다.

수모도 그런 수모가 없었다.

아무리 회장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임원 부인의 면전에서 그토록 막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받은 그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분노와 증오의 불길로 가슴 아래 타오르고 있었다.

“세상을 밉게 보면 한없이 미운 법이야.”

“내가 밉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날 화나게 한거야. 그래놓고도 아직까지 사과 한마디 없잖아요. 권악수 회장도 그래요. 지금 그 사람 곁에 누가 있어요. 옥바라지하는 사람이 당신 말고 또 있어요?”

장웅철은 대답 없이 커피를 소리내어 마신다.

“꼴 좋다. 남 가슴에 대못 박아 놓고 언제까지 탱자탱자하면 살줄 알았나.”

장웅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쪽으로 걸어가는 진혜미를 바라보았다.

여자로서는 견디기 힘든 모욕이다.

남편 출세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상당한 공을 들였다.

특히 현미정에게 쏟은 정성은 가슴 아플 정도였다.

하지만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었고 지금도 가끔 전화를 하는데 반말이다.

장웅철은 아내의 가슴속 감정을 충분히 헤아린다.

이해하는 것이다.

면회실 문을 열고 장웅철이 들어섰다.

권악수 얼굴은 무척 초췌해 있었다.

“아직도 그놈에게 어떤 대답이 없는 거요? 개자식이 얼마를 더 받겠다는 거야.”

권악수는 자신이 제시한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 권총수가 오케이를 하지 않고 있다고 보는 듯 했다.

“뭘 더 원하는지 물어보세요. 웬만하면 줍시다. 그리고 일단 나가서 그 자식 목을 따든 베든 하자고.”

이를 뿌드득 간다.

“그것보다 회장님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무슨 일?”

“사모님께서 기어이 일을 벌이고 말았습니다. 어제 밤에 깡패들을 동원해 권총수를 쳤는데 미리 정보를 안 경찰들이 잠복해 있다가 전원 체포되었습니다.”

권악수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