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525화 (525/651)

제525화: 불꽃(3)

권총수는 부드럽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아무런 감정 없으니 이만 돌아가주십시오.”

“미국에서 전화가 온 모양입니다. 원장님께 직접 다이렉트로?”

“누가요?”

“랭글리 대표지 누구겠습니까?”

권총수는 잠시 이마를 찡그리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표정을 펴고 말했다.

“일단 돌아가시죠.”

아직까지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다.

분명한건 어제 돌아온 뒤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정현웅의 태도를 보면 호텔 커피숍을 나와 곧바로 랭글리에 전화를 하여 혼 좀 내달라고 자신이 부탁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정현웅을 겨우 달래 돌려 보내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오민철이 들어섰다.

“그 자식 왔다갔다면서? 정현웅 5국장?”

파팟!

갑자기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마치 어떤 먹이를 발견한 맹수의 눈이다.

“형이구나. 형이지? 미국에 전화 한 사람.”

“개자식들, 내가 했지. 우리대표님이 개망신을 당하고 왔는데 이게 말이 되느냐. 엔터프라이즈호 납치 사건부터 한국 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여러 번 도움을 주었는데 너무 은혜를 모른다. 자식들이 인간이냐?”

“누구와 통화했어?”

“맥보란에게 전화를 하여 랭글리 차원에서 한마디 해달라고 했지. 백악관에서도 나서주면 더욱 좋고.”

오민철은 내 덕에 그 자식이 와서 싹싹 빌지 않았느냐면서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권총수는 한마디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오민철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당하고 왔으니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처럼 조금은 유치한 방법이긴 해도 그게 오민철이다.

스스로에게는 엄격하면서도 권총수가 어려움에 처하면 앞뒤 가리지 않는다.

권총수는 결국 웃고 말았다.

그리고 두 시간 정도 지나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자신을 국정원장 황치수라고 밝히면서 괜찮다면 오늘 저녁 가능하겠느냐고 묻는다.

권총수는 자칫 자신이 사과를 해야할 저녁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자고 했다.

결코 길가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과도 나쁜 감정을 맺어서는 안된다.

커피숍에서는 화가 난 건 사실이지만 자신이 무척 오만했다는 걸 반성했다.

이른바 잘나가다 보니 건방져진 것이다.

‘초심을 잃는 순간 모든 건 무너진다’

죽은 히말라야의 사나이 비렌드라가 했던 말이다.

권총수는 추워오는 창밖을 보며 오민철을 떠올렸는데 웃음이 터져 나온다.

즐거운 형님이고 어느 누구보다 네편 내편을 분명하게 나눈다.

내편에게는 목숨을 걸면서 같은 편이라는 걸 보여주지만 네 편에게는 인정사정없다.

그런 오민철을 미국인들이 좋아했다.

나와 상대를 정확하게 구분 짓는 사람들이 정직하다는 것이 오민철을 좋아하는 그들의 의견이었다.

또다시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참내!”

그래서 오민철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황치수는 정보기관 수장답게 말수가 적었다.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무척 느리고 차분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 역시도 정현웅과 크게 다를바 없었다.

이해해 달라.

정말 유감이다.

정부기관의 수장은 관료이면서 정치인이다.

정치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황치수 또한 그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권총수의 뒤틀려 있을지도 모를 마음을 어루만져주려고 했고 자신을 적당히 낮추기도 했다.

또한 좌석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며 난 모든 걸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오민철이 CIA관계자에게 고자질을 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상대가 스스로는 낮추므로 이쪽에서도 그 만큼 낮추면 된다.

비즈니스는 어느 한쪽이 높아지면 일방적이 되고 자칫 깨지기 십상이다.

설혹 그 비즈니스가 성공한다고 해도 다음 두 번은 결코 성사되기 어렵다.

황치수는 시간이 흐르면서 눈을 빛냈다.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권총수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못했다.

가장 결정적인 건 랭글리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어이가 없었고 사내답지 못하며 어떻게 그토록 속 좁은 위인이 블랙잭이라는 회사를 키워냈을까 의문이 들었다.

CIA같은 지상최고의 정보기관에서 이런 한심한 사람을 최고의 파트너로 교류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디에선가 사고가 생겼다’

황치수는 확신했다.

과잉 충신이 있다.

권총수 모르게 그가 그쪽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여 앙갚음 해달라는 식의 고자질 같은 것 말이다.

황치수가 자꾸 바라본다.

그건 누군가 밑에 사람이 저급한 방식을 쓴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하지만 권총수는 절대 저의 밑에 직원이 흥분한 나머지 시키지 않은 일을 했다는 사과 따위를 말하지 않았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아랫사람의 실수는 윗사람의 부덕에서 오는 것이다.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해석하든 상관없다.

그건 철저히 상대 몫이지 자신의 입으로 난 그런 사람 아니라고 부인할 이유는 없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

하고 신뢰하면 되는 것이고 가벼운 사람으로 취급하면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비즈니스는 사람 보는 눈이 없으면 없는 만큼만 이뤄진다.

황치수로부터 정부와 자세한 협의를 거쳐 한 달 이내에 대답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어둠속에서 잠복하고 있는 채불수 팀장의 눈이 커졌다.

커다란 봉고차 두 대가 골목을 올라가고 있었다.

전번에 봤던 봉고차와 비슷한데 넘버가 틀리다.

골목 끝에서 한 블럭 아래에 봉고는 멈췄다.

권총수의 집을 들어가려면 마지막까지 올라가는데 오늘은 한 블럭 아래 골목에 선 것이다.

그건 어떤 작전을 하겠다는 의미다.

드르륵!

봉고차가 멈추고 사내들이 쏟아져 내렸는데 20여명 가까이 된다.

사실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 권총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저녁쯤 또다시 마도로스에서 자신을 칠 것이라면서 진급 한 번 하려면 잘 준비해서 출동하라는 것이다.

다소 불쾌했다.

강력계 팀장에게 전화해 출동 하라마라하는 것도 선을 넘은 일인데 마도로스파가 온다는 건 또 무슨 소린가.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워낙 신비막측한 인물로 포장되다 보니 통화를 끝내고서도 마음 한쪽이 무거워졌다.

출동을 하느냐 마느냐.

최소한 헛소리나 늘어놓는 사내는 아니다.

그래서 허탕 칠걸 각오하고 왔는데 진짜로 마도로스파 사내들이 내린 것이다.

“지원, 빨리 지원 좀 해달라고.”

채불수는 그제서야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간파하고 당직실에 전화를 걸어 야간 근무자들을 모조리 출동시켜 달라고 했다.

“권총수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지?”

운전대를 잡고 있는 김황식 형사에게 물었다.

“전화해줄까요? 마도로스파 애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있다고.”

“그냥 놔둬.”

김황식이 채불수를 바라보았다.

20여명이다.

회칼에 쇠파이프, 야구방망이에 언뜻 일본도를 가져온 사내도 보였다.

잡히면 죽는다.

“저번 침입으로는 현장감이 떨어져. 직접 죽이려고 달려드는 걸 찍어야 옴짝달싹 못할 증거로 남지.”

김황식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긴장한 표정은 숨기지 못했다.

권총수에 대해 허무맹랑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지만 사람일은 모른다.

또한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뭐해, 총 챙겨!”

채불수가 자신의 권총을 꺼내 탄창을 끼워 넣는다.

“발포 규정을 지켜야 하겠지만 흉기를 든 놈들이야. 소극적으로 나가면 달려들 놈들이니 그냥 당겨 버려.”

그때 산 쪽에서 권총수의 집을 감시하고 있던 조문철 형사로부터 무전이 왔다.

“담장을 뛰어 넘어갑니다. 아무래도 집안에서 잠복해 있다가 들어오면 칠 모양입니다.”

“오늘 아예 작정한 모양이군.”

채불수가 씨익 웃었다.

“그 여자 취미가 미술품 모으는 것이라고 했던가? 전 대통령 부인 말이야.”

“현미정 여사요? 예, 청와대 있을 때도 말들이 적지 않았나 봅니다. 대통령과 외국 순방 때 많이 들여온 것 같더군요. 당연히 세금은 내지 않았고.”

“뭘 알아서 구입하는 걸까?”

“알긴 뭘 알아요. 욕심이고 사치죠. 집안에 그런 그림 한두 점 걸려 있으면 폼 나잖아요.”

“과시다?”

“당연하죠.”

“팀장님 권총수씨 차 올라갑니다.”

다리 근처에 잠복하고 있던 팀원의 무전이 걸려왔다.

“권총수 오고 있대.”

두 사람은 재빨리 승용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어디까지 왔어? 그래. 내가 약도 준 집 있지. 아니다. 시끄러울 테니까 일단 올라오면 알게 되겠네. 어디 만큼 왔어. 그래 빨리 오라고.”

지원팀과 전화를 끊고 채불수는 한 블럭 아래 오른쪽 골목 담벼락에 붙었다.

부우웅!

벤츠 한 대가 라이트를 켜며 올라오고 있었다.

권총수는 차를 천천히 몰아 좌회전하며 골목으로 들어섰다.

술은 마셨으나 이미 현장에서 주정(酒晶)으로 만들어 태워 버렸다.

지금은 음주 측정기에 대고 불어도 결코 수치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권총수는 차에서 내려 곧바로 대문으로 다가가더니 열쇠를 꽂고 문을 열었다.

화악!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대문 뒤에 숨어있던 두 사내가 동시에 야구 방망이를 내리쳤다.

빠악!

퍽!

권총수는 손을 들어 올려 막았는데 강력한 강기가 팔을 쇳덩이처럼 감싸고 있었다.

크훅!

똑같은 두 마디 비명이 들리며 권총수를 내리쳤던 두 사내가 오히려 피를 토하며 나동그라졌는데 쉭 하면서 어둠속에서 칼이 들어온다.

권총수는 몸을 틀어 피하지만 취한 사람처럼 휘청했다.

찌이익!

칼이 양복 상의를 찢으며 와이셔츠가 드러난다.

칼을 피하느라 바닥으로 넘어진 권총수를 향해 사내들이 달려들었다.

재빨리 일어난 권총수는 뒷걸음질하며 밀려가다 마당 한가운데 있는 운기조식 바위에 걸려 또 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딱!

퍽!

권총수의 몸 위로 파이프와 야구방망이가 쏟아졌는데 일부는 맞기도 했지만 바닥을 뒹굴며 절묘하게 피한다.

콱!

뻐억!

차라리 소나기다.

작정한 듯 사내들은 인정사정없이 휘둘렀고 권총수는 일부는 맞고 일부는 피해가며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쇠파이프가 머리를 때리며 피가 튀었고 왼쪽 어깨뼈에 야구방망이가 찍혔다.

이쯤 맞았으면 됐다.

“으흑!”

권총수는 더욱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건 경찰을 부르는 소리였다.

타아앙!

바로 그때 총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마당으로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들며 소리쳤다.

“모두 무기 버려,”

십여 명의 경찰들이 일제히 권총을 뽑아 들었다.

탕!

사내들이 무기를 버리지 않고 주춤하자 다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마지막 경고다. 무기 버리고 엎드려.”

그때였다. 한 사내가 회칼을 쥐고 사내들을 비집고 다가오더니 권총수를 향해 그대로 찔렀다.

히죽!

회칼을 휘두르던 사내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권총수가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었는데 자신들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던 사람이 왜 웃는걸까

푹!

칼은 빗나갔고 탕! 하는 소리가 들리며 사내는 엎어졌다.

넘어진 권총수의 가슴을 찌르는 사내를 보고 경찰의 권총이 가만 놔두지 않은 것이다.

상체를 숙였기 때문에 옆구리에 총을 맞은 사내는 쓰러져 숨도 못 쉬고 허우적거린다.

“이 새끼들이 무기 버리라니까?”

타앙!

보다못해 김황식이 앞에 있는 사내의 허벅지에 총알을 박았다.

“허걱!”

연달아 주저앉는 사내를 보고서야 모두가 들고 있는 무기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텅!

투두둑!

“땅에 박으라고!”

고함소리에 사내들이 일제히 마당에 엎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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