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516화 (516/651)

제516화: 청천벽력(2)

법무부 제1차관 김정명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출근 중이고 신호를 받아 정지선 앞에 멈춰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아침 일찍 결례가 아닌지 모르겠다면서 특유의 쉰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상대는 대학 선배이자 자신과 동향인 장웅철이었다.

“출입국 기록을요?”

갑자기 전화를 걸어 권총수라는 인물이 지난달 20일을 전후하여 해외로 출국한 기록이 있는지 알아봐달라는 것이다.

출입국에 관한 개인 기록을 보려면 법원에서 발부한 영장 없이는 불가능하다.

본인이 허락하지 않는 한 누구도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때 신호가 바뀌었다.

“선배님 일단 사무실에 들어가서 제가 전화 드리면 안될까요?”

“그렇게 하게. 기다리겠네.”

“빌어먹을!”

통화를 끝낸 김정명은 핸드폰을 조수석에 던지듯 놓았다.

대학선배인데다 고향이 같고 하여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다.

지금은 권위가 많이 떨어졌지만 죽은 권철악이 있을 당시 천왕그룹 법무팀장 하면 나는 새는 몰라도 걸어가는 사람 한두 명 정도의 발걸음은 충분히 멈춰 세울 정도로 기세등등했다.

장웅철은 김정명이 법무행정직 5급 공무원 초년병 시절 수시로 불러 술도 사주고 용돈까지 쥐어줬다.

김정명도 얻어먹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근무를 했는데 천왕그룹 계열사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미리 귀띔을 해주어 대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제는 다르다.

자신도 차관인데다 천왕그룹도 예전의 성세는 찾아 볼 수 없다.

권악수가 나온다고 해도 몇 개의 독립기업으로 쪼개질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뭐라고 핑계를 대지’

떨어지는 석양에 대고 절을 할 필요는 없다.

천왕그룹은 서서히 서쪽 바다를 향해 떨어지고 있는 빛바랜 석양이었다.

사무실에 도착한 김정명은 잠시 고민을 해야 했다.

무조건 잘라 버려도 안된다.

좀 더 생각이 필요했다.

굴리고, 또 굴린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사무실을 울렸지만 이것이다 하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마침 동료 남자직원이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다시 생각에 잠겼고 10여분 정도 흘러 김정명은 핸드폰을 들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컴퓨터를 켰다.

장웅철은 굳어졌다.

이렇게 숨 가쁘게 놀라본 적은 없다.

‘권총수 짓일 가능성이 90퍼센트 이상이다’

뉴스에서 미하일로프 죽음을 듣고 권총수가 범인일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못했다.

그런데 지금 모스크바 행 출국 기록과 입국 기록을 김정명으로부터 받았다.

‘빌어먹을’

틀림없다.

권총수가 자신의 암살 사건에 대한 어떤 증거 자료를 가져와 수사당국에 넘겼다.

그렇지 않다면 갑자기 사면 대기가 떨어질리 없는 것이었다.

침착해야 한다.

냉철하지 않으면 안된다.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장웅철은 일부러 목욕탕을 찾아가 냉탕에 몸을 담그고 사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난국에서 어떤 방법으로 빠져 나올 수 있는지 시나리오를 찾기 시작했다.

세상에 길은 있다.

문제는 얼마나 빠르고 분명하게 길을 찾느냐였다.

권악수가 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은 권총수의 귀에도 들렸다.

아침 회의를 끝낸 권총수는 담배를 피워 물고 창문을 열었다.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알 수 없는 뿌연 구름에 서울은 갇혀 있었고 해는 우두커니 떠 있었다.

한번쯤 눈 감고 넘어가볼까 생각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이만하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권씨 일가에 대한 응징도 모자라지는 않다고 느꼈다.

하지만 권악수에게서는 이른바 어떤 개전(改悛)의 정이라는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밤은 밤일 뿐 절대 낮이 되지 않는다’

테러범을 쫓는 CIA 정보원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이다.

그렇다고 개심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한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들 대부분은 악의 진흙탕속에 깊이 발을 담그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면에서 볼 때 권악수는 어려서부터 거칠 것 없고 무서울 것 없는 황태자로 성장했다.

그런 그가 당연히 약한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회에 해악이 될 뿐 단 한 푼의 득도 가져올 사람은 아니다’

언젠가 오민철과 강원도 여행을 갔다가 관광차 들른 절간의 스님에게 권악수의 사주를 한 번 맡겨본 적이 있었다.

스님은 인상을 찌푸리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건 짐승의 사주요’라고 잘라 말했다.

딸칵!

문이 열리고 오민철이 들어섰는데 눈을 빛낸다.

“조간신문 명단에는 권악수가 나왔다고 기사화 되었던데?”

“어젯밤 미리 써놓은 기사일거야. 아마 방송 뉴스에서는 권악수 회장의 특사 대기 사실을 놓고 요란할걸.”

그때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경리과장 강순태가 들어섰는데 눈이 커져 있었다.

“텔레비젼 보셨습니까? 지금 난리입니다.”

재빨리 오민철이 안쪽 회의실로 들어갔고 권총수도 천천히 따라 들어갔다.

오민철은 회의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켰는데 ‘뉴스 특보’란 자막이 화면 상단에 걸렸다.

그리고 권악수 회장의 사면 대기에 대한 현장 기자의 리포트가 울려 나왔다.

오민철은 여러 채널을 돌렸는데 모든 방송이 권악수 소식을 전달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내려졌는지에 대한 분석이 분분했으나 어느 방송도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권악수와 권총수의 관계를 아는 직원들이 하나둘 회의실로 몰려 들었다.

그들도 관심있게 뉴스를 보며 서로 목소리를 낮추며 이모저모 판단을 했는데,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

탁!

오민철이 텔레비전을 껐다.

텔레비전이 꺼지자 모두의 시선이 권총수를 향했다.

궁금해 죽겠다면서 아는 것 있으면 빨리 말해보라는 독촉 같았다.

“왜들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나도 모릅니다.”

권총수가 문을 열고 나가자 나머지 사람들이 다시 소리를 낮춰가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사실 권악수가 나오면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에 대해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블랙잭의 회사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아직 천왕그룹에 비교할 바는 못 된다.

시장경제에서 돈 보다 더 무서운 무기는 없다.

돈으로 밀고 들어와 버리면 대책 없는 것이다.

직원들은 권악수가 나오지 못한 배경에 권총수가 어떤 식으로든 관계되어 있을것이라고 추측했다.

***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잠시 맞은편에 앉은 크리스를 바라보았는데 두 눈이 활활 타오른다.

그건 지금 뱉어낸 말이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변형되거나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였다.

FBI 일년 예산이 대략 백억 달러가 넘는다.

CIA도 그렇듯 예산에서 사용처를 정확히 기재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제로 섬’이라는 특별예산이 편성되어 있다.

비밀을 요하는 작전에 투입되는 예산들인데 국회에 보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출석하여 청문회하듯 추궁당하거나 사용처를 감사받을 일도 없다.

‘오천만 달러’

권총수는 속으로 중얼 거렸다.

CIA와 손잡고 몇 번 일을 했지만 그들도 이만큼 거액을 제시한 적은 없었다.

물론 FBI와 CIA는 다르다.

CIA는 용병 회사 입장에서는 가장 가까이 두고 싶어하는 파트너이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데는 많은 요소가 존재한다.

그중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모든 보안기업들은 첫 번째로 정보를 꼽을 것이다.

적을 안다는 건 어떤 첨단 장비보다 위에 설 수 있는 조건이다.

그래서 모두 보안기업들이 CIA나 영국의 MI6같은 기관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이유다.

권총수 역시도 자신의 작전을 성공시키는데 그들의 도움을 상당히 받은 탓에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그다지 크게 조율하지는 않았다.

용병시장에서 은퇴하지 않은 한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CIA와는 계속 교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크리스는 자신 입으로 오천만 달러를 꺼냈다.

처음부터 권총수와는 돈 가지고 씨름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씨익!

갑자기 권총수가 웃음을 지었다.

“돈을 놓고 이렇게 걱정되어 보긴 처음입니다.”

아무리 사용처를 추궁당하지 않는 돈이라고 하지만 괜찮겠느냐는 말이었다.

“난 지금 캡틴이 예스를 할 것인지 아니면 싫다고 할지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아무도 없이 둘만 만났다.

중요한 얘기가 오고 갈 것이 뻔했기 때문에 오민철 스스로가 뒤로 빠졌고 브래들리 역시도 눈치 빠르게 필립모리스 코리아에 볼일이 있다면서 돌아섰다.

“상황이 어느 정도 입니까?”

크리스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자신의 의뢰를 받아들이겠다는 신호였다.

찡그려졌던 이마가 펴졌다.

그야말로 늪속에서 빠져나온 기분이다.

“멕시코와 콜롬비아 쪽과 비교 한다면 말입니다.”

이미 그쪽 조직들과는 충돌의 경험이 있었다.

마약조직이라기 보다는 군부대급 장비를 갖추고 공권력에 맞서는 사람들이다.

“브라질 경찰의 20퍼센트가 앞에서는 단속을 하고 뒤에서는 그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는 것이 FBI 판단입니다.”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경찰의 20퍼센트가 마약조직과 선을 닿고 있다면 결코 게임이 되지 않는다.

정보가 빠져 나가기 때문에 경찰이 마약조직을 소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지금까지 피해는 어느 정도죠?”

“경제적 손실은 제쳐두고 인명 피해만 30여명 가까이 됩니다.”

“마약단속국(DEA)까지 포함한 숫자입니까.”

“우리 FBI만 그렇죠. 그쪽은 우리보다 피해가 더 클 것입니다.”

권총수는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커피를 마시는 권총수를 보는 크리스의 두 눈이 처음보다 훨씬 안정되어 있었다.

“여기 일을 정리하고 워싱턴으로 가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캡틴,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오.”

크리스는 길게 한 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터널 옆으로 빠져 올라온 벤츠가 이북 오도청을 향해 달렸다.

오도청 입구에서 좌측 다리를 건너려던 벤츠의 브레이크 등이 들어오며 속도를 늦추더니 길가에 세운다.

라이트를 끄고 문이 열리더니 권총수가 내렸다.

다리 입구에 역시 검정색 벤츠 한 대가 서 있었는데 한 사내가 우뚝 서 있었다.

천왕그룹 법무팀장 장웅철이었다.

권총수는 천천히 걸어 장웅철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간 권총수는 빙긋 웃으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다리 입구에 서 있는 전봇대에 등을 기대고 선 권총수는 굳은 얼굴로 있는 장웅철을 보았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이럴 땐 놀라면서 장 법무팀장이 여긴 어쩐 일이냐고 물어야 한다.

그런데 밥 먹었냐고 묻는다.

그건 당신의 속마음이 어떻고 지금 왜 여기서 날 기다리는지 대충 감이 온다는 뜻이다.

“오늘 하루종일 바빴습니다. 역시 대표님이더군요?”

권총수는 가타부타 대답이 없고 담배만 피웠다.

“검찰을 통해 사건의 내막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지금 살인교사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더군요. 도주의 우려가 있다면서 법원에서 출소 금지에 관한 영장도 발부했더군요.”

툭!

권총수는 담배를 다리 아래로 던져 버렸다.

“앞으로 재판에서 모든 것이 밝혀지겠지만 아직 방법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거래를 암시하는 말이다.

“방법? 무슨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까?”

“권씨 가문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증거는 없지만 우리는 물론 경찰과 검찰에서도 권 대표님의 짓이라는 걸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재미있는 얘기군요.”

권총수가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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