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7화: 청천벽력(3)
장웅철이 눈을 빛낸다.
“대표님, 우리 거래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권총수는 뭐냐는 듯 바라보았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씀 하시죠. 최대한 대표님의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권회장 뜻이겠죠?”
“전권을 위임 받았습니다.”
“급하긴 급했나 보군.”
“부인 않습니다. 우린 아주 급하죠.”
“급한 비즈니스는 손해보기 십상인데.”
“각오하고 있습니다.”
장웅철은 부인하지 않았다.
“아시겠지만 천왕건설은 지금 용인과 부산 해운대와 남해에서 큰 공사를 진행중입니다. 시장에서의 소비자들 반응도 좋고.”
시장에서 소비자들 반응이 좋다는 건 주가가 계속 오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회장님이 소유하고 있는 주식 전부를 넘겨 드릴수도 있습니다.”
권총수는 깜짝 놀랐다.
천왕건설은 국내 건설사중 시공순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작년 한 해만 약 25조원 가까이를 수주한 것이다.
연일 주가는 고공행진이고 자고나면 시총이 일조 원씩 늘어난다.
“회장님 일가가 갖고 있는 건설 주식은 약 12퍼센트 정도 됩니다. 그중 6퍼센트를 회장님이 쥐고 있죠.”
천왕건설 주식의 6퍼센트면 조 단위가 넘어간다.
권총수가 놀란 건 전혀 예상못한 배팅이고 규모와 액수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권악수측에서 어떤 제의가 오리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알짜배기 중 하나인 건설 주식의 6퍼센트를 양도하겠다니 권총수는 이마를 찡그렸다.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거절할 이유는 더욱 없으리라 봅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장웅철은 권총수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차에 올랐다.
부우웅!
검정색 벤츠가 앞을 스치며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권총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더니 피식 웃고서 차를 끌고 집을 향해 올라갔다.
허름한 공원묘지다.
관리인은 사람이 들어가는데도 관리실 창문 안에서 쳐다볼 뿐 막지도 어디가냐고 묻지도 않았다.
지나가는 권총수의 눈꼬리가 약간 꿈틀거렸다.
‘묘지 분위기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를 중얼거리며 지나갔다.
길 좌우로 많은 봉분과 비석들이 세워져 있었다.
어떤 묘는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어떤 묘는 봉분이 훼손되고 비석은 곧 넘어질 듯 삐딱하게 서 있었다.
꽃을 사올까 했지만 평소 안하던 일이어서인지 쑥스럽기도 하여 소주 한 병과 종이컵 하나 달랑 들고 온 것이다.
찾아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자신을 낳아준 여자이긴 하지만 어머니라는 의미는 전혀 두고 있지 않았다.
한국배우협회 사이트에 들어가 설지의 무덤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
그녀를 떠올리면 오로지 분노만이 폭발했었다.
이해가 되지 않고 답답한 여자라고 경멸했었는데 조금씩 감정이 달라지고 있었다.
자신도 나이가 들어가고 세상 풍파를 헤쳐오다 보니 측은지심이 생긴 것이었다.
지금도 재벌기업 총수와 살림을 차리는 여자 연예인들은 수두룩 하다.
그들에게 사랑은 2차적인 것이고 누가 뭐라고 해도 돈을 이유로 몸을 던졌다고 해도 무리 있는 시선은 아니다.
열렬한 사랑이 싹터서, 보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사랑 때문에 결혼 한 사람은 거의 없다.
설지 역시 그런 여자중 한 명이었다.
키워주겠다 밀어주겠다, 더욱이 형님 권철악의 회사인 천왕그룹 여러 계열사 광고 모델까지 시켜준다는 말에 넘어갔을 것이다.
천박했다.
그래서 더욱 넌더리를 냈는지 모르나, 이제는 가엾은 것이다.
그래서 발걸음을 했다.
한 여름이니까 풀이 길게 자란 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봉분에 풀이 없다.
푸른색 잡초 몇 개만 자라고 있을 뿐 마사토가 드러나고 멧돼지가 헤집어 놓기라도 한 듯 봉분은 평지 수준이다.
비석 또한 여기저기 깨졌는데 자세히 읽지 않으면 설지묘라는 걸 모를 정도였다.
‘우습군’
한때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다.
한국 영화에 끼친 그의 연기력과 뛰어난 미모는 지금도 영화 관계자들로부터 극찬을 받는다.
그런 여배우 묘지가 너무 초라하다.
주변을 훑어본 권총수는 가져온 소주병 마개를 따고 종이컵에 가득 한 잔을 따라 묘비 앞에 놓았다.
그게 끝이었다.
할 말이 없다.
그때 아래쪽을 내려다보던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한 여자가 비탈길을 올라오고 있었는데 손에 커다란 꽃바구니 한 개를 들고 있었다.
머리가 희끗한 것이 족히 칠십은 가까워 보였는데 검정색 긴 바지에 소매를 걷어 올린 흰색의 셔츠를 걸쳤다.
여자는 이런 곳에 자주 와본 사람처럼 고개를 더듬거린다거나 좌우로 돌리며 봉분을 찾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정확히 방향을 꺾을 지점에서 꺾었고 여러개의 봉분을 무시하며 걸어왔다.
다가오는 여자를 보던 권총수가 어금니를 물었다.
꽈악!
아는 여자다.
물론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사진으로 봤다.
현미정이다
권악수 모친인 것이다.
현미정은 그제서야 권총수를 발견한 듯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비석 앞에 있는 종이컵 소주잔을 발견하고는 권총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묘지 주인이 워낙 유명한 여배우였기 때문에 가끔 그녀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꽃을 놓고 술잔을 따른다.
물론 팬이라고 찾아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이순과 고희에 접어든 사람들이다.
권총수처럼 젊은 팬이 찾아온 건 아직 본적이 없었다.
“누구신가요? 보아하니 여기 주인을 좋아했던 팬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요?”
권총수는 대답을 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권총수에게 시선을 던진 현미정이 들고 온 꽃 다발을 술잔 옆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잘 계셨어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 현미정은 묘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오늘도 무척 더워요. 옛날 같았으면 조금씩 더위가 꺾일 때인데 요즘은 이상 기후로 구월중 하순까지도 더워요.”
홱!
말을 하다말고 갑자기 뭔가 생각 난 듯 현미정의 고개가 좌측으로 돌아갔다.
20여 미터 앞에 권총수가 걸어가고 있었다.
“저기 잠깐요.”
권총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현미정이 천천히 걸어왔는데 두 눈이 반짝 거린다.
“무슨 일이십니까?”
현미정은 권총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는데 눈자위가 미세한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 역시 권총수의 정체에 대해 뭔가 짚어 낸 것이 틀림 없었다.
“저기 소주잔 선생님께서 놓아 둔건가요?”
“예.”
“저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는 아시나요?”
“압니다. 설지라는 유명한 배우였다더군요.”
현미정의 눈이 커졌다.
“팬은 아닌 듯 한데?”
또 묻는다.
“글쎄 뭐라고 대답을 해드려야 하나, 솔직히 말씀드리죠. 저 무덤속 여자가 날 낳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어머니?”
권총수는 피식 웃었다.
“아닙니다. 전 아들이 아닙니다. 저 여자가 낳았을 뿐이죠.”
현미정의 눈이 가늘어진다.
권총수의 말뜻을 쉽게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낳아준 사람인데 어머니가 아니라는 건 또 무슨 말인가.
“자신의 야망을 위해 권력을 유혹한 여자입니다. 그런 여자가 날 낳고 싶어 낳았겠습니까?”
“자식을 볼모로 자신의 욕망을 계속 이어가고 채우기 위해 계획적인 출산이란 건가요?”
“죽은 사람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그럼!”
권총수는 다시 돌아섰다.
“아!”
뭔가 생각 난 듯 권총수는 돌아섰다.
“보아하니 자주 오시는가 본데 묘지 관리도 좀 신경 쓰시지 그러십니까?”
권총수는 빙긋 웃으며 걸어갔다.
그때 등 뒤에서 가슴을 울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요. 진심으로 용서를 청합니다.”
그녀도 알고 있다.
온 집안을 궤멸시키다 시피 했으니 모를 이유가 없을 것이다.
현미정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게 무슨.”
권총수는 다가가 그녀를 일으키려다 멈췄다.
“그렇잖아도 언젠가 꼭 한번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설지씨를 죽인 사람은 남편이지만 나 또한 나름대로 그녀를 없애기 위해 못된 짓을 많이 했으니까요.”
그녀의 고백이 술술 풀리듯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소속 영화사에 압력을 넣어 작품 캐스팅을 막았고, 감독들을 찾아다니며 설지를 출연시키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그녀를 출연시킨 영화사는 국세청의 세무조사까지 들어갔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이 있었어요. 그런 위험을 무릎 쓰고서라도 영화사 감독 모두 그녀를 주연배우로 낙점하기 위해 경쟁이 치열했다는 거죠. 설지씨를 출연 시키면 위험을 각오할 만한 수익 창출이 가능했거든요. 그녀는 미모뿐만 아니라 연기에서도 거의 천재적 소질을 보였죠.”
“저한테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미안함이 절절히 배어 있는 현미정의 얼굴과 달리 권총수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남의 얘기를 듣는 듯 흔들리지 않는 감정을 보이자 현미정의 눈이 흔들린다.
인생을 살만큼 살았다.
정치인의 안내로 숱한 위기와 크고 작은 사건에 휘말리며 하루도 편안한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부침이 심해서인지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그런 자신에 비해 아직 마흔이 되어 보이지 않는 권총수다.
낳기만 했을 뿐 얼굴을 모르고 부대끼며 살아본 일이 없어 성냥개비 만큼의 작은 정 따위도 없겠지만 어머니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자식을 흔들기에 부족하지 않는 단어다.
그런데 권총수는 어머니의 과거를 얘기하는데도 흔들리는 것이 없었다.
“설지씨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권총수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돌아섰다.
걸어가는 권총수를 바라보는 현미정의 얼굴이 여러 차례 변했는데 하나 같이 표정들이 사납다
사과할 때와는 달리 매몰차고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증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지이이!
그때 백속에 있는 핸드폰이 진동했다.
가방을 열고 핸드폰을 꺼낸 현미정은 보내온 문자를 본다.
‘어떡할까요?’
잠시 문자를 내려다보던 현미정은 매니큐어 칠한 손가락을 바르게 움직였다.
‘놔 두세요’
현미정은 길을 내려가는 권총수를 한 없이 바라보았다.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듯 보였지만 들을 수는 없었다.
단지 얼굴에 살얼음이 낀 것을 보면 적의 가득 담긴 말을 내뱉은 것으로 보였다.
권총수는 담배를 물고 천천히 걸어내려왔다.
관리실을 지나오며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관리인이 문을 열고 나와 있었다.
처음 본 사람인데 권총수는 관리인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움찔!
권총수의 웃음에 관리인이 깜짝 놀란다.
“수고하세요.”
관리인이 꾸벅하며 얼떨결에 고개를 숙인다.
권총수는 관리실을 지나치면서 나직하게 중얼 거렸다.
‘지피지기백전백태(知彼知己百戰不殆)라는 말이 있지. 너무 평범하다고 여기는 걸까’
전장에서 적을 모르면 내가 죽는다.
살기 위해 살피고 정보를 얻고 그들의 습성을 귀동냥이라도 한 이후 공격을 했다.
그렇게 준비를 했어도 이기는 과정은 너무 힘들다.
싸워 이기고 살아 있음을 느낄 때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이 말을 되새긴다.
너무 많이 알고 있어 평범해져버린 고사성어다.
그렇기에 어쩌면 사람들이 너무 무시하며 살아가는지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삶의 좌우명이 된 말이다.
명절도 아닌 무더운 여름 날 텅빈 공원묘지를 찾아오는 사람을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관리인이 몇 명이나 될까.
표정은 감출 수 있겠지만 감정까지 숨긴다는 건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수십 년 용맹정진하는 노스님들이라면 모를까 일반인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거기에 터무니없이 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