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524화 (524/651)

제524화: 불꽃(2)

침묵이다.

둘 사이에 어떤 말도 없었다.

그렇게 오 분 여가 지나고 국장 정현웅이 일부러 침묵을 깨려는 듯 소리를 내며 커피를 마셨다.

그러자 조만기도 커피를 마셨는데 그의 얼굴은 아직도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국장님!”

“아냐. 할 얘기했어. 우리가 기분 나빴던 건 사실이잖아.”

“어린놈의 자식이.”

할 얘기했다는 말에 고무된 것일까 조만기 입에서 욕이 튀어 나왔다.

정현웅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회사로 들어서자 오민철이 쪼르르 달려왔다.

일이 잘됐는지 표정을 살피려는 듯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본다.

꽈직!

권총수는 빈 담배갑을 구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담배!”

“예 대표님!”

오민철은 재빨리 자신의 담배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두 손으로 바치고 라이터까지 켠다.

딸칵!

권총수는 힘껏 빨아 당겼다.

후우!

이어 길게 연기를 내 뿜고 창문을 열었다.

“일이 잘 안 된거야?”

오민철이 정색하고 물었다.

“형, 회사 미국으로 옮기자.”

“갑자기 뭔 소리야. 멀쩡한 회사를 미국으로 왜 옮겨?”

권총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살짝 웃더니 호텔 커피숍에서 있었던 얘길 들려주었다.

오민철이 눈을 부라렸다

“뭔 그런 친구가 있어. 자기가 국정원 과장이면 과장인거지 국민을 상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어쨌든 공직자인데, 그 자식들은 우리 세금으로 월급 받으니까 머슴이라고.”

권총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넌 웃음이 나오냐? 기분 안 나빠? 머슴자식이 주인에게 성질을 냈는데 가만 두고 왔어? 나 같았으면 한 대 쥐어 박았다.”

“처음에는 약간 욱했는데 돌아보니 그냥 그러더라고, 내가 그들과 입씨름 할 이유도 없고.”

하지만 권총수는 얼굴 가득 불편한 기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 권총수를 오민철은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한참을 살피듯 바라보던 오민철의 눈이 조금씩 가늘어지며 새파랗게 빛난다.

급기야 어금니까지 깨물었는데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제5국장 정현웅은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 한 병을 꺼내 컵에 가득 따랐다.

오랜만에 어제 소주를 한 잔 마셨다.

공직에 몸담으면서 술은 가급적 피한다.

먹자고 작정하면 말술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주량이지만 하는 일이 워낙 중요하다보니 자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어제 조만기 과장 생일이고 하여 돼지껍데기에 소주를 좀 마셨다.

벌컥벌컥!

시원한 냉수를 한 컵 마신 정현웅은 배달된 신문을 가지러 가기 위해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식탁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아직 여섯시가 되지도 않았을 텐데?

누구 전화일까 싶어 다가가 액정을 보던 정현웅은 깜짝 놀랐다.

‘사장님’

자신에게 사장님은 한 명 뿐이다.

“예 원장님!”

국정원장 황치수였다.

“일어났소?”

“예, 지금 신문 가지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무슨 일입니까?”

“지금 좀 보지.”

“예?”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잠시 놀란 표정으로 서 있을 때 안방문이 열리며 아내 최혜선이 잠옷차림으로 나왔다.

“여보 왜 그래요?”

“아냐. 원장님이 지금 좀 보자는데?”

“무슨일루요?”

“가봐야지.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인데.”

“잠깐 기다려요. 내가 아침 간단히 차릴게요.”

“아냐? 신경쓰지마.”

안방으로 들어간 정현웅은 10분이 채 안돼 정장 차림으로 나타났다.

“조금만 기다려. 식빵 한 조각이라도 먹고 가.”

“괜찮아. 아침 한 끼 때문에 굶어 죽는 사람 없어. 갔다 올게”

정현웅은 아파트 문을 열고 사라졌다.

“뭔일이지?”

아내 최혜선은 팔짱을 끼며 이마를 찡그렸다.

새벽같은 출근에 정문 근무자가 깜짝 놀란다.

“출근하셨지?”

정현웅이 물으면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아세요? 조금전 오셨습니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 정문 위병이 놀란다.

“수고하라고.”

바리케이트를 통과한 차량은 오른쪽 주차장을 향해 사라졌다.

황치수는 윗도리도 벗지 않은 채 쇼파에 앉아 자판기에서 뽑은 종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조간신문을 넘길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정현웅이 들어섰다.

“원장님!”

“왔군. 앉아!”

정현웅은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 했어요?”

“아직.”

“아침 거르는게 아주 건강에 나쁘다더군요. 그래서 난 웬만하면 반드시 아침은 챙겨 먹고 나옵니다.”

그 시간에 누가 아침을 먹나.

뻔히 알면서 말을 돌리는 건 뭔가 불편한 일이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황치수는 다시 신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맞은편에 앉은 정현웅이 이마를 찡그리며 신문을 보는 황치수 표정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비상시국도 아닌데 어쩐 일일까.

탁!

황치수는 신문을 대충 훑어 읽고 마지막장을 덮어 접은 뒤 한쪽으로 치운다.

“정 국장!”

“예!”

황치수 눈이 매섭게 빛난다.

“나도 기분 나쁩니다. 굉장히 불쾌해요. 대한민국의 정보기관 수장이 굽신거리며 그 자식들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못마땅하단 말입니다.”

“원장님 무슨?”

“우리가 주권국가 입니까?”

주권국가냐는 질문에 정현웅의 표정이 굳어졌다.

“주권 국가냐고 묻잖아요?”

“주권국가죠.”

“맞습니다. 우리나라는 주권국가입니다. 하지만 단 한 나라만은 예외입니다. 우리를 자기들 시다바리로 보는 새끼들.”

황치수 표정이 굳어진다.

“미국!”

“건들 놈들을 건들어야죠. 도대체 어제 일 처리를 어떻게 한 것입니까? 랭글리 오야붕한테서 직접 전화가 왔어요. 그뿐인 줄 아십니까? 백악과 수석비서관이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우리와 코드가 맞지 않으면 같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백악관이라는 말에 정현웅의 눈이 커졌다

“무슨 코드?”

“몰라서 물어요? 사막의 흑새가 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모르냐는 거에요. 지난 10여년간 사막의 흑새는 미국이 개입할 수 없는 극비의 작전 다섯 건을 완벽하게 처리했고 또한 미국을 대신해 이슬람 테러조직의 수뇌 20여명이 그의 손에 제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란까지 잠입해 들어가 발칵 뒤집어 버린 친구라는 거죠.”

“아아!”

정현웅은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권총수다.

원인은 어제 일 때문인 것이다.

“가서 사과하세요. 더러워도 그 방법 말고는 이 난국을 해쳐나갈 길이 없습니다.”

난국이라는 표현에 전화로 상당한 항의를 받은 모양이었다.

황치수는 일어섰다.

“나 그런 일로 옷 벗기 싫습니다. 이 소식이 청와대에 들어가기라도 해봐요. 나 때문에 대통령님이 곤란해집니다.”

정현웅도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결자해지라고 했으니 제가 가서 사과를 하고 용서를 받겠습니다.”

탁!

문이 닫히고 정현웅이 방을 나갔다.

“그렇게 정치를 몰라서야 원.”

황치수는 짜증을 낸다.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나쁘다는 표현을 해서 될 상대가 있고 속이 뒤집어지지만 괜찮다며 웃어야 할 비즈니스가 있다.

상대는 세계유일의 초강대국이다.

더욱이 한반도 평화 안정을 위해 그들의 힘을 빌리고 있는 지금 우리는 원든 원치 않든 그들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다.

언젠가 우리가 독자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정리해 나갈 수 있는 그날은 오겠으나 아직은 함부로 날뛰어서는 안된다.

한국을 방문중이던 미국의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망신을 당했다고 해도 직접 전화를 걸어오지는 않는다.

그만큼 권총수는 그들에게도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세가 권총수라면 그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벤츠에서 내린 권총수는 차문을 잠그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데 여기저기 다른 층의 회사직원 몇 명이 앞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권총수도 그들과 함께 기다렸다가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안은 조용했고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비록 다른 층의 회사 직원들이지만 일부는 권총수를 향해 눈 인사를 건넸다.

한국 최초의 군사보안 기업 블랙잭 대표라는 이름으로 다큐멘터리와 뉴스 화면에 자주 나타났기 때문에 아는체를 한 것이다.

권총수 역시 눈인사를 하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9층에 내렸다.

“대표님!”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 강순태 과장이 다급히 다가왔다.

“결제할 것 있습니까?”

7층에서 근무하는 경리과장이 9층에 나타나자 묻는다.

“그게 아니라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그러면서 손목시계를 봤는데 아직 9시 10분 전이다.

오늘은 급히 처리할 일들이 많아 평소보다 삼십분 일찍 출근한 것이다.

“제가 8시 20분에 도착했는데 사무실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군데 그럽니까?”

“국정원에서 왔다고 밝히더군요.”

국정원이라는 말에 권총수는 깜짝 놀랐다.

그들이 절대 자신을 찾아올리 없다.

오히려 자신이 찾아갔으면 가야할 입장이다.

물론 아직은 좀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볼 것이기 때문에 만날일이 없다.

“어디에?”

“7층 내 사무실에.”

“모시고 와요.”

강순태가 엘리베이터로 내려갔고 권총수는 방으로 들어왔다.

윗도리를 벗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십여분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리며 업무처리를 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강순태가 낯익은 사내를 데려왔다.

제5국장 정현웅이다.

강순태는 말씀 나누라면서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킨다.

강순태가 나가자마자 정현웅이 무릎을 꿇었다.

쿠웅!

“용서하십시오. 어제 너무 경거망동 했습니다. 정말 죽을 죄를 졌습니다.”

권총수는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하는 겁니까?”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이러지 마세요. 일어나세요.”

하지만 정현웅은 꼼짝도 않는다.

용서해주지 않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기세를 보였다.

권총수의 오른손이 앞으로 나갔고 무형의 경기는 단번에 정현웅을 일으켜 세워 버렸다.

화악!

정현웅은 자신의 몸이 스스로 일어나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얼굴을 했다.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다.

“앉으세요.”

권총수는 쇼파로 자리를 권했다

정현웅은 상당히 당황한 표정이다.

현실인지 꿈인지 구별해 보겠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다시 바라보았다.

이윽고 엉거주춤 쇼파에 앉아 잘못했다 정식으로 사과한다 내가 너무 건방졌다면서 자신에게 사과의 강한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권총수의 이마가 잔뜩 찌푸려졌다.

어제 그토록 당당하던 그가 하루밤이 지나자 무릎을 꿇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밤 사이 뭔일이 생긴 것이 분명한데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국장님 난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왜 이러십니까. 정말.”

“국장님 처음에는 솔직히 불쾌하기도 했지만 틀린 말 하신 건 아니잖습니까? 국장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일찍 찾아와 이러시면 저 또한 황망할 뿐입니다. 무슨일인지 말을 해보시죠?”

정현웅이 바라본다.

권총수가 정말로 뭘 모르고 있는 건지 알면서 시치미를 떼는건지 살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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