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3화: 불꽃(1)
권총수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권총수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채불수는 얼른 얼버무렸다.
“그냥 한 번 묻는 것입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시라도 신변이 위험하다고 판단이 되면 언제든지 저희에게 신고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명함 한 장을 건네주고 대문을 나갔다.
권총수는 채불수가 준 명함을 잠시 바라보더니 주머니에 넣었다.
말없이 담배를 피우는 권총수의 이마가 좁혀져 있었는데 뭔가 고민을 하는 듯 보인다.
툭!
마당 한쪽에 있는 재떨이에 담배를 끄더니 대문 밖으로 나갔다.
곧장 차에 올라 후진으로 골목을 나간뒤 차를 돌려 사라졌다.
권총수의 예상은 맞았다.
금방이라도 무기징역 정도의 범죄자 취급을 받을 것 같던 천오필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동생들을 데리고 경찰서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경찰서 앞마당으로 견인되어 온 자신들의 차량에 오른다.
“일단 청진동 해장국집으로 가자.”
천오필이 벤츠 뒷좌석에 앉아 말했다.
부우웅!
벤츠를 선두로 봉고차 두 대가 경찰서를 빠져 나갔다.
청진동 해장국 집 거리는 한밤중이지만 대낮처럼 불을 환하게 켜놓고 있었다.
사내들은 말없이 해장국을 먹고 있었다.
천오필은 식당 밖에서 누군가와 통화중이었다.
자세가 공손한 것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어 전화를 끊더니 운전을 할 부하 한 명만 데리고 차에 올랐다.
부우웅!
천오필의 벤츠가 떠나고 잠시 후 맞은편 길가에 있던 벤츠가 출발했다.
미행하는 벤츠 운전자는 권총수였다.
경찰서에서부터 계속 뒤를 따라온 것이다.
삶에는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그 흐름을 따르지 않고 역행하려들면 해를 입는다.
역행의 대표적인 현상이 욕심이다.
자신의 능력과 처한 상황을 무시하고 과도한 목표를 세우거나 추구할 때 반드시 부작용이 발생한다.
권총수 또한 서둘지 않고 차분하게 일어나는 현상에만 맞서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가급적이면 손에 사정을 두기로 했다.
살인자보다 나쁜 조직폭력배들이지만 더 이상 손에 피를 묻히기 싫었으며 최대한 적당한 선에서 정리하고 해결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움직여야 했다.
예상대로 차는 성북동으로 들어섰다.
이윽고 붉은 벽돌 담을 이루고 있는 저택 앞에 멈추는가 했는데 속도를 떨어뜨린 채 백여 미터를 더 가더니 멈췄다.
오른쪽으로 소나무 숲이 있고 나무들 사이로 벤치 몇 개가 놓여있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딸칵!
뒷문이 열리고 천오필이 내려 공원으로 걸어갔다.
권총수는 백여 미터 정도 지나가 차를 세우고 내렸다.
스으으!
어둠을 최대한 이용해 불영보를 펼쳤는데 순식간에 커다란 소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천오필은 담배를 피우며 공원 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그때 차량 한 대가 맞은편에서 오더니 공원 앞에서 멈추고 여자가 내렸다.
청바지에 후드 티를 걸친 여자였는데 도로를 횡단하여 공원으로 걸어왔다.
권총수는 다가오고 있는 여자가 권악수의 모친 현미정이라는 걸 알아 보았다.
권총수는 미리 준비한 캠코더로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찍기 시작했다.
밤이다.
가로등 불빛에 두 사람의 모습이 찍히기는 하겠지만 선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열화상 카메라를 동원할까했으나 그건 형체만 잡을 뿐 사물이 자칫 범벅이 될 수도 있다.
유일한 방법은 캠코더로 찍으면서 소림의 반야금강수를 내가강기로 변환하여 펼치는 것이었다.
반야금강수가 최대한 두 사람 주위의 어둠을 밀어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원의 어둠을 모조리 밀어내는 건 아니고 두 사람의 모습이 카메라에 잘 찍히도록 몸 주위 어둠만 밀어내는 것이므로 자신들은 인지하지 못한다.
녹음 또한 선명하게 될 수 있도록 주변의 소음을 내가 강기로 차단했다.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말을 주로 현미정이 했고 천오필은 예예하며 대답만 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늦어도 이달 안에 마무리 하겠습니다.”
“반드시 권총수 그놈을 죽여 손가락 한 개를 잘라 오세요.”
현미정의 입에서 가혹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소나무 숲 사이로 파고든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현미정의 눈이 녹색으로 빛났다.
무시무시한 살기였다.
“그놈의 손가락만 가져오세요. 돈은 얼마든지 더 줄테니까.”
“걱정 마십시오. 사모님!”
몇 마디 얘기를 더 나누고 현미정이 먼저 공원을 나와 타고온 차를 몰고 사라졌다.
천오필도 길게 심호흡을 하더니 차로 걸어갔다.
탁!
문이 닫히고 천오필의 벤츠는 사라졌다.
다음 날 채불수 팀장은 출근을 하고 있었다.
먼저 출근한 부하직원들이 아는 체 인사를 했고 채불수 또한 손을 들어 미소로 대답했다.
“채불수 팀장이 누굽니까?”
그때 오토바이 헬멧을 벗어든 사내가 입구에서 물었다.
모든 사람들이 돌아보았고 채불수가 다가왔다.
“내가 채불수입니다만?”
사내는 주머니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주었다.
“퀵입니다.”
“이게 뭡니까?”
“난 모르죠. 수고 하십시오.”
“잠깐, 잠깐!”
채불수가 돌아서는 퀵 사내를 불러세웠다.
“누가 보낸 것입니까? 보낸 사람 말입니다.”
봉투 어디에도 글씨가 없다.
“권총수씨라고 구기동에 사시는 분입니다.”
권총수라는 말에 채불수는 물론 다른 팀원들까지 눈을 빛냈다.
퀵 사내는 헬멧을 쓰더니 사라졌다.
툭!
봉투를 거꾸로 들자 작은 USB 한 개가 나왔다.
채불수는 잠시 USB를 보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컴퓨터를 켰다.
“USB 아닙니까?”
조문철 형사가 다가왔다.
컴퓨터가 켜지자 USB를 꽂고 안의 내용을 끌어냈다.
“엇!”
화면을 보며 조문철 형사가 놀란다.
“천오필이 아냐?”
조문철이 놀라 말했다.
그때 김황식도 재빨리 다가오더니 컴퓨터 화면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 여자는 누구지?”
채불수가 이마를 찡그렸다.
배경은 어둡지만 두 사람의 얼굴은 선명하게 나왔다.
“그 사람이잖아. 권철태 전 대통령 부인 현미정씨.”
“어 진짜네!”
전 대통령 부인이라는 말에 다른 형사들까지 몰려들었다.
채불수는 소리를 키웠고 둘의 대화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오전 10시가 채 안됐는데 권총수는 호텔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국정원 관계자들을 만나야 했다.
북한군 출신을 블랙잭 용병으로 채용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허락이 필요한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앞서도 염려 했지만 그들이 벌어들이는 노동임금의 상당수가 노동당 정치자금으로 들어가버리기 때문이다.
즉 북한 고위층의 배를 불려주게 되는 것이다.
국내의 인맥을 이용할까 하다 자신의 미국내 영향력을 은근히 과시할 필요가 있다는 오민철의 의견이 있었다.
‘한국은 어쨌든 미국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라 아니냐.’
결국 맥보란에게 연락을 했다.
맥보란은 곧바로 CIA 최고위 층을 직접 만나 권총수의 계획을 설명했고 그 자리에서 오케이가 떨어졌다.
‘네이비 씰로도 해결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남자죠’
맥보란은 미국 관리들을 만나면 권총수의 인물평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특히 정치인들은 그 말에 굉장한 흥미를 보인다.
세계 구석구석을 간섭하고 관여하는 미국이다 보니 미 국민을 향한 테러 위협은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어떤 작전에 실패했을 때와 성공했을 때의 여론의 지지율은 아주 크게 상승과 폭락을 보인다.
9.11일 테러 때 부시의 지지율은 바닥이었다가 이라크를 침공하자 회복되었다.
오마바 역시 의료정책 혼선으로 지지율이 바닥을 기다 오사마 빈라덴 제거 소식이 나오면서 급등했었다.
CIA에서는 언제든지 어려움 타개를 요청할수 있을 만큼 권총수와의 관계를 좁히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권총수의 부탁을 그들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미국 정부가 보증을 서준다는데 한국에서 어쩔거야’
오민철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권총수의 마음은 불편했다.
내 나라 일을 내 나라 관계자와 얘기 못하고 다른 나라 관리의 힘을 빌어 해결하려드는 자신이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했다.
그때 정장을 한 두 명의 사내가 권총수가 앉아 있는 탁자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모른다.
국정원 관계자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블랙잭 권총수 대표님?”
오른쪽 인물이 입을 열었다.
“예, 권총수입니다.”
“제5국장 정현웅입니다. 이쪽은 조만기 과장.”
“조만기입니다. 대북 담당일을 하죠.”
권총수는 두 사람과 악수를 하고 세 사람은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의 얼굴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다.
권총수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잠깐!”
그때 번호판에 불이 들어왔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다가가 커피 세 잔을 가져왔다.
“드시죠!”
세 사람은 각자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후루룩!
권총수는 뜨거운 커피를 소리내어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그의 청각은 두 사람 모두 입술만 댔을 뿐 전혀 마시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미국 시민권도 갖고 있던데요?”
권총수가 고개를 돌렸다.
제5국 대북파트 제1과장 조만기가 입을 열었는데 시비조다.
미국 시민인데 우리와 뭘 더 얘기를 나누려고 하느냐.
한국 법에 저촉되지 않으니 마음대로 하면 될 일 아니냐.
권총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집안 문제인데 바깥에서 주문과 간섭이 들어오자 기분 나쁠 것은 자명했다.
“그래서 내가 정식으로 북한사람에 대한 접촉 허락을 요청하는 서류를 통일부와 국정원 두 곳에 무려 세 번을 보냈죠.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저의 서류에 답장을 보내준 곳은 없었습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내용입니다.”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답장 하나 없는 것입니까? 왜 생각 한 번 해볼 가치조차 없는지를 답장으로 보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국가적 차원의 접근이 아닌 개인적인 목적의 접촉은 절대 허락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시나 본데.”
“지금 과장님께서는 내게 얼마나 무례하신 줄 아십니까? 우린 초면입니다. 오늘 처음 만났어요. 난 지금 왜 저에게 화를 내는지 이해를 못하겠군요. 원래 국정원에 근무하면 이런식입니까?”
“그게 아니라 권 대표가 먼저 우릴 불편하게 하셨잖습니까?”
파팟!
권총수 눈에서 섬광이 뻗어 나왔다.
“언제 내가 과장님을 불편하게 했죠. 난 과장님과 일면식도 없고 전화 통화는 물론 식사 한 끼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쪽에서 어떤 연락이 온 것 때문인듯 한데 그건 어디까지나 나와 그들 사이의 비즈니스일 뿐입니다. 타인의 비즈니스에 과장님은 기분이 나쁘고 그러나 보죠? 미국 관리들에게도 이렇게 고압적입니까?”
권총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눈을 빛냈다.
“앞서 말했듯 미국 시민권도 갖고 있죠. 한국정부에서 오케이 할 수 없다면 내 사업체의 모든 것을 미국으로 옮겨 실행할 수밖에 없군요. 미국인으로서 북한 사람과 접촉하는데 한국에서 눈 부라리며 화를 내지는 않을테니까.”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 대표님!”
그때까지 침묵하던 정현웅이 불렀는데 자제하고 앉으라는 뜻이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이런 식인데 일반 국민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겠군. 없는 일로 하죠.”
권총수는 돌아갔다.
“권 대표님, 대표님!”
정현웅이 소리쳤지만 권총수는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